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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라이크 미 - 흑인이 된 백인 이야기
존 하워드 그리핀 지음, 하윤숙 옮김 / 살림 / 2009년 2월
평점 :
1950년대 미국의 흑백상황.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먼 나라일이기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던 상황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흑인에게는 세상에 태어난, 그것도 미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죄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시절일 것이다. 자신이 원해서 미국이란 땅으로 온 것도 아니고, 자신이 거주할 땅을 선택한 것도 아닌 사람들. 남들이 필요해서 강제로 고향을 뒤에 두고 망망대해를 건너온 사람들. 아무리 미국이 자유국가이고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나라이지만 그들 역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은 봉건주의자니 왕권신봉자이니 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 책을 보면 더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흑백문제를 알아내기 위해 몸소 흑인이 된 백인이 있었는데, 이 책은 바로 그 사람이 흑인으로 변장하여 지낸 몇 달의 삶을 기록한 일기장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도, 신분도, 직업도 바꾸지 않았고, 목소리도, 옷차림도 바꾸지 않았다. 왜? 만약 백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흑인이 천대받아야 하는 이유가 본래 무식하고, 놀기 좋아하고 정신수준이 낮기 때문이라면 자신은 그런 수준이 아니니 당연히 그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은 피부 색깔 하나뿐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결과는 저자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백인들은 저자의 모습,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에게도 다른 흑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했다. 그가 무엇을 아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그가 가장 어려워했던 것은 소변을 보고, 물을 마시는 기본적인 행위였다. 거리마다 즐비한 상점과 음식점 중에서 흑인이 소변을 볼 수 있는 화장실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물 마시는 곳은 더더군다나 없었다. 흑인은 돈이 있다손 치더라도 소다수 자체를 슈퍼에서 살 수 없다면 할 말 다한 것 아니겠는가.
그는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고 한다. 즉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인간이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기본적인 생리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슬로우의 5단계 욕구설이 맞다면, 저자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는 흑인으로 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백인 남녀가 칼을 든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꿈을 꾸며 고통스러운 밤을 지내게 되었다. 하루하루의 삶이 자신에게는 너무나 가혹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한 후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흑인이 못 사는 것은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니고, 흑인이 매일 밤 술 마시고 노래하는 것은 삶을 유쾌하게 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밖에는 자신의 고통을 해소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고, 이들이 무식한 이유는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도서관 앞에는 ‘흑인출입불가’라는 팻말이 붙어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안을 들어갈 흑인은 없다는 것이다. 누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책 한권 보기위해 도서관에 들어가겠는가.
남의 나라 이야기이지만 이 책이 마음에 와 닿는 이유는, 이것은 흑백의 문제이기보다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치관, 이념의 충돌문제와 거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이 직장을 자주 옮기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며, 공부를 못하는 가정의 자녀는 왜 부모와 같이 공부를 못하는가?
이 모든 것이 다른 시각으로 볼 때는 이들이 남들보다 게으르고, 탐욕스럽고, 욕심 많고, 이기적이기에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주변상황, 주위여건, 그리고 그 여건에 무언으로 동조하는 우리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이제 인종문제는 많이 사라졌다. 많은 나라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평등을 지키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보다 더 무서운 차별이 있는데, 과거처럼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부와 가난,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간의 차별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와 같은 요상한 경제이론이, 또 능력 있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논리가 가진 자의 마음속에 못 가진 자에 대한 비정상적인 신화를 심어준다면 이는 1950년대의 미국상황보다 더 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은 차별의 극치를 만들어 낼 것이다.
경쟁은 좋다. 하지만 그 안에 내포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간의 두꺼운 경계선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출발점 자체에서 차별을 가한다면 이 책은 1950년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상황을 기술한 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