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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 ㅣ 창비세계문학 11
알베르 카뮈 지음, 유영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이것으로 카뮈의 3대 장편을 완독했다. 그 밖에도 <반항인>, <시지프 신화> 등이 있지만 카뮈는 이 정도만 읽어도 될 듯싶다. 짧은 분량에 비해 너무도 어려웠던 이 작품은 기존 서평들을 참고하여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막 이렇다 할 서사는 없었고 주인공의 독백으로 진행되는데 웬걸, 무인도에서 탈출한 사람이 방언의 은사까지 생겨난 것처럼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말에 귓구녕에서 피가 철철 흐를 지경이다. 카뮈가 이만한 투 머치 토커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작가이자 기자에 철학가, 사상가인 저자의 깊은 속내를 헤아릴 자신이 없다. 하여 적당히 쓰고 싶지만 마지막 리뷰니까 성의를 보이기로 했다. 치안판사인 클라망스는 과거 자신이 얼마나 만 점짜리 알파메일이었는지를 소개한다. 본업 외에도 이런저런 도움을 주어가며 남들에게 점수 따내고 이미지 쌓는 일에 진심이었던 클라망스. 비록 계산된 행동이라곤 하나 선행 자체로는 문제랄 것도 없지 않은가. 뭐 그런갑다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다리 위에서 투신자살한 여성을 방관한 이후로 자뻑에서 벗어나게 되었단다. 여기까지가 출판사들의 소개 글인데, 작중에서는 요 사건을 스치듯 다루어서 그게 그렇게 중요했었는지도 몰랐더랬다. 그 일이 계기가 되었다면 종종 언급이 되었을 법도 한데 그러지는 않았거든. 아무튼.
클라망스는 사는 법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할 만큼 매우 야무진 남자였다. 타인의 호감을 손쉽게 샀던 그는, 인간은 누구나 양면성을 지녔으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남을 사랑할 수 없음을 간파했다(36p). 그래서 별다른 수고 없이도 알파남이 될 수 있었고, 그렇게 허영과 위선 속에 살다가 한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폭력성을 마주하게 된다. 도로에서 엔진이 나간 오토바이의 주인과 실랑이하는 클라망스에게, 뒤 차량 운전자들이 와서 마구 쏘아댔고, 그 사이에 오토바이는 멀리 달아났다. 본때를 보여주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나자, 문득 이 사건으로 그동안의 위선을 깨닫게 된다. 법으로 다스리는 재판관이 아닌 폭력으로 해결 보려는 폭군임을, 그렇게 자신에게도 양면성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앞서 이 일화를 설명하기 전, 굴종의 노예란 곧 자유인이며 떳떳한 양심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보상이라고 하였다(48p). 따라서 죄 앞에 피해자가 되거나 피고인이 되는 것도 본인에게 달렸다는 뜻일 터. 클라망스 명함에 적힌 ‘희극배우‘가 무얼 의미하는지 잘 생각해 보시라.
계속해서 그는 여자들과의 유흥을 예로 들어 자신을 정의하고 증명한다. 순조로운 교제와 섹스를 즐겼지만 되려 그것은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사랑이라는 오락거리를 통해서 제 능력의 탁월함을 확인하고 자기만족에 빠져살던 주인공. 이렇듯 그는 계산된 행동 속에서만 생명력을 부여받고 존재를 증명할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리 위 자살 사건에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은 자신에게 충격을 받는다. 전지전능했던 자기애가 무너져내리자, 그것이 폭력과 침묵으로 쌓아 올린 허상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로부터 클라망스의 고백은 온통 ‘자살‘로 귀결된다. 결국 죽어야만 자신이 겪는 고통의 깊이를 제대로 알아준다면서(73p). 하지만 클라망스는 삶에 대한 애착 또한 대단하다. 하여 그동안의 과실에도 불구하고 심판받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독자에게 묻는다. 행복해지고 심판을 받겠느냐, 용서받고 비참하게 살겠느냐(79p). 누구나 본인의 결백과 정당성을 위해 타인을 심판해대고, 어떤 반박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이 도덕적 결함이 사람의 천성 중 하나라면 그건 선악의 공존이 아니라 원래 일체였는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이놈의 이중성은 죽음만이 정답이지만 그렇다 해서 너 죽고 나 죽자는 좀 아닌 거 같으니 인간들의 심판의 때를 기다리기로 한 주인공. 하여 치안판사로 직업을 바꾸고 법을 선포하며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재판관을 자처했다. 심판을 거부했던 그는 스스로를 심판할 권리를 갖추어 죄인이자 의인이 되기로 한다. 모든 심판자가 결국 속죄자가 되는 이상, 마지막에 심판자가 되기 위해 먼저 속죄자의 일을 해야 한다면서(134p).
저자가 평생 동안 부조리에 집착한 이유를 그의 생애에서 알 수 있다. 결핵으로 대학 포기, 공산당 활동, 신문사 해고, 레지스탕스 활동 등 부당함 가운데 정의의 불완전함을 내내 목격했을 테고, 그것들은 카뮈의 저항심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전락>을 통해 부조리가 우리를 어떻게 인간답게 바꿔놓는지를 설명한다. 카뮈의 부조리란, 인간의 합리적인 욕구와 세계의 비합리적인 현실 사이에서 생기는 충돌이다. 이것을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계속 저항했던 카뮈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중요한 것은, 이따금 자신의 치욕을 대중 앞에서 큰 소리로 고백할 각오로, 무엇이든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138p).‘ 부당함과 무력함의 해방을 위해서 인간은 대항하고 또 대항해야 한다는 것, 부조리한 세계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 자체가 인간 존재의 가치를 만드는 것임을 강조한 카뮈에게 박수를 쳐줍시다. 정말, 읽는 중에는 도통 뭔 얘긴지 몰랐는데 이렇게 리뷰를 쓰면서 겨우 가닥을 잡게 되었다. 사실 지금도 난 실존주의니 허무주의니 이런 거 잘 모르겠다. 그닥 알고 싶지도 않고. 아무튼 드럽게 재미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