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소파
조영주 지음 / 해냄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조영주 작가의 <반전이 없다>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녀를 소설가로 자리매김하게 해준 수상작 <붉은 소파>를 읽으면서 과연 장르문학에 재능이 있는 분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이래저래 볼멘소리가 많은 작품이지만 나님은 과감하게 별 다섯을 주겠다. 이만하면 완성도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기존 장르물들과 겹치지 않은 독창성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한국의 미나토 가나에 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스타 사진작가 정석주는 붉은 소파와 함께 전국을 떠돌며 촬영 중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소파 위에서 딸을 살해한 범인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어떤 단서도 없이 오직 ‘촉‘에 의지하는 복수를 위해. 그의 방랑은 스튜디오의 밀린 월세로 협박하는 제자 때문에 끝이 난다. 이후 제자를 통해 형사 김나영을 만나 사건 현장의 촬영 담당을 맡는다. 하기 싫었지만 수입도 짭짤했고, 어쩐지 딸이랑 닮은 이 형사에게 눈이 계속 가는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새파랗게 어린 나영의 까칠한 태도에도 고분고분했던 주인공. 그러나 이것은 지독한 악연의 시작점이었으니.


각 사건마다 정석주가 촬영하면서 남다른 촉으로 정황을 판단하고 의문점을 풀어나간다. 이제 밀린 월세도 다 갚았고 더는 경찰과 붙어 다닐 이유가 없는데도 나영은 계속해서 석주를 찾아온다. 자신도 석주의 딸과 같은 피해자였다면서 말이다. 범인에게 당하던 중 베란다로 뛰어내려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 김나영. 그러나 석주는 이 친구 때문에 딸이 죽게 되었음을 알게 돼 마음이 복잡해진다. 딸과 결혼한 제자를 유혹하고 놀아났던 과거 나영의 고백이 이어지고, 제자가 나영에게 놀러 간 사이에 집을 지키던 딸이 살해되었던 것. 딸의 얼굴을 하고서 자백하는 이 또 다른 피해자에게, 원망의 화살을 겨누지 못하는 석주의 마음을 어찌하랴.


읽다 보면 이 작품은 추리 형식을 띈 사회소설이란 걸 알게 된다. 그러니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어야만 한다. 점점 갈수록 내막을 둘러싼 관계 구도가 복잡해진다. 범인의 연쇄살인은 스타 사진작가인 석주를 찬양했던 누군가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범죄의 씨앗은 정석주 자신이 심었던 것이었기에. 먼저 석주의 딸은 그의 친자식이 아니라, 강간당해서 낳은 누나의 딸이었다. 아마추어 시절의 석주는, 누나와 딸을 찍은 사진집으로 공모전에서 우승하여 화려하게 데뷔하였고, 그 사진집을 알아본 강간범은 몰래 누나를 찾아와 돈으로 입막음하였다. 끝내 누나는 붉은 소파 위에서 자살했고 석주가 대신해서 그 딸을 키워온 것인데, 알고 보니 누나의 자살도 딸의 죽음도 전부 제 탓이었단 말인가.


나영이 석주에게 매달렸던 건, 자신을 헤치려던 범인을 잡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석주의 인상에서, 늘 냉정하고 차가웠던 아버지의 ‘다정한 버전‘을 느껴서였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난 나영의 아버지를 향한 관심 끌기가 삐뚤어진 것이 유부남, 즉 석주의 사위에게 꼬리친 결과로 이어졌고, 그렇게 나영도 피해자가 되어 마치 자업자득이라 믿고 있음을 눈치챈 석주. 그는 나영의 친부가 자신의 광팬이라는 것과, 경찰의 촬영 협조 비용을 대준 것도 그녀의 친부였다는 사실을 듣고 그를 만나보기로 한다.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인 나영의 친부는 석주 자신과 많은 점이 닮아있었고, 둘 다 가슴속에 괴물을 데리고 사는 공통점도 발견한다. 어째서 나영이 자신에게 친밀감을 느꼈는지 알 수 있었지만, 그 괴물의 존재까지는 몰랐을 그녀에게 결국 상처를 주기로 하는 주인공. 그리하여 나영과 부친을 붉은 소파에 앉히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제법 복잡한 내용이라 최대한 가리고 추려서 적었다. 석주의 과거와 사건의 내막을 뒷받침하는 내용도 많고, ‘사진사‘라는 직업이 어떻게 사건들을 풀어가는지와, 주인공들의 왜곡된 기억과 마주하게 되는 장면 등등 볼거리가 다양한 작품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빨간 약과 파란 약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진실을 듣고 더 고통스러울 것인가, 아니면 없던 일로 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인가. 정석주도 그 같은 선택지가 주어진다. 진실을 고른 괴물은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지르며 서서히 침몰한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괴물이 되느냐, 거짓에 복종하는 노예가 되느냐.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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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7-09 14:15   좋아요 2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좀 복잡한 것 같습니다. 제목은 들어 본 것 같은데...
표지 그림이 꽤 감각적이네요. 평점도 좋고.
근데 물감님이란 저랑 같이 본 영화가 있네요. 매트릭스! ㅎㅎ
이게 뭐 철학적 요소가 많은 작품이라고 해서 관련 책도 나오고 토론회도하고
그랬다던데 전 잘 모르겠더군요. 좀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SF는 딱히 즐겨하는 장르는 아니라서 그냥 보고 나온 기억이. ㅋ

물감 2024-07-09 15:12   좋아요 2 | URL
세계문학 수상작이라 들어보신 적은 있을 거에요.
주인공 직업이 사진사라서 풀어가는 방식이 신선했어요. 무엇보다 인물들의 고뇌와 감정선이 미쳤습니다. 이야기를 꽤 잘쓰는 작가네요. <반전이 없다>도 재밌었고요 ㅋ
<매트릭스>는 안본 사람이 거의 없지 않을까요 ㅋㅋㅋ 아무리 장르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요. 일단 키아누 리브스가 너무 잘생겼고요 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4-07-11 14:52   좋아요 2 | URL
물감 님, 무척 재밌게 읽으셨나 봐요. 저도 읽었는데 내용도 제가 쓴 리뷰도 가물가물합니다. 5별은 주지 않은 것만 (이것도 아닐지도 ㅋㅋ)

물감 2024-07-11 15:00   좋아요 1 | URL
방금 자목련 님의 리뷰도 읽고 왔습니다ㅋㅋ 별 넷이던데요. 이정도만 후한 점수네요. 저는 매우 재밌고 흥미로웠어요. 등장인물이 죄다 애증의 관계라니, 요런 설정도 다 있네 싶더라니깐요 ㅋㅋㅋ 근데 은근히 자목련 님도 장르소설 좋아하시는 듯!?

stella.K 2024-08-07 21:17   좋아요 2 | URL
쳇, 알라딘은 물감님만 좋아하는가 봅니다.
그 비결이 뭔가요? 무심한듯 시크한...?
아님 저 표지 여인의 등짝...?ㅎㅎㅎ
암튼 축하합니다. 적립금으로 고기 사 드세요.
헉, 내가 무슨 소리하는 거야? 3=33=333

물감 2024-08-08 11:55   좋아요 2 | URL
허허 당선이 되었군요 ㅎㅎㅎ
저는 뽑힐 생각은 아에 안하고 쓰는 주의라...
스텔라님도 내려놓으시면 더 잘 되지 않을까 합니다요 ㅎㅎㅎㅎ

젤소민아 2024-08-21 05:39   좋아요 2 | URL
추리 형식을 띈 사회소설<<<<제가 지향하는 소설!! 이달의 당선작이었네요~belated congratulations!

물감 2024-08-21 10:21   좋아요 1 | URL
축하 감사합니다 ㅎㅎ 조영주 작가님 소설들은 확실히 느낌이 있어요. 나중에 읽어보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