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 파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12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2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역시나 역시였던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 이번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스릴러에도 여러 장르가 있지만 정통 스릴러는 역시 범죄/액션물 아니겠는가. 작중 배경인 LA에서는 온갖 살인사건과 부패정치가 들끓고 있으나 독자 된 입장에서는 그저 즐겁기만 할 뿐이니 쪼까 거시기허다.


해리가 무려 13년 동안이나 붙들고 있었던 미제 사건을 다룬다. 다년간의 형사 짬밥과 육감이 말해주는 실종 여성의 살해 용의자가 있었는데, 마침 붙잡힌 연쇄살인범이 자기가 죽였다고 자백하는 것이다. 변호사를 대동한 범인의 거래 조건은, 사형 면죄부와 피해자들의 정보 교환이었다. 권한이 없는 해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협상을 하고 범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후 범인을 따라 해리 일행은 시신이 묻힌 장소로 향한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느슨해진 틈을 타 도망치는 범인. 이 과정에서 경찰 두 명이 죽고 해리의 파트너도 총 맞고 생사를 오간다. 활개치는 범인과 죽어가는 동료 사이에서 패닉이 와버린 해리. 무엇보다 이 사태의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만 할까.


유일한 목격자가 된 해리는 증언을 위해 윗선에 불려간다. 그것도 여러 번 불려가는데 매번 받는 질문들이 묘하게 뭔가 숨기고 있단 느낌을 주고 있었다. 시궁창 출신의 해리가 이런 구린내는 또 기가 막히게 잘 맡거든. 이번 사건의 담당 검사를 캐봤더니 해리가 점찍었던 용의자의 회사 직원들 명의로 검사에게 거액이 입금된 사실이 밝혀졌다. 역시 자신의 촉은 틀리지 않았지만 저 X-Y의 빼박 관계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읽다 보면 사태의 전말이 대강 보이는데 이걸 공론화 시킬만한 팩트가 부족하다는 게 문제다. 이 애간장 타들어가는 느낌을 정말 오랜만에 받아본 것 같다.


매번 그랬지만 유독 이번 편에서는 해리의 감정이 뒤죽박죽의 연속이었다. 가장 거시기 했던 점은 총 맞은 파트너가 살아난대도 경찰국에서 잘릴지 모르는데, 해리는 다시 만난 옛 연인과 깨소금 볶는 중이라 정신이 없다. 잦은 애정씬들이 차기작의 방향을 잡기 위해서였겠다만 그래도 과하긴 했다. 강제 자택근무를 하는 동안 자료분석을 하면서 수사 곳곳에 심어진 조작의 기미를 발견하고, 이것이 경찰과 범인의 짜고 치는 고스톱임을 알아챈 해리 보슈. 근데 이상하게도 은퇴를 한 달 앞둔 자신의 팀장이 엮여있었는데, 아쉬울 게 하나 없는 제 상사가 어째서 이 난장판에 개입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연쇄살인범이 변호사를 배신하고 거래 조건을 파기한 것도 이해가 안 되고, 특히 그의 범죄 동기를 알 수 없어서 답답해했다. 아 진짜 재밌다 재밌어.


아직 못 읽은 독자의 즐거움을 위해 여기까지만 적기로 하겠다. 이번 편은 정말 강약 조절, 완급조절이 잘 되었다고 느껴진다. 주인공이 무력해졌다가 타올랐다가를 내내 반복하는데다, 재회한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해리의 고질병이 잘 드러나기 때문에. 12편이나 읽었는데 아직도 시리즈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1992년부터 매년 시리즈를 출간하는 코넬리 옹의 넘사벽 열정에 그저 박수를. 56년생으로 올해 68세인데, 이제 슬슬 시리즈 완결 내셔야 하지 않을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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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7-11 16: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12편이나 냈는데 반밖에 되지 않는다구요? 코 아저씨 괴물이네요.
저는 이런 류의 책 잘 못 읽겠던데. 저의 순백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것 같아서. ㅋㅋㅋㅋ
재밌는게 장땡이긴하죠. 저도 기회되면 함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까짓 상처쯤...ㅎㅎ

물감 2024-07-11 17:30   좋아요 2 | URL
놀랍게도 서브 시리즈와, 스탠드 얼론도 많습니다 ㅋㅋㅋ 괴물 그 잡채...
아무래도 장르물은 취향을 잘 타죠. 그런데 그런 분들도 범죄 드라마나 영화는 잘 보던데요 ㅋㅋㅋ 여튼 저는 스릴러소설 광입니다~~

구단씨 2024-07-11 2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범인이 참 협상 능력이 좋으네요.
그리고 해리는 왜 이 위급한 순간에 다시 만난 애인이랑 꽁냥꽁냥 할 정신이 있는지, 참나...
말씀하신 것처럼, 조였다 느슨해졌다 하면서 독자를 막 휘두르는 편인가 봅니다. ^^

물감 2024-07-12 09:1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시리즈이기 때문에 전작들을 읽어보면 주인공의 배경과 기질 등으로 이해가 안 될 것도 없습니다만, 그래도 제3자가 보기엔 거시기 합니다 ㅋㅋㅋ
강약 조절을 잘하는 작가들 보면 정말 신기합니다. 독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기가막히게 안다는 거잖아요. 사랑받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ㅋㅋㅋㅋㅋㅋ
 
붉은 소파
조영주 지음 / 해냄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조영주 작가의 <반전이 없다>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녀를 소설가로 자리매김하게 해준 수상작 <붉은 소파>를 읽으면서 과연 장르문학에 재능이 있는 분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이래저래 볼멘소리가 많은 작품이지만 나님은 과감하게 별 다섯을 주겠다. 이만하면 완성도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기존 장르물들과 겹치지 않은 독창성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한국의 미나토 가나에 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스타 사진작가 정석주는 붉은 소파와 함께 전국을 떠돌며 촬영 중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소파 위에서 딸을 살해한 범인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어떤 단서도 없이 오직 ‘촉‘에 의지하는 복수를 위해. 그의 방랑은 스튜디오의 밀린 월세로 협박하는 제자 때문에 끝이 난다. 이후 제자를 통해 형사 김나영을 만나 사건 현장의 촬영 담당을 맡는다. 하기 싫었지만 수입도 짭짤했고, 어쩐지 딸이랑 닮은 이 형사에게 눈이 계속 가는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새파랗게 어린 나영의 까칠한 태도에도 고분고분했던 주인공. 그러나 이것은 지독한 악연의 시작점이었으니.


각 사건마다 정석주가 촬영하면서 남다른 촉으로 정황을 판단하고 의문점을 풀어나간다. 이제 밀린 월세도 다 갚았고 더는 경찰과 붙어 다닐 이유가 없는데도 나영은 계속해서 석주를 찾아온다. 자신도 석주의 딸과 같은 피해자였다면서 말이다. 범인에게 당하던 중 베란다로 뛰어내려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 김나영. 그러나 석주는 이 친구 때문에 딸이 죽게 되었음을 알게 돼 마음이 복잡해진다. 딸과 결혼한 제자를 유혹하고 놀아났던 과거 나영의 고백이 이어지고, 제자가 나영에게 놀러 간 사이에 집을 지키던 딸이 살해되었던 것. 딸의 얼굴을 하고서 자백하는 이 또 다른 피해자에게, 원망의 화살을 겨누지 못하는 석주의 마음을 어찌하랴.


읽다 보면 이 작품은 추리 형식을 띈 사회소설이란 걸 알게 된다. 그러니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어야만 한다. 점점 갈수록 내막을 둘러싼 관계 구도가 복잡해진다. 범인의 연쇄살인은 스타 사진작가인 석주를 찬양했던 누군가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범죄의 씨앗은 정석주 자신이 심었던 것이었기에. 먼저 석주의 딸은 그의 친자식이 아니라, 강간당해서 낳은 누나의 딸이었다. 아마추어 시절의 석주는, 누나와 딸을 찍은 사진집으로 공모전에서 우승하여 화려하게 데뷔하였고, 그 사진집을 알아본 강간범은 몰래 누나를 찾아와 돈으로 입막음하였다. 끝내 누나는 붉은 소파 위에서 자살했고 석주가 대신해서 그 딸을 키워온 것인데, 알고 보니 누나의 자살도 딸의 죽음도 전부 제 탓이었단 말인가.


나영이 석주에게 매달렸던 건, 자신을 헤치려던 범인을 잡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석주의 인상에서, 늘 냉정하고 차가웠던 아버지의 ‘다정한 버전‘을 느껴서였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난 나영의 아버지를 향한 관심 끌기가 삐뚤어진 것이 유부남, 즉 석주의 사위에게 꼬리친 결과로 이어졌고, 그렇게 나영도 피해자가 되어 마치 자업자득이라 믿고 있음을 눈치챈 석주. 그는 나영의 친부가 자신의 광팬이라는 것과, 경찰의 촬영 협조 비용을 대준 것도 그녀의 친부였다는 사실을 듣고 그를 만나보기로 한다.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인 나영의 친부는 석주 자신과 많은 점이 닮아있었고, 둘 다 가슴속에 괴물을 데리고 사는 공통점도 발견한다. 어째서 나영이 자신에게 친밀감을 느꼈는지 알 수 있었지만, 그 괴물의 존재까지는 몰랐을 그녀에게 결국 상처를 주기로 하는 주인공. 그리하여 나영과 부친을 붉은 소파에 앉히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제법 복잡한 내용이라 최대한 가리고 추려서 적었다. 석주의 과거와 사건의 내막을 뒷받침하는 내용도 많고, ‘사진사‘라는 직업이 어떻게 사건들을 풀어가는지와, 주인공들의 왜곡된 기억과 마주하게 되는 장면 등등 볼거리가 다양한 작품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빨간 약과 파란 약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진실을 듣고 더 고통스러울 것인가, 아니면 없던 일로 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인가. 정석주도 그 같은 선택지가 주어진다. 진실을 고른 괴물은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지르며 서서히 침몰한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괴물이 되느냐, 거짓에 복종하는 노예가 되느냐.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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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7-09 14: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좀 복잡한 것 같습니다. 제목은 들어 본 것 같은데...
표지 그림이 꽤 감각적이네요. 평점도 좋고.
근데 물감님이란 저랑 같이 본 영화가 있네요. 매트릭스! ㅎㅎ
이게 뭐 철학적 요소가 많은 작품이라고 해서 관련 책도 나오고 토론회도하고
그랬다던데 전 잘 모르겠더군요. 좀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SF는 딱히 즐겨하는 장르는 아니라서 그냥 보고 나온 기억이. ㅋ

물감 2024-07-09 15:12   좋아요 2 | URL
세계문학 수상작이라 들어보신 적은 있을 거에요.
주인공 직업이 사진사라서 풀어가는 방식이 신선했어요. 무엇보다 인물들의 고뇌와 감정선이 미쳤습니다. 이야기를 꽤 잘쓰는 작가네요. <반전이 없다>도 재밌었고요 ㅋ
<매트릭스>는 안본 사람이 거의 없지 않을까요 ㅋㅋㅋ 아무리 장르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요. 일단 키아누 리브스가 너무 잘생겼고요 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4-07-11 14: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 님, 무척 재밌게 읽으셨나 봐요. 저도 읽었는데 내용도 제가 쓴 리뷰도 가물가물합니다. 5별은 주지 않은 것만 (이것도 아닐지도 ㅋㅋ)

물감 2024-07-11 15:00   좋아요 1 | URL
방금 자목련 님의 리뷰도 읽고 왔습니다ㅋㅋ 별 넷이던데요. 이정도만 후한 점수네요. 저는 매우 재밌고 흥미로웠어요. 등장인물이 죄다 애증의 관계라니, 요런 설정도 다 있네 싶더라니깐요 ㅋㅋㅋ 근데 은근히 자목련 님도 장르소설 좋아하시는 듯!?

stella.K 2024-08-07 21: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쳇, 알라딘은 물감님만 좋아하는가 봅니다.
그 비결이 뭔가요? 무심한듯 시크한...?
아님 저 표지 여인의 등짝...?ㅎㅎㅎ
암튼 축하합니다. 적립금으로 고기 사 드세요.
헉, 내가 무슨 소리하는 거야? 3=33=333

물감 2024-08-08 11:55   좋아요 2 | URL
허허 당선이 되었군요 ㅎㅎㅎ
저는 뽑힐 생각은 아에 안하고 쓰는 주의라...
스텔라님도 내려놓으시면 더 잘 되지 않을까 합니다요 ㅎㅎㅎㅎ

젤소민아 2024-08-21 05: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추리 형식을 띈 사회소설<<<<제가 지향하는 소설!! 이달의 당선작이었네요~belated congratulations!

물감 2024-08-21 10:21   좋아요 1 | URL
축하 감사합니다 ㅎㅎ 조영주 작가님 소설들은 확실히 느낌이 있어요. 나중에 읽어보셔요 ^^
 
귀신나방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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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7월이다. 여름이고 하니까 본격적으로 장르소설 뽀개기에 들어간다. 맨 먼저 미뤄두었던 장용민 작가의 <귀신나방>을 골랐는데 역시나 명불허전 페이지터너답게 이틀 만에 다 읽었다. 현재까지 다섯 작품을 읽었는데 그중에 가장 만족도가 높았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구전설화를 비틀고 접목하여 또 하나의 음모론을 창조해냈다. 다만 그 소재가 히틀러와 뇌 이식이라는 점에 김이 팍 샜다. 21세기에 와서까지 히틀러를 우려먹는 것도 그렇고, 뇌 이식에 대한 소설도 몇 권 읽었는데 전부다 그냥 그랬단 말이다. 하여 별 기대는 안 했는데 어느새 미친듯한 몰입감으로 이야기에 빠져든 나님이었다.


죽은 것으로 발표된 히틀러의 시신은 가짜였다. 히틀러 암살을 위해 결성된 독일의 비밀조직은, 평화의 외침 속에 해체되어 뿔뿔이 흩어진다. 팀의 막내였던 바우만은 미국 경찰이 되었고, 틈나는 대로 히틀러의 정보를 수집 중이다. 뇌 이식 수술에 성공해 새로운 몸으로 부활한 히틀러. 그는 나치의 잔당들과 함께 미국을 삼켜서 제3제국을 세울 계획이다. 대체 무슨 수로 미국을 무너뜨릴까 했는데, 은행을 설립하고 금을 잔뜩 사들였다가 풀어놓아서 미국 경제를 들썩이게 하고, 이 일로 연방은행 대주주에게 불려가 그의 비서로 취직한다. 오호, 이것 봐라? 여기까지만 해도 정말 스펙터클한 전개였는데 이다음부터가 초압권이었다. 역시 장용민 작가의 무대는 넓고 화려해야 제맛이다.


기존의 히틀러 특징이나 성격을 갖다 썼다면 좀 식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작중에선 뇌 이식을 거쳐 육식주의가 되는 등 자잘한 성격 변화를 갖게 된다. 그런 덕분에 제 성질을 죽이고 가면 쓰는 게 가능해졌지 싶다. 안 그러면 총통이었던 자가 타인의 시중을 든다는 게 말이 안 되거든. 아무튼 대주주의 비서로 있으면서 미국 자본시장의 권력과 시스템을 파악한 히틀러는 연방은행과 정부의 싸움을 부추기기 시작한다. 그 방식과 발상이 어찌나 참신하고 획기적이던지, 감탄이 절로 나오더라. 결국 대통령의 암살 계획으로 이어지는데 아니,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을 이렇게 엮다니 진짜 미쳤다 미쳤어. 그만한 빅 이슈에는 당연히 배후가 있었을 테지만, 거기에 히틀러를 갖다 쓸 생각을 대체 누가 하겠냐고요.


마침내 주인공이 새로운 히틀러의 꼬리를 밟았다. 총통 시절의 아내와 꼭 닮은 여자를 발견하여 푹 빠져버린 히틀러는 데이트를 위해 독단적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총살할 기회가 찾아왔으나 옆에 있는 여자를 보며 총을 거두는 바우만. 그는 여자에게 남친의 비밀을 들려주고 헤어지길 권유한다. 얼마든지 살해할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한 데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기분을 느껴보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족의 죽음을 봐야 했던 바우만이었기에, 히틀러에게도 그 같은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을까. 이전 작품까지는 굵직한 서사만 있었지, 이런 인물의 감정선은 잘 없었는데. 거참 놀라움의 연속일세.


나치의 잔당과 암살에 투입될 용병들이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시간은 없고 손발은 모자란 상황에서 바우만은 유대인 네트워크와 흑인 갱단까지 가서 도움을 구한다. 그리고 대망의 날, 세워둔 계획들은 하나둘씩 틀어져 버리고 적에게 붙잡혀버린 바우만. 다행히 위기에서 벗어나 히틀러가 머문 파티장으로 가서 총살하는 데에 성공하고 교도소에 수감된다. 그러나 나치 일당은 시신을 데려가 또다시 뇌 이식 수술로 총통을 살려내었다. 이제 감도 오지 않는 결말은 직접 읽어보시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귀신나방‘은 본 내용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분의 작품들은 언제쯤 영화화될까나. 하다못해 애니화만 되어도 대박 날 텐데. 정녕 어디서도 러브콜이 없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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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7-02 08: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엄청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 책이 그 어디였지..태국이었나. 어디 가니까 대형 서점에 번역되어 있더라고요? 아무튼 제가 이 책 재미있고 두 명의 남자 사람에게 읽으라고 줬는데 둘 다 별로라고 해서 아?! 했었습니다. 서재브리핑에서 물감님의 이 책에 대한 리뷰가 있다길래 별은... 셋일까? 하면서 왔는데 다섯 주셨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4-07-02 09:50   좋아요 0 | URL
간만에 다락방 님과 통하는 작품이네요 ㅋㅋㅋ 저는 이분의 팬이라서 더 후한 점수를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분간 장르소설 위주로 갈 건데 이번처럼 점수 체크 해봐주세요 ㅋㅋ 글고 외국에서 국내작품 번역본 보면 되게 반가울 거 같아요! 오늘부터 본격 장마 시작인데 감기 조심하세요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4-07-02 13:06   좋아요 0 | URL
감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4-07-02 15:24   좋아요 0 | URL
음... 정정 할게요. 비조심 하세요 ㅋㅋㅋㅋㅋ

꼬마요정 2024-07-06 0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 이 책 읽어보고 싶어요. 엄청 재밌을 것 같아요. 역시 여름엔 장르소설이죠!!
장마가 일본 갔다는 말이 있던데, 적당히 왔다갔다 하면서 날씨는 덜 덥고 강수량은 적정하면 좋겠습니다. 기후위기가 참 무섭네요.

물감 2024-07-06 10:41   좋아요 1 | URL
날씨가 비올랑 말랑 하면서 계속 꿉꿉해요 ... 주말부터는 비가 온다고 하니 기대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쏟아지는 게 낫지 않나요ㅋㅋㅋ <귀신나방> 정말 재밌어요. 슬럼프일때 이겨내기에도 딱이다 싶고요. 휴가철에 한번 읽어보셔요. 저는 당분간 장르소설 위주로만 달리려고 합니다 하하핳
 
전락 창비세계문학 11
알베르 카뮈 지음, 유영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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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카뮈의 3대 장편을 완독했다. 그 밖에도 <반항인>, <시지프 신화> 등이 있지만 카뮈는 이 정도만 읽어도 될 듯싶다. 짧은 분량에 비해 너무도 어려웠던 이 작품은 기존 서평들을 참고하여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막 이렇다 할 서사는 없었고 주인공의 독백으로 진행되는데 웬걸, 무인도에서 탈출한 사람이 방언의 은사까지 생겨난 것처럼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말에 귓구녕에서 피가 철철 흐를 지경이다. 카뮈가 이만한 투 머치 토커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작가이자 기자에 철학가, 사상가인 저자의 깊은 속내를 헤아릴 자신이 없다. 하여 적당히 쓰고 싶지만 마지막 리뷰니까 성의를 보이기로 했다. 치안판사인 클라망스는 과거 자신이 얼마나 만 점짜리 알파메일이었는지를 소개한다. 본업 외에도 이런저런 도움을 주어가며 남들에게 점수 따내고 이미지 쌓는 일에 진심이었던 클라망스. 비록 계산된 행동이라곤 하나 선행 자체로는 문제랄 것도 없지 않은가. 뭐 그런갑다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다리 위에서 투신자살한 여성을 방관한 이후로 자뻑에서 벗어나게 되었단다. 여기까지가 출판사들의 소개 글인데, 작중에서는 요 사건을 스치듯 다루어서 그게 그렇게 중요했었는지도 몰랐더랬다. 그 일이 계기가 되었다면 종종 언급이 되었을 법도 한데 그러지는 않았거든. 아무튼.


클라망스는 사는 법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할 만큼 매우 야무진 남자였다. 타인의 호감을 손쉽게 샀던 그는, 인간은 누구나 양면성을 지녔으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남을 사랑할 수 없음을 간파했다(36p). 그래서 별다른 수고 없이도 알파남이 될 수 있었고, 그렇게 허영과 위선 속에 살다가 한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폭력성을 마주하게 된다. 도로에서 엔진이 나간 오토바이의 주인과 실랑이하는 클라망스에게, 뒤 차량 운전자들이 와서 마구 쏘아댔고, 그 사이에 오토바이는 멀리 달아났다. 본때를 보여주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나자, 문득 이 사건으로 그동안의 위선을 깨닫게 된다. 법으로 다스리는 재판관이 아닌 폭력으로 해결 보려는 폭군임을, 그렇게 자신에게도 양면성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앞서 이 일화를 설명하기 전, 굴종의 노예란 곧 자유인이며 떳떳한 양심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보상이라고 하였다(48p). 따라서 죄 앞에 피해자가 되거나 피고인이 되는 것도 본인에게 달렸다는 뜻일 터. 클라망스 명함에 적힌 ‘희극배우‘가 무얼 의미하는지 잘 생각해 보시라.


계속해서 그는 여자들과의 유흥을 예로 들어 자신을 정의하고 증명한다. 순조로운 교제와 섹스를 즐겼지만 되려 그것은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사랑이라는 오락거리를 통해서 제 능력의 탁월함을 확인하고 자기만족에 빠져살던 주인공. 이렇듯 그는 계산된 행동 속에서만 생명력을 부여받고 존재를 증명할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리 위 자살 사건에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은 자신에게 충격을 받는다. 전지전능했던 자기애가 무너져내리자, 그것이 폭력과 침묵으로 쌓아 올린 허상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로부터 클라망스의 고백은 온통 ‘자살‘로 귀결된다. 결국 죽어야만 자신이 겪는 고통의 깊이를 제대로 알아준다면서(73p). 하지만 클라망스는 삶에 대한 애착 또한 대단하다. 하여 그동안의 과실에도 불구하고 심판받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독자에게 묻는다. 행복해지고 심판을 받겠느냐, 용서받고 비참하게 살겠느냐(79p). 누구나 본인의 결백과 정당성을 위해 타인을 심판해대고, 어떤 반박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이 도덕적 결함이 사람의 천성 중 하나라면 그건 선악의 공존이 아니라 원래 일체였는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이놈의 이중성은 죽음만이 정답이지만 그렇다 해서 너 죽고 나 죽자는 좀 아닌 거 같으니 인간들의 심판의 때를 기다리기로 한 주인공. 하여 치안판사로 직업을 바꾸고 법을 선포하며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재판관을 자처했다. 심판을 거부했던 그는 스스로를 심판할 권리를 갖추어 죄인이자 의인이 되기로 한다. 모든 심판자가 결국 속죄자가 되는 이상, 마지막에 심판자가 되기 위해 먼저 속죄자의 일을 해야 한다면서(134p).


저자가 평생 동안 부조리에 집착한 이유를 그의 생애에서 알 수 있다. 결핵으로 대학 포기, 공산당 활동, 신문사 해고, 레지스탕스 활동 등 부당함 가운데 정의의 불완전함을 내내 목격했을 테고, 그것들은 카뮈의 저항심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전락>을 통해 부조리가 우리를 어떻게 인간답게 바꿔놓는지를 설명한다. 카뮈의 부조리란, 인간의 합리적인 욕구와 세계의 비합리적인 현실 사이에서 생기는 충돌이다. 이것을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계속 저항했던 카뮈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중요한 것은, 이따금 자신의 치욕을 대중 앞에서 큰 소리로 고백할 각오로, 무엇이든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138p).‘ 부당함과 무력함의 해방을 위해서 인간은 대항하고 또 대항해야 한다는 것, 부조리한 세계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 자체가 인간 존재의 가치를 만드는 것임을 강조한 카뮈에게 박수를 쳐줍시다. 정말, 읽는 중에는 도통 뭔 얘긴지 몰랐는데 이렇게 리뷰를 쓰면서 겨우 가닥을 잡게 되었다. 사실 지금도 난 실존주의니 허무주의니 이런 거 잘 모르겠다. 그닥 알고 싶지도 않고. 아무튼 드럽게 재미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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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6-30 2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카뮈 별로 안 좋아합니다.
믿음도 없으면서 방언한다고. ㅋㅋㅋ
그래도 페스트가 그중 읽기가 낫다고하는 것 같기도 한데.
전 이방인 사 놓고 아직도 안 읽고 있습니다.
물감님 아는지 모르겠는데 몇년 전에 이방인 번역 문제로 알라딘에서
뜨거운 논쟁 있었잖아요. 바로 그 문제의 버전으로.
근데 까뮈 자체가 쉽지가 않은데 번역이 무슨 대순가 싶기도 하고.
<작가수첩>은 읽어보고 싶긴하던데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갖고 글을 쓰나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읽어 볼 생각은 없나요?

낼부터는 어느 덧 한 해의 반의 첫날이네요.
점점 더 더워져 정신 줄 놓기 딱 좋은 때라 쉽지 않겠지만
이럴 때 일수록 재밌는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아요.
암튼 힘차게 시작하십쇼!^^

물감 2024-07-01 09:43   좋아요 1 | URL
세 권 읽어보니까 확실히 종교 관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더군요.
말씀하신 번역 문제는 잘 몰라요. 뭐였을까요 ~
카뮈랑 카프카는 뭔가 알 것도 같으면서 어렵더라고요. 다른 저서들을 참고하면 좀 더 다가갈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에너지를 쏟고 싶을만큼 매력은 못느껴서요ㅋ

벌써 상반기가 다 지나갔어요. 시간 왜이리 빠른지 원. 7월도 파이팅 하시고 즐독하셔요 ㅋㅋㅋ 저도 스릴러나 읽어야겠습니다!

2024-07-01 2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7-03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7-03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블랙케이크
샤메인 윌커슨 지음, 서제인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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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이현우 서평가가 말하길, 읽고 나서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들어야 좋은 책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충분한 생각거리를 갖게 할수록 건강한 독서가 된다는 말이다. 프란츠 카프카가 말했던 ‘책은 도끼여야 한다‘라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는 책일수록 좋은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문학만큼은 잘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인종차별과 정체성 혼란, 아픈 역사 등등 흑인문학은 온통 비애로 가득 차 있어 ‘좋은 책‘의 조건은 다 갖췄으나 딱 거기까지, 이게 다구나라는 생각밖에 안 들더랬다. 적어도 내게는 흑인문학들마다 접근 방식이 비슷비슷하여 사유의 확장에 한계가 있었거든. 그랬던 반면, 이번에 읽은 <블랙케이크>는 민족 고유의 톤을 유지하면서 다채로움을 보여준, 정말 보기 드문 ‘좋은 작품‘이었다. 앞으로 윌커슨의 작품은 내 무조건 읽어주시겠다.


엘리너는 죽기 전 8시간이나 되는 긴 음성 파일을 남겼다. 시작부터 숨겨둔 첫째 딸이 있다는 말에 멘탈이 무너진 오빠와 동생. 엄마는 왜 지금 와서 커밍아웃으로 골치 아픈 숙제를 남겼을까. 이제 이야기는 엄마 엘리너의 과거로 넘어간다. 카리브해 지역의 섬 출신인 그녀는 부친을 잘못 만나 원치 않는 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갑자기 신랑이 거품 물고 죽자 그 틈에 달아나 영국으로 건너간다. 사실 먼저 간 남친따라 온 거지만, 살인범으로 찍힌 지금은 죽은 듯이 지내야 했다. 이후 새로 사귄 친구와 에든버러로 떠나던 중 열차 사고가 난다. 이때 살아남은 그녀는 죽은 친구의 신분을 가져와 ‘엘리너‘로 살아가게 되고, 본래의 자신은 사망한 걸로 놔둔다. 이로써 가족도 친구도 고향도 없는 국제 고아이자 이방인의 홀로서기가 시작되었다.


운 좋게 직장을 구했지만 상사의 아이를 가져버린 엘리너. 결국 퇴사하고 미혼모 쉼터에 가서 무사히 출산하지만, 그곳 수녀들이 딸아이를 강제로 입양 보내버린다. 그렇게 반복된 아픔 가운데, 우연하게도 남친과 만나 부부가 되어 지금까지 살아온 엄마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사. 두 남매는 어째서 이 얘기들을 진작에 하지 않은 건지 의문이었고, 죽기 직전까지 거짓된 삶을 살아왔으면서 자식들한텐 이것저것 코칭 했던 엄마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대략 난감했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오빠와 동생은, 자신들의 뿌리가 미국이 아닌 서인도 제도라는 것도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반듯하게 자란 오빠는 현재 해양학자가 되어 국가에 많은 공헌을 쌓는 중이다. 그러나 동생은 멀쩡한 대학을 중퇴하고 이리저리 떠돌며 제멋대로 살았다. 또한 동성애를 밝힌 이후로 가족과 멀어져 8년 동안 왕래도 연락도 끊어버렸다. 그 사이에 죽은 아빠의 장례식에도 불참했던 동생은 이미 가족들 눈밖에 나버린 상태. 하여 오빠는 대체 무슨 낯짝으로 찾아와 엄마의 유언을 듣고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동생을 이뻐했던 옛날이 떠올라 심난한 와중에 여태 몰랐던 누나까지 신경 써야 했으니. 엄마의 유언이란 냉동실에 넣어둔 블랙케이크를 꼭 세 명이서 함께 먹어달라는 거였다.


알코올이 가미된 블랙케이크는 서인도 제도의 문화 식품이었다. 맨손으로 섬을 나갔던 엄마가 가진 거라곤 블랙케이크 레시피뿐이었고, 엄마의 엄마에게 전수받았던 이 레시피는 훗날 동생에게 전수되었다. 알고 보니 가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단 하나의 상징인 셈. 케이크를 만들면서 엄마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이름과 떠나온 곳을 곱씹었을 것이었다. 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자신의 처지와, 간신히 얻은 가족들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속을 눌렀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엄마가 가장 괴로웠던 일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수영을 못 하게 된 일이다. 별명이 돌고래였던 엘리너는 수영을 정말 잘하고 좋아했다. 그러나 영국에 와서는 죽은 듯 살다 보니 수영은커녕 물에도 갈 수 없었고, 끝내 수영선수가 되는 꿈을 접어야 했다. 훗날 엄마에게 서핑을 전수받은 오빠는, 아마도 못다 이룬 엄마의 꿈을 이은 게 아닌가 싶다. 한편 함께 수영하던 엄마 친구는 세월 지나 바다를 횡단하는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다. 유명 인사가 된 친구를 볼 때마다 얼마나 복잡 미묘했을지. 어쩌면 엄마도 저렇게 멋진 흑인으로써 세상의 편견을 깨뜨렸을지도 모르는데.


변호사를 통해 큰 딸을 데려오는 일에 성공한 남매. 어색해죽겠지만 일단 케이크를 먹어보는데, 케이크 안에 숨겨둔 엄마의 유품들이 세 사람의 가슴을, 특히 동생의 가슴을 마구마구 후벼판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가족들에게 등 돌린 동생의 마음을 엄마도 이제야 알겠다면서. 괴로울 때마다 도망쳤었던 생애를 되돌아보며, 동생의 회피 성향을 뒤늦게 이해함에 사과하는 엘리너. 이제 동생은 전수받은 블랙케이크를 만듦으로써 엄마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거짓말들을 용서한다. 큰 딸도 진짜 혈연을 알게 돼 기뻐하는 눈치다. 그럼 오빠는? 동생과는 예전 사이로 돌아갔지만 엄마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엘리너의 사랑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헌데 이제 와서 진실을 밝혔다는 건, 그동안 거짓으로 자식들을 대한 당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게 아닌가. 엄마는 자녀들에게 용서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단지 나는 너희들의 엄마라고, 이게 나의 가장 진실한 부분이라고만 했다. 그렇다, 그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다.


<스토너>의 리뷰에서 그런 말을 적었었다. 나를 지탱해 주는 것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그것이 곧 나의 정체성을 가져다주는 것이기에 더욱 힘써서 매달려야 한다. 엘리너가 블랙케이크에 열과 성을 다했던 것처럼. 출신이나 핏줄도 중요하겠으나 다민족/다문화 사회가 된 지금은 ‘뿌리‘보다도 ‘줄기‘에 주목하고 집중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여하간 정말 잘 읽었고 불편한 느낌 가득했던 좋은 작품이었다. 차기작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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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6-24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토너 저도 읽었는데 물감님도 읽었다고 해서 방금 읽고 왔습니다.
내 말이 그 말인데 전 왜 물감님처럼 쓰지 못했을까요? ㅎㅎㅎ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읽어 제 글은 어디에 파묻혔는지도 모르겠고
차라리 제 서재 소설 카테고리에서 찾는 게 더 빨랐는데 다시 읽어 볼 가치는 없고
전 내내 읽으면서 괜히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을 생각한 것 밖에는. ㅋㅋ

낮선 작가네요. 근데 왠지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흑인문학을 많이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정서와 일맥상통한 점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나라도 억압 받았고 제 나라 정체로 살아 보지 못한 세월도 있고.
전 어렸을 때 앨랙스 헤일리의 <뿌리>를 TV 시리즈 방영한 적이 있는데
그거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책으로 나왔는데 모르긴 해도
그게 우리나라 최초 흑인문학 번역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해요.
이렇게 말하면 제가 할머니 같죠? ㅋㅋㅋㅋ
할머니죠 뭐. 옛날엔 제 나이 때 손주가 서넛은 있었을테니.. ㅠㅠ 잉~
어쨌든 그 책 읽는데는 실패했습니다. 넘 두껍고 진도가 안 나가서.
나중에 이 작품은 다시 영화화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관심 있으면 함 보세요.
그래도 지금은 여러 작가의 작품이 나와있긴 하지만 그래도 주류 문학에 비하면 턱없죠?

물감 2024-06-25 09:22   좋아요 1 | URL
으하하 그것은 인생책이냐 아니냐에 따른 평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인한테 얼마나 울림이 있었는지가 아웃풋으로 나올테니까요 ㅋㅋㅋㅋ 각자한테 맞는 게 있는거죠 뭐.
국내에는 처음 소개된 작가래요. 아직은 모르는 분들이 더 많은듯하고, 게다가 흑인문학이라 더 인기가 없어보여요. 서사를 어떻게 변형했든지간에 흑인문학은 인상이 거기서 거기라 썩 당기지가 않네요. 어쩌면 국내 옛 소설들도 그래서 안보게 되는 건지도...
<뿌리> 찾아보니까 퓰리처 수상작이네요? 언젠가 기회되면 읽어볼게요. 언젠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