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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끝으로의 여행
루이 훼르디낭 쎌린느 지음, 이형식 옮김 / 최측의농간 / 2020년 5월
평점 :
어느덧 연말연시도 다 지나갔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기념한답시고 기록 같은 걸 남길 마음이 들지 않는다. 사실 되돌아봤자 더 나은 내가 될 것도 아니고, 이것저것 의미를 부여한들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내가 달라진 점도 없다. 그저 하루하루를 묵묵히 견디며 나아갈 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새해가 반가운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싶은. 한 친구가 말하길, 마음에 빈 공간이 느껴지는데 채우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채움이 아니라 비움을 추구하라고 답해주었다. 채움에는 만족이 없고 끝없는 갈증만 있다. 반면에 비움은 윤택하고 똑 부러진 삶과 정신을 갖게 한다. 풀 소유와 도파민에 쩌들은 현대인들은 이 비움의 미학을 무슨 애늙은이 취향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은 성인군자처럼 경건하게 살아가는 핵노잼 라이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쉽게 말하면 주식하는 사람의 멘탈 관리와도 같은 이치이다. 대박 나고픈 욕심으로 주식을 샀지만 내 주식이 오를 욕심을 버려야만 한다는 모순이랄까. 그러니까 부정 에너지의 최소화라고 보면 되겠다. 이 훈련이 숙달되면 감정의 기복이 줄어들어 큰 부정은 쉬이 넘기고, 작은 긍정에도 넘치는 만족을 느낄 수 있다. 부족한 내 글들을 꾸준히 찾아주시는 소수의 분들에게 뭐든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적어봤다.
<밤 끝으로의 여행>은 12월 중순부터 시작하여 이제야 겨우 완독하였다. 게을러진 핑계를 대자면 연말은 바빴고 연초에는 감기로 고생했다. 무엇보다도 더럽게 진도가 안 나가는 이번 책은 나님이 취약한 의식의 흐름 기법이었다. 다행히 못 읽겠다 할 만큼 횡설수설은 아니었지만 두 번 다신 읽고 싶지가 않다. 솔직히 내용마저 그냥저냥이었는데 왜 중도 하차를 안 했냐면, 이 책이 해외 투표 Top 50권 안에 든다고 해서였다. 첨 보는 작가에다 제목도 뭔가 있어 보이길래 마음을 가다듬고 초 집중해 보았지만, 이내 진지하게 임하는 건 미련한 짓임을 깨달으며 늘 그랬듯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둔다.
짧게 요약해 보면, 의대생 바르다뮈가 자진 입대하여 1차 대전을 치른다. 그러다 전쟁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퇴원 후에 아프리카로 건너가 식민지 생활을 한다. 그곳을 탈출하여 동경하던 미국에 갔다가 실망한 그는 본국인 프랑스로 돌아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작가의 데뷔작인 만큼 자전적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분도 꽤나 복잡하고 정신없이 살았나 보더라. 자주 느끼는 거지만 전쟁을 겪은 작가들의 글은 아무리 잘 썼대도 군데군데 나사 빠진 느낌과 횡설수설하는 기분을 갖게 만든다. 이젠 뭐 그러려니 한다. 그나저나 이 작품에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한지라 어떻게 리뷰하면 좋을지 모르겠디야.
흐름은 크게 의사가 되기 전과 후로 나뉜다. 전반전에는 바르다뮈가 가는 곳마다 불운이 따라다님을 볼 수 있는데, 삶이 그를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괴롭힐 작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온 세상이 주인공을 꼭 무너뜨릴 작정이라도 한 듯했는데 개인에게 어떤 악감정을 품어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소모품이다 싶으면 일찌감치 갈아치우려는 냉담한 분위기로 느껴졌다. 여하튼 거친 세상을 쟁취할 의욕을 상실한 바르다뮈는 삶의 시련을 피하고자 계속해서 밤 속으로 도주한다. 그러나 어딜 가든 소용이 없었다. 아프리카에서는 대자연의 위협이 공포였고, 미국에서는 타인의 무관심이 공포로 닥쳐왔다. 그렇게 도망만 다니던 그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학업을 마치고 의사가 되었다는 건,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하고 공포를 받아들였다는 게 아닐까. 오래전에 생기를 잃은 바르다뮈는 환자들을 상대하면서도 연민이나 동정 같은 감정을 갖지 못했다. 직업은 가졌지만 여전히 가난했던 그는 끊임없이 밤의 세계를 그리워했다. 대낮에 사는 사람들은 밤에 속한 사람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라면서.
작중에는 서브 주인공인 로뱅송이 나온다. 이 친구는 바르다뮈가 가는 곳마다 잠깐씩 등장했다가 훗날에 줄곧 붙어지내는데, 주인공과 다르게 기분파에다 본능적인 성격이다. 아마도 작가가 답답했던 본인의 어떤 틀을 깨고자 하여 로뱅송을 만들었지 싶다. 똑같이 전쟁을 겪었지만 로뱅송에게는 우울함이나 자기 연민 따위가 없었다. 미래나 계획도 없긴 했지만. 여하튼 희로애락을 잃어버린 주인공에게 커다란 자극제였던 로뱅송은, 좋든 싫든 바르다뮈의 잿빛 인생을 조금씩 변화시켜주었다. 그가 하는 거라곤 어떤 여자와 만나 연애질을 하고 사랑싸움을 하는 게 전부인데, 그로 인해 주인공의 다 죽어가던 감정들이 꿈틀대는 걸 보면 역시 이대로 살다 죽으리란 법은 없구나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메시지를 주는 내용이 아니다. 읽는 내내 느껴지는 그 공허와 허무로 마무리되기 때문에. 두려움을 피해 밤이라는 사각지대로 숨어보지만, 자신을 가두고 갉아먹는 괴물 또한 그 심연이라는 사실. 이상 나님의 허접한 리뷰였습니다. 대체 이 책의 명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나. 차라리 돈키호테를 두 번 더 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