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의 노래 - 북한 정치범수용소 체험수기
강철환 지음 / 시대정신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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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북한의 인권 수준이 인권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가 민망할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북한의 인권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한에서는 정권에 잘못 보이면 반동분자로 몰려서 수용소에 수감되고 심하면 공개처형도 당한다는 정도로 추상적인 의미에서 북한의 인권을 인식하고 만다. 나도 그랬다. 그리고 그 점은 이 책을 읽고 나서도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에서 아무리 끔찍한 일이 일어나도 잠시 동안 마음이 언짢고 북한사람들을 동정하고 김정은을 욕하겠지만, 그리고서는 곧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는 일을 조금이라도 더 생동감 있게 느껴보고 싶어서, 조금은 덜 무감각해지고 싶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책 자체는 그렇게 잘 썼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한국에 온 이후의 기록도 있을 줄 알았는데,그런 것도 없다. 그러나 저자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그런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토록 혹독한 시련을 겪은 사람한테 감히 어떤 말을 꺼내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북한 수용소에서의 삶이나 북한 사회 전반의 인권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우리 나라에서의 인권 침해나 온갖 사회 부조리가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북한에 무조건 강경책을 쓰는 것이 북한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결론으로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김정일 등의 북한 지도자에 느끼는 저자의 분노와 증오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햇빛 정책을 강하게 비난하는 저자의 서문이 좀 생뚱맞게 느껴지는 것도 비슷한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 비록 지금은 후퇴하고 있는 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북한에 비해서는 우리나라의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의 상황이나 개인적 삶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을만큼 좋다는 당연한 사실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고, 대북 강경책이 일반적으로 국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석기를 비롯한 주사파들이 북한을 추종하는 그런 미친 생각을 처벌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우리사회 민주주의의 순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면 이석기나 주사파는 도대체 뭐하는 X들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는 북한에 대하여 조금 더 객관적으로 썼다고 하는 리얼 노스코리아를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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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자 : 주진우의 정통시사활극
주진우 지음 / 푸른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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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꼼수의 팬이다. 흔히 얘기하는 광팬까지는 아닐지라도 비교적 나꼼수의 작은 흠은 굳이 문제삼지 않고 애정으로 덮어버릴 정도의 애정은 가지고 있다. 그들이 새롭게 벌인 신명나는 판이 좋았고, 그들이 쫄지마!”라는 메시지를 통해 축 처진 대다수 젊은이들에게 불어넣어 준 용기와 자신감이 고마웠다.

 

이 책도 그러한 연장선에서 읽었고, 다른 독자들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읽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는 주기자가 취재해 온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뒷얘기, 취재할 때의 에피소드, 그리고 그와 관련한 주기자의 단상이 들어 있다. 이 책에 들어 있는 여러가지 이야기들도 흥미있고, 그 나름의 시사점이 있으나, 이 책은 그러한 디테일보다는 주기자가 소위 말하는 거악에 맞서 얼마나 치열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더 클 것 같다.

 

너무 짧은 듯한 문장길이나 종종 등장하는 깔때기는, 그가 우리 사회를 위해 짊어진 그의 삶의 무게와 고독함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의 매력으로 보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주기자, 그냥 그의 존재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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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다 - 4대강, 토건국가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2
최병성 지음 / 오월의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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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까지는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내용도 비교적 단순하고, 사진도 많아서 금방금방 넘어간다. 다만 ,책을 읽으면서, 책을 읽고 나서도 편치 않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책은 마치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남영동 1985” 같이 독자를 아프게 하려는 목적에서 쓰여진 책이 아닌가 싶다. 인간의 탐욕, 무지, 맹신과 무관심이 자연에 가한 테러를 책을 통해 고스란히 마주보게 되니까 말이다.

 

과거 어두운 시기에 행해진 고문과 마찬가지로, 4대강과 주변 자연에 행해진 말도 되는 고문과 파괴의 책임은, 고문과 파괴를 진두지휘한 지도자를 뽑고, 지도자의 잘못된 폭주를 방조하고 묵인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 어떻게 이렇게 말도 되는 일을, 이렇게 대규모로, 이렇게 단기간에, 이렇게 수많은 뻔뻔한 거짓말로 저지르고도, 우리 사회는 이렇게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조용할 있는지 대한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자 최소한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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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굴욕
[시평]박상주 논설위원
 

2009년 04월 21일 (화) 17:31:07 박상주 논설위원 ( parksangjoo@yahoo.co.kr)
 

그가 높은 사람 앞에서 깊숙이 허리를 굽힌 채 정신없이 손바닥을 비빈다. 온 세상이 그의 모습을 보고는 쯧쯧 혀를 차고, 낄낄 조롱한다. 하지만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기에만 급급한 그의 눈과 귀엔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산 권력’ 앞에다 사냥해온 ‘죽은 권력’을 물어다 바치며 살살 꼬리를 흔드는 그 역겨운 사냥개 본능. 세상은 참 놀랍게도 바뀌는데 군둥내 물씬 풍기는 그 구태는 바뀔 기미가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 검찰의 자화상이 아닐 런지. 검찰은 세상의 질타와 비웃음을 듣고 있는가. 눈이 있으면 보고, 귀가 있으면 들어라.

# “희한한 뉴스다(Oddly Enough)!”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글을 올린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구속은 시작부터 세계적인 조롱거리였다. 로이터 통신은 즉각 ‘희한한 뉴스’라고 소개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한국에 표현의 자유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고 썼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박씨 구속은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에 한국 정부가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결국 ‘미네르바’ 박아무개씨가 1심의 무죄 선고와 함께 풀려났다. 사이버 공간은 온통 검찰을 성토하는 글로 도배되다 시피하고 있다. 한 누리꾼(희망모으기)은 “인터넷 논객 구속으로 우리나라 후진성을 세계에 떨쳐 국가브랜드를 크게 떨어뜨린 손해가 수십 조 원에 달할 것”이라며 “검찰은 다양성을 훼손하여 국가 발전을 가로막은 점을 고려해 징역 2000년, 추징금 100조 원쯤 내야 할 듯 하다”고 비꼬았다.

# “이런 수사 방식은 처음 본다!”

야당의 정치공세도, 시민단체의 항의성명도 아니다. 인터넷 누리꾼이 올린 익명의 댓글도 아니다. 여당인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이른바 ‘노무현 게이트’에 대한 검찰 수사를 놓고 한 쓴 소리다. 박 대표는 20일 한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검찰이 매일매일 진행 상황을 브리핑하다시피 지금 하고 있다. 나는 이런 수사 방식은 처음 본다”고 혀를 찼다. 그는 이어 “검찰이 일정 기간 수사를 해서 이제 자, 이건 중간 발표다, 또 그 다음에는 최종 발표다 이렇게 하고 정치권에서는 여기 일체 관여를 안 하고, 이게 전통적인 수사 방법이었다”라고 꼬집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이날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검찰이 피의사실을 유포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되어있음에 계속 중계방송하고 있어 국민 모두는 지금 수사는 4·29 재보선용이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또 이명박 대통령 최측근으로 알려진 천신일 세중나모회장의 10억 수수설, 30억 당비 대납설, 한상률 전 국세청장 기획 출국설 등 3대 의혹을 거론한 뒤 이에 대해선 전혀 진실규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검찰의 편파수사를 비난했다.

# “정녕 양심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가!”

전국언론노동조합이 대한민국 검찰에게 던진 질문이다. 범죄혐의 성립조차 어렵다며 문화방송(MBC) ‘PD수첩’의 제작진 소환을 거부하던 담당 검사를 갈아치우고, 약혼자의 집까지 압수수색하고, 결혼을 나흘 앞두고 있던 예비신부 김보슬PD를 체포했던 검찰…. 언론노조의 이어지는 항변 그대로 검찰 스스로가 비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지난 50년 검찰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 오욕의 얼룩이 자못 흉하다. 국민들은 검찰의 이름 앞에 ‘권력의 시녀’. ‘떡검’, ‘견찰’ 등 불명예스러운 수식어를 붙여 불러왔다. 미네르바와 MBC PD 긴급체포사건, 노무현 게이트 수사 등을 둘러싼 최근 검찰의 처신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도 여전히 사납기만 하다. 미네르바와 PD수첩에 대한 무고죄, 노 전 대통령 관련 수사에 대한 피의사실 유포죄로 검찰을 고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일고 있다. 예전처럼 그저 찍어누를 수 있는 국민들이 아니다. 인터넷 논객의 구속, 정부정책을 비판한 언론인의 체포, 지난 권력에 대한 편파 수사와 마구잡이 피의 사실 유포…. 이런 코미디를 한꺼번에 벌이는 검찰은 이젠 웬만한 후진국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검찰은 그 오욕의 역사에 얼마나 더 흉한 얼룩을 덧칠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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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끈한데 2009-07-13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도 많이 바쁜게로군..ㅋㅋ
 

‘보수’에 대한 상념(想念)

이상돈 (2009년 4월 1일)


우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헌정사는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그리고 5공화국의 압제 등 많은 곡절을 겪어 왔다. 비록 우리가 빈곤탈출과 경제발전에 있어서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고 하지만 입헌주의와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는 후진적이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87년 개헌과 더불어 본격적인 민주주의 시대가 열렸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한 축인 ‘자유’가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진보’ 또는 ‘좌파적’ 견지에서 평등, 사회적 균등 같은 가치를 앞세웠기 때문에 이로 인해 자유주의가 손상된다는 비판이 일었다. 그런 점을 강조한 집단은 ‘뉴라이트’나 ‘아스팔트 우파’가 아니라 공병호 같은 시장자유주의자였다. 그런데 시장자유주의자도 아닌 사람들도 ‘보수’가 아니라 ‘자유’를 내걸었다.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말하기 보다는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과거에 좌파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단체를 만들고 ‘뉴라이트’라는 영어 간판을 내건 것도 ‘보수’라는 명칭을 쓰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이른바 보수 단체 중에도 정작 ‘보수’라는 명칭을 내건 곳은 별로 없고, ‘자유’를 내건 경우가 많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이재오, 김문수, 김진홍 등 과거에 운동권이었던 사람들도 좌파를 비난하는 발언을 한 경우는 있었지만 그들이 스스로 ‘보수’임을 자임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생각된다. 과거에 좌파 운동권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별안간 ‘보수’를 자처하기에 떨떠름했던 것은, ‘보수’라는 단어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고, 또 그들이 젊었을 때 죽어라고 읽은 책이 모두 ‘좌파’ 책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보수’ 행세를 하자니 ‘보수’에 대해 무언가 알아야 할 것이지만 ‘보수’를 공부할 기회도 없었을 뿐더러, 우리나라엔 ‘보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변변한 책이 있지도 않은 것이 현실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선 보수주의에 관한 담론 자체가 없다. 보수 세력이 권력과 금력 같은 제도에 안주해 와서 지적 기반(intellectual base)이 취약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보수’라는 단어가 ‘이미지 문제’를 안고 있다. ‘보수’가 부패하고 기회주의적인 집단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원조보수’를 자처하는 JP가 DJ와 야합했던 것을 상기하면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다. ‘더러운 단어’였던 ‘보수’가 노무현 정권의 실정(失政)에 힘입어 일어나나 했더니 이명박 정권과 같은 길을 가는 바람에 그나마 회복했던 ‘정당성’을 다시 상실했다. 우리 국민의 과반수가 무당파(無黨派) 부동층이 된 것은 그런 사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고요한 보수’(The Silent Conservatives)는 새로운 변신을 하면서 다음을 기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MB는 경선이나 대선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을 ‘보수’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대북정책에서도 기존의 햇볕정책을 폐기하거나 수정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었다. 그러한 유화적 대북정책 때문에 이회창 총재가 대선에 출마하게 되었던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이제는 미국에 오바마 정권이 들어선 덕분에 이명박 정권은 결국 햇볕정책을 답습하지 않을 수 없게 됐으니, 오히려 홀가분해 진 것이 아닌가 한다. 햇볕정책을 오바마 때문에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좋은 ‘핑계’가 생긴 셈이다. “오바마를 좌파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궤변이 “오바마의 햇볕은 괜찮다”는 또 다른 궤변을 만들어 낸 것이다.

보수정당을 표방했던 자유선진당은 대북 정책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제3의 길’을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야당의 ‘대북 정책’은 본질적으로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한 것이니, 자유선진당의 정체성은 오히려 중도를 지향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민주당 일각에서도 전교조 민노총과 선(線)을 긋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니 ‘제3의 길’ 전성기가 오는 듯하다. ‘제3의 길’을 표방한 ‘국민통합’ 세력 앞에 대립적 이데오르기로서의 보수주의는 오뉴월에 눈 녹듯이 무력해 지지 않을까 한다. ‘고요한 보수’도 ‘제3의 길’을 향해 보이지 않는 변신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내 걸었던 대운하 사업, 그리고 ‘꿩 대신 닭’이라는 식으로 추진하는 경인운하, 4대강 사업 같은 것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보수’가 앞장서서 반대해야 할 사안이다. 토목공사로 경제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발상을 흔히 ‘뉴딜’이라고 하나, ‘보수’의 입장에서 보면 ‘뉴딜’은 ‘실패한 진보정책’의 대명사다. 미국 공화당이 ‘뉴딜’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강을 파헤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잠실 초고층 건물 건축허가에서 보듯이 이명박 정권은 국가안보를 오히려 경시하고 있다. 국가안보의 보루라는 국정원의 책임자에 병역도 하지 않은 안보 문외한을 임명하는 정권을 보수 정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일은 아마추어 진보정권인 카터 행정부에서 있었다. 진정한 보수언론, 보수단체라면 이런 일련의 사태를 신랄하게 비판했어야 했지만 모두 침묵했다.

최근에 일어난 신영철 대법관 사건이나 MBC 기자 구속 사건은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볼 사안이 아니다. 사법권 독립,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는 정치이념이나 정책 문제가 아니고 자유민주주의의 기초이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말이다. 재판개입을 한 것으로 판명된 신영철 대법관의 사임에 반대하고, 명예훼손 혐의로 언론인을 구속하는 사태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지식인으로 뽑히는 고(故) 러셀 커크와 고(故) 윌리엄 버클리 2세가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보수주의를 내걸고 출마를 선언한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을 만나서 한 이야기 중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러셀 커크는 골드워터에게 “보수주의를 표방하더라도 남부의 인종차별주의자 등 더러운 집단을 멀리하라”고 했다. 윌리엄 버클리는 그런 집단을 ‘쓰레기’라고 지칭했고, 자기가 발행하는 ‘내셔널 리뷰’지(誌)에 존 버치 협회 같은 남부의 수구집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연거푸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보수주의 운동은 부패와 무지(無知)와 결별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반대한 데 있어서 윌리엄 버클리와 존 버치 협회는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존 버치 협회는 몰락하고 버클리는 1980년대 미국 보수주의 전성기의 지적 기초를 닦았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반대하는데도 격(格)이 있는 법이다.

(c)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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