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생각 > 오역을 어떻게 볼 것인가? (댓글:7, 추천:12)
2006-02-12 21:01

 

 

 

 

주말 자투리 시간에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를 읽었다. 4/5쯤 읽었는데, 번역 문제라는 '뜨거운 감자'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다 진지하게 다룰 생각이다. 어쨌거나 저자의 과감하고 열성적인 문제제기가 반가웠고 다루어지고 있는 사안의 새삼스러움에 착잡했다. 번역 문제에 '감'이 없는 교수들이나 관료들께서 많이 읽어주었으면 싶다. 하지만, 젊은 인문학도들이 이 책을 읽는 건 말리고 싶다(우리의 '착잡한' 현실에 도전욕보다는 환멸감을 먼저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문득 번역 문제의 한 파트인 오역의 문제에 대해서 이전에 써둔 게 생각이 나 여기에 옮겨둔다. 재작년 5월에 쓴 것인데, 모스크바에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을 우연한 계기가 읽다가 눈에 띈 오역들을 지적하게 됐고, 거기에 대해서 두 가지 ‘인상적인’ 반응이 있었다. 하나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역자의 반응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독자의 반응이었다. 개별적인 사례이지만, 일반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듯하여 이 자리에서 '재탕'해둔다. 당시에도 적었지만, 상당히 ‘공격적인’ 비판에 대해서 (반)공개적으로 해명을 한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내가 제기했던 의문들에 대해 성의 있는 답변을 주신 역자께 다시금 감사드린다. 

(나의 의문에 대한) 역자의 해명은 (1)(공동번역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 대해) 3년간에 걸친 단독번역이라는 것과 (2)(작품명 등의 혼동/혼란에 대해서) 편집과정에서 빚어진 실수들이 포함돼 있다는 것, (3)(그럼에도) 모든 오역에 대한 책임은 역자에게 있다는 것, (4)(희박해 보이긴 하지만) 재판을 낼 경우, 오역들이 수정될 수 있도록 출판사측에 건의하겠다는 것, (5)(책의 나머지 장들에 대해서도) 계속적인 지적을 바란다는 것 등으로 요약된다(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의 ‘기억’에 따른 것이다).

먼저, (1)에 대해서는 역자의 ‘고투’ 대해서 사의를 표한다. 아마도 눈치 빠르게 이 책의 판권을 입수한 출판사측에서(현재 국내 출판계에서 지젝은 그 ‘난해성’과 무관하게 ‘상종가’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모든 책이 앞으로 번역/소개될 수 있다!) <삐딱하게 보기>의 역자를 번역의 적임자로 낙점했던 듯싶다. 소위 지젝 전문가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그건 자연스런 선택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게 2001년 하반기에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내가 가졌던 생각이기도 하다(그건 ‘번역이 그다지 나쁘진 않겠구나.’라는 안도감을 내포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젝의 책으로선 비교적 쉽다는 ‘영화책’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얘기일 뿐이고(해서 어떤 경우에도 지젝의 책이 촘스키의 책처럼 팔리거나 읽히길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이라크’에 대한 책이라 하더라도), 거의 ‘고공비행’ 수준의 이론적 담론을 제대로 포착해서 격추하기란, 즉 제대로 소화해서 번역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사실 지젝을 읽는 즐거움은 그러한 난해한 이론/담론들의 ‘액츄얼리티’를 맛볼 수 있다는 데 있지만. 하여간에 비록 오역들을 지적하긴 했어도, 그런 이유 때문에 나라도 이 번역에 선뜻 나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부르디외 전공자의 부르디외 번역이 상식 이하라거나(그래도 부르디외 연구서를 낸다!) 크리스테바 전문가의 크리스테바 번역이 기대 이하라는 것이 우리의 번역 현실이다(그래도 크리스테바 연구서를 낸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있어도 대충 ‘존경’받을 교수들이 굳이 번역이란 ‘고투’에 나선 데 대해서 비난만 할 수는 없다(물론 이런 경우 못 믿을 건 번역서들보다도 그 ‘놀라운’ 연구서들이지만).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전공자’나 ‘전문가’란 타이틀의 ‘허명’에 대한 부수적인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굳이 그러한 오역들에 대해서 ‘인내’하지 못하고, 속된/헛된 ‘분별’에 나서는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저작권 보호법이 걸려 있기에, 한번 출간된 인문 번역서가 재번역/재출간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상당히 무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번 오물을 뒤집어쓰게 되면 다시 손써볼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이건 역자들로서도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저작권이 적용되지 않는 고전의 경우라면 사정이 다르다. 나이브하게 말해서, 엉터리 번역서들이 난무해도 된다(나는 이 책들의 오역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거기에 들인 사회적 비용이 아깝긴 하지만, 다시 제대로 번역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문 ‘이론서’들이 그런 기회를 잡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지젝의 <향락의 전이> 국역본은 정말 그런 희박한 가능성을 붙잡았지만(그런 사례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도 들 수 있다) 내차버린 경우이다(역자도 번역만 하지 않는다면 정신분석 ‘전문가’로서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둘째는 인문학 자체/전체를 희화화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기본은 말(로고스)에 대한 사랑(필로스)이며 존중이다. 그 유구한 언어적 전승 속에서 거장들의 내면적 고뇌와 사유의 높이가 언어에 의해, 혹은 언어 자체로서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하지만, 오역에서 우리는 이러한 ‘경이’는커녕, 짜증(‘고뇌’ 대신에)과 장벽(‘높이’ 대신에)만을 경험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말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대상언어뿐만 아니라, 우리말에 대한 사랑과 존중도.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따금 이런 염치없는 오역서들을 통해서 젊은 대학생들이 ‘인문학에 대한 이미지’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경우 그들은 인문학을 포기하거나(“그 책 너무 어렵던데요. 제가 머리가 나쁜가봐요.”) 무시하게 된다(“인문학? 맨날 괜히 밥 먹고 알지도 못할 소리나 해대는 거 아닌가요?”). 서로 짝패인 이 포기/무시가 이들의 탓인가? 인문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런 반응들을 접할 때마다 안타깝고 화가 난다. 그리고 전의를 다지게 된다.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으므로. 말로는 인문학을 한다는 인문학의 배덕자들에게…

다시 <히치콕>의 경우. 내가 앞에서 얘기한 것은 오역의 일반론이지 이 책이 오물의 범벅이라고 얘기하는 건 결코 아니다. 역자의 해명 이전에도 나는 이 책이 ‘읽을 만한’ 책의 범주에는 든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다른 책들에 비해서 특별히 오역이 많은 것은 아니란 점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다른 번역본(‘러시아어본’이나 ‘영어본’)을 참조하지 않는다면, 이 책을 읽어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분류하자면, 그런 도움 없이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 ‘좋은 번역’이고, 그런 도움과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이 ‘읽을 만한’ 번역이며, 차라리 안 읽는 게 더 이해에, 그리고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번역이 ‘나쁜 번역’이다. 물론 나쁜 번역의 경우에도 반면교사로서, 오역의 교보재로서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든, 아무리 ‘적임자’에다가 ‘경험자’라 하더라도 ‘영화학’을 전공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젝의 ‘영화책’을 누워서 떡 먹기로 번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철학 전공자, 심지어 정신분석 전공자였더라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작년 내한 강연 때의 번역문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데, 그 번역문들이 올 가을쯤에 어떤 모양새로 출간될지 나는 (벼르면서) 기다리고 있다(복사된 유인물에서의 오역과 정식으로 출간된 책의 오역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물론 곧 쏟아져 나올 ‘지젝들’에 대해서도 나는 기대와 우려를 함께 가지고 있다.

다시 돌아가서, 요컨대, 지젝의 책을 번역하면서 일부 오역을 한다는 것은 역자 개인의 ‘역량’에서만 비롯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건, 현단계 우리 인문학 수준, 조금 좁혀서 인문서 번역 수준의 문제이고(지젝을 번역할 만한 지적 토양과 ‘언어’가 아직 우리에겐 잘 준비돼 있지 않다), 우리 출판계의 총체적인 번역 여건과 (출판)역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우리 인문학계와 출판계는 좋은 번역을 위해서 얼마나 투자하고 있을까? 번역에 대한 학계의 무관심은 이미 ‘관행’이 되어 있으므로 길게 늘어놓을 것도 없고(북매거진 <텍스트>의 지적을 옮기자면, “(우리 학계는) 다른 지식인의 논문이나 외국 문헌을 베끼는 ‘표절’은 예사이고, 응당 책임져야 할 ‘번역’도 나 몰라라 하면서 숨겨둔 무공비급인양 ‘원전’을 활용한다.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데 힘써야 할 학회는 조폭처럼 치열하게 지역(나와바리)을 관리하고 소속원을 비판하면 떼거리로 몰려가 비판자를 공격한다. 그러다보니 자기 지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상대방에 대해 침묵하는 ‘기묘한 공존’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더 안타까운 점은 이런 부패가 소위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번역자들을 ‘등쳐먹고’ 사는 출판계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을까?

<히치콕> 번역을 예로 들어보자면, 이 책이 재판을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3,000부를 찍었다고 할 때, 역자의 몫으로 돌아가는 번역 인세(대박이 안 날 만한 책들은 다 인세이다)는 17,800원(도서정가)*0.07%(인세)*3,000(부수)=3,738,000원이다. 물론 이건 내 추측이고, 실제와는 약간 차이가 있겠지만(*실제로는 훨씬 적은 액수의 번역료를 받았다고 한다), 개정판이 나올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역자의 예상을 고려하면, 그 차이는 크지 않을 거라고 본다. 그러니까, 대략 400만원 이하의 번역료를 보수로 받는 셈이다. 그러니까, 한 달 정도에 이 책의 번역을 해치울 수만 있다면, 그럭저럭 ‘수지’를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내가 보기에 이 책의 견적은 최소한 하루에 10시간씩 두 달 꼬박이다. 그것도 영화학과 근대철학, 그리고 정신분석학에 대한 ‘예비학습’이 얼마간 되어 있다는 전제하에서. 그리고 물론 번역 중에라도 구할 수 있는 히치콕의 영화들은 다 구해서 보는 편이 오히려 시간을 절약하도록 해줄 것이다(물론 이 비용은 역자 부담이다). 그렇게, 두 달 동안을 이 책에 전념할 때 받을 수 있는 보수가 한 달에 200만원이 안된다(대개의 인문서 번역 형편이 그렇다). 당신이라면 이 ‘자원봉사’ 수준의 번역을 하겠는가?

 

 

 



따라서, 3년에 걸쳐 <히치콕>의 번역이 이루어졌다는 역자의 고백을 그의 게으름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역자후기에 따르면, 이 번역은 “아내와 엄마로서, 선생이자 학생으로서 거의 분열적으로 살아가는 옮긴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남편과 아빠로서, 선생이자 연구생으로서의 분열적인 삶을 정상인양 살아온” 나는 5년 전에 맡은 번역도 아직 끝내지 못하고 있으므로 ‘게으름’으로만 치자면 내가 한 수 더 위이지만, 거듭 말해서, 그건 ‘게으름’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건’의 문제이다. 아주 실제적으로 말해서, <히치콕> 같은 경우 적어도 6개월간 매월 200만원 정도의 수입이 보장될 경우에나 번역에 전념할 수 있고,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수 있다(*물론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번역지원 사업을 벌이고는 있지만, 박상익 교수의 지적대로 1년간 지원총액이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 정도에 머문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하긴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는 대표적인 우리말 오역서의 하나이다!).

가령,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박사연구자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공모하는바, 채택될 경우 매월 200만원씩 1년간 지원을 받는다. 그리고 그 지원에 대한 의무는 등재학술지에 한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인문학계에서 제대로 된 <히치콕> 번역(400쪽)보다 더 많은 피와 땀을 요구하는 ‘논문’(30쪽)이 년간 과연 몇 편이나 될지 의심스럽다. 그러니 (논문을 쓰는 대신에) 누가 (바보같이!) 번역을 하는가? 번역이나 하고 있는가? 이러한 여건 때문에 ‘악순환’이 생기는바, 번역에 대한 사회적 (상징계의!) 무관심과 ‘부적절한’ 보수 때문에 번역의 질이 떨어지고, 번역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번역에 대해 신뢰가 형성되지 않으며(책을 사보질 않는다), 신뢰가 없기 때문에 번역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과 냉대가 정당화되는 것이다(그래서 책을 많이 찍지 않는다). 그러니, 다시 번역자에게 제대로 돌아갈 몫이 없는 것이고. 해서 또 ‘저렴한’ 보수에 맞춘 때우기식 번역이 양산될 수밖에…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에서 끊어야 하나?

내 생각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여건이 좋아지길 기다리는 것이다(여건이 문제라고 했으니까). 기다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번역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고(아예 번역학과가 생기고, 번역가가 최고 유망직종이 되는 등) 번역자에 대한 대우가 달라질지(그래서 번역자들이 다 외제차를 타고 다닐지) 누가 알겠는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아마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질 만한 일이다. 어쨌거나 ‘그런 무관심을 딛고’ 여전히 고도(Godot)를 기다려 볼 수는 있으리라.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번역자들이 알아서(아쉬운 사람이 우물 파듯이) ‘어려운 여건을 딛고’ 번역의 질을 좀 높이는 것이다(이런 걸 ‘살신성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경이로운’ 번역서들을 턱턱 내놓음으로써, 독자의 발길을 되돌림과 동시에 번역을 무시하던 이들의 코를 좀 납작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전에 번역자 조합을 만든다는 전제하에서) ‘번역자 조합’의 조합원 결의를 통해서 일제히 ‘파업’에 돌입하는 것이다(나 또한 번역을 했고, 또 하고 있으므로 그 조합원의 자격을 갖고 있다). 번역자 인권과 제대로 된 보수를 보장받기 위해서. 번역자 시국선언과 양심선언이 뒤따르고, 한 번역자가 한강에 투신하는 등등…

어느 쪽이 더 리얼하고, 덜 리얼한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물론 가장 좋은 건, 두 가지가 상호 상승작용하는 것이다. 가령, 번역자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얼마나 고투하고 있는지가 TV에 방영되고, 거기에 연이어 사회적 관심이 갑자기 증폭되면서 번역자들을 위한 성금(지원금)이 물밀듯이 기탁되고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그 기폭제가 번역자들의 ‘고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현단계 부실 번역의 책임을 사회적 여건의 탓으로 돌리면서도 번역자들의 책임 또한 강조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동료 번역자들의 노고에 경의와 동정을 표하면서도, 우리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달리는 말끼리 서로 더 채찍질을 하는 것은 더 잘 달려보자는 뜻이지, 가긴 어딜 가냐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2)에 대해서. <히치콕>의 경우에 동일한 영화명이 다르게 번역된다든가 하는 실수는 역자의 실수였다 하더라도 편집/교정 과정에서 다 체크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편집/교정자가 눈대중으로 책을 읽는 사람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도 ‘여건’의 탓이 크다. 편집/교정자들이 극빈층의 보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니까(그들의 ‘직업적’ 매저키스트 성향은 사회심리학적 분석대상이다). 그러니까, 그들로서는 두 눈 부릅뜨고 책을 볼 만한 여건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편집/교정자들에게도 다른 방도는 없어 보인다. 눈 빠지게 일하면서 빨리 그들만의 조합을 만드는 수밖에.

 

 

 



가령, <히치콕>의 46쪽에서 <히치콕의 스트레인저>로 출시돼 있다는 은 전부 <스트레인저>로 옮겨지고 있는 다른 대목들과는 달리 <열차 속의 이방인>으로 번역돼 있다(사실 이게 더 맘에 들지만). 이런 사례들 때문에, 나는 복수의 역자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는데, 그건 알고보니 ‘분열적인’ 역자 한 명의 ‘오점’ 혹은 ‘얼룩’이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역자가 이런 영화명을 비롯한 고유명사들을 번역과정에서는 그냥 원어로 놔두었었는데, 나중에 (자료조사 등을 한 다음) 알아서 처리해야 할 편집진에서 제대로 일처리를 하지 않은 것. 그리고 다른 가능성은, 역자가 불우한 여건 속에서 정신없이 번역하느라 이렇게 저렇게 옮긴 것을 편집진에서 제대로 체크하지 못한 것.

사실, 이런 사례는 굉장히 사소한 것이지만(잘된 번역에서라면, ‘즐거운’ 옥에 티에 불과하다), 번역이 꼬이게 되면 그에 대한 신뢰를 무섭게 잠식해가는 계기가 된다. ‘의혹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는 것이다(요컨대 역자나 교정자가 독자만큼도 책을 세심하게 읽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에). 물론, 편집/교정자들이 박봉에 ‘고투’하고 있다는 건 이미 언급한 대로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실수’가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이건 책임 이전에 ‘자존심’의 문제이다. 내가 읽고 이해할 수 없는 책, 완벽하다고 내가 자신할 수 없는 책을 내지 않겠다는 것. 그게 ‘자존심’이다. 물론 이런 자존심을 격려하고 북돋아주는 것이 출판사의 사장과 편집장 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3), (4)에 대해서는 특별히 덧붙일 말이 없다. 안면도 없는 역자를 난데없이 난처하게 만들었으니까 한편으론 내가 미안할 따름이다. 바라건대, 개정판을 찍었으면 하지만(그러자면 역설적이게도 많이 읽혀야 한다!), 많이 팔린다는 ‘지젝’이 그럴 형편이 아니라면…

결자해지, 매듭은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라도 책의 나머지 장들에 대한 ‘독해’는 계속될 것이다(*실제로 계속됐었다). 다만, 다른 사정들도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언제 마무리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이것이 (5)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물론 한두 장씩 읽으면서, 영화를 보지 않고 이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인지 실감하고 있지만…



그리고 두번째로, 한 독자의 반응. 그것은 (1)(오역에 대한 지적들을) 관심 있게 읽고 있다는 것, (2) (하지만 번역을 기피하는 풍조 속에서) 자칫 ‘인신공격’적일 수도 있는 지나친 비판은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박상익 교수도 이런 문제는 조용히/넌지시 처리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충고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짤막하게 나의 의견을 밝혔지만, 보다 상세한 의견 개진이 필요한 것 같아서 따로 자리를 마련한다.

번역/오역을 ‘응시’하는 나의 자리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1) 같은 번역자, 즉 동업자로서의 자리와 (2) 일반 독자로서의 자리이다. 그리고 이 자리들에 따라서, 이미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공식적인’ 명분에도 불구하고, 번역/오역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달라진다. 내가 분열적인가? 언젠가 밝혔지만, 나는 (별로 안 팔린 책이지만) 번역서를 낸 바 있고(러시아 소설이다), 또 현재 번역중인 책이 있으며(러시아 소설이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다면(여건도 좋아져야겠지만!) 얼마든지 다른 종류의 인문서 번역에도 참여할 예정이다(서너 권 정도 검토중에 있다). 또 이전에 번역 스터디에도 여러 번 참여한바 있으며(가다머와 리쾨르, 에코, 굿맨 등의 번역이었는데, 완역/출간되지는 않았다), 교정이나 잡스런 번역에도 적잖게 동원되었었다(바흐친, 로트만 등). 요컨대, 나는 이 분야의 문외한이 아니다. 해서, “(그렇게 잘났으면) 옆에서 비판만 하지 말고, 직접 나서보지 그러느냐”는 식의 간혹 ‘뒤로 듣는’ 비아냥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나는 뒷짐지고 옆에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에크리>(라캉)와 <피네간의 경야>(조이스), <구조적 안정성과 형태발생>(르네 톰) 등의 ‘숭고한’ 책들을 번역하는 일만 아니라면(그건 나의 능력에 부치는 일이다, 마치 박상륭의 <칠조어론>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처럼. 대신에 ‘교정’해 볼 생각은 있다. 그럴 만한 능력은 있다고 생각하므로), 여건이 허락하는 한, 나는 어떤 번역에도 도전해볼 의사를 갖고 있다(번역이란 언어를 통한 존재의 전이라는 ‘사건’이다. 그러한 ‘전이’에, ‘사건’에 어찌 무관심할 수 있을까?). 어쨌든, 이러한 ‘번역자’의 입장에서라면, 가급적 ‘동료’의 ‘실수’ 등에 대해서는 눈감아주는 것이 ‘의리’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도 유리하다. 동료 의사의 실수를 의사들이 눈감아주고, 동료 변호사의 비리를 변호사들이 눈감아주는 것처럼.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리고,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니까. 그만한 일로 낯을 붉히는 건 서로에게 유익하지 않으니까. 나도 ‘한국인’으로서 그 정도의 ‘상식’은 갖고 있다.

그런데, 그게 ‘번역자’가 아닌 ‘독자’의 자리로 오게 되면, 전혀 문제의 양상이 달라진다. 번역자는 같은 업종의 ‘공급자’로서의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지만(간혹 불일치할 수도 있다), ‘독자’로서의 나는 ‘소비자’로서 ‘공급자’인 번역자와는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물론 일치한다면 더 좋겠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기브 앤 테이크의 관계, 주고 받는 관계이다. 독자로서 내가 읽는 책은, 누구한테 기증 받은 책이 아니라, 내 돈 주고 산 책이다(이 책에 대한 과도한 지출 때문에 나는 더러 수모도 당한다!). 그리고 그 돈은 어디 가서 주워온 돈이 아니다(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을 보라)!

때문에, 내 돈 주고 산 책이 엉터리라거나 불성실하다면 그건 관용의 윤리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다!). 그건 ‘공급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일종의 ‘사기’니까. 내가 지젝을 샀는데(나는 지젝을 좋아한다!), 뜯어 읽어보니까 지젝이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무슨 ‘수작’이 들어 있다면(그래서 ‘지젝’을 망쳐놓았다면) 관대한 당신은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라며 넘어가는가? 당신이 비싼 돈을 주고 이브닝 드레스를 샀는데, 알고 보니까 남대문 시장에서도 파는 ‘짜가’였다면, 그런데 반품도 안된다면, 그래도 당신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냥 넘어가는가? 있는 건 돈밖에 없으므로? 그냥 모르고 입고 다니는데, 그걸 굳이 ‘짜가’라고 옆에서 찔러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런 ‘못된 친구’와는 차라리 절교할지언정 그걸 만들어 판 사람에게 무슨 잘못이 있나, 모르고 산 내가 잘못이지, 라고 생각하는가?

해서 사정은 복잡한 듯하면서도 아주 단순하다. 물론 번역서의 경우, 최종적인 책임은 번역자(피고용인)가 아닌 출판업자(고용주)에게 있다. 하지만, 역자 후기 등에 ‘사장님’에 대한 감사가 곧잘 언급되더라도, 책의 표지에는 저자와 함께 역자의 이름이 박힌다. 그건, 적어도 책의 만듦새는 출판사에서 책임지지만, 내용만큼은 역자가 책임을 감수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공급자(번역자)-소비자(독자) 간에는 일종의 거래가 성립되는 것이고, 이 거래에는 아주 기본적인 윤리가 개입한다. 제값을 치르고, 제값의 내용(읽을 거리)을 공급받는다는 것. 그리고 만약, 서로에게 제값이 아니었다는 게 밝혀지면, 이건 상대방에 대한 ‘기만’이자 ‘모욕’이다(당신은 그냥 대충 이 정도 수준에서 읽고 떨어져라? 나도 어려운 책이니까 그냥 구경이나 하고 말지 그래?). 오역에 대한 나의 지적/비판은 그런 기만/모욕에 대한 대응이고, 응전이다.



오역에 대한 그간의 지적이 지나치게 신랄해서 간혹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한 독자의 반응 때문에 하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의 발단이 ‘공격을 위한 공격’이 아니라 ‘방어적인 차원’의 공격이라는 점이며(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또 그런 부실한 책들을 읽게 될 것이다), “이렇게 번역하다니, 당신 바보 아니냐?”는 식의 어조는 내가 받은 ‘모욕’(이렇게 번역해도 바보들이 뭘 알겠어?)과 금전적 손실(수입만을 따지자면, 나는 빈곤층에 속하는 시간강사이다. 소위 '화이트 프롤레타리아'이다)에 대한 대응으로서는 그래도 소심한 편에 속한다는 점이다(이 생각을 하면 다시금 분노가 솟구친다. <킬 빌>을 다시 봐야겠다!). 고작 카페 한두 곳과 인터넷 서점 한 곳에 ‘의견’을 올리는 게 내가 하는 일의 전부 아닌가?

그로 인한 역효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역효과는 ‘인신공격’을 받은 번역자들이 ‘은퇴’하는 것이 아니라, 더 열성적으로 ‘현역’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즉 부실 번역들을 계속 양산해내는 것이다(게으른 자들에게 축복을!).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나의 지적/비판의 정당성을 더 확증해 줄 것이기 때문에(“욕먹을 만하군!”) 그들의 전략이 궁극적으로 성공할 거 같지 않다. 그러니 내가 그 역효과에 대해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 듯하다. 물론 잘못된 역자를 만난 몇 권의 책들이 더 희생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자존심을 회복해서 더 좋은 번역서로 ‘컴백’한다면, 그건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며 이건 ‘역효과’가 아니라 ‘효과’이다.

나는 단지 (애서가로서!)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책’에 대해서 근심할 따름이며, 그에 대해서만 말할 따름이다. 내가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이유도 없이 욕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나는 모든 오역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와 함께 제대로 된 번역에 대한 나의 의견을 밝혔다(그리고 그에 대한 반박 중 수용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수용하기도 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번역자도 실수를 한다. 그런데, 그건 번역자 자신이 가장 잘 알아야 정상이다(독자의 입장에 서서 한번만 읽어보면 알 수 있으니까). 번역자 자신이 그 책을 가장 깊이 있게 읽기 때문이고, 또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충 둘러대고, 틀어막고, 얼버무리고, 살짝 빼고 한 내용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번역자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걸 모른다면, 번역자로서는 수준 이하이고, 자격 미달이다(이런 번역자들에겐 ‘인신공격’도 부족하다).

거꾸로, 어느 정도의 수준과 자격을 갖춘 번역자에게서라면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역량’이라기보다는 ‘성의’이다(‘여건’이란 건 이 ‘성의’를 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요컨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긍정문이 부정문으로 바뀐다거나 문맥상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 이어진다거나 고유명사 표기를 헷갈리게 한다거나 우리말 문법에 맞지도 않는 문장을 쓴다거나(통사론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하는 따위들은 대개 고등교육을 받은 번역자들로서는 능히 피해갈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내가 비판하는 것은 그의 무능력이 아니라 고집스런 불성실과 아집, 그리고 부정직이다. 대충 얼버무리고, 황당한 걸 갖다붙이고, 자신이 이해가 안 돼도 넘어가는 태도 말이다. 내가 문제삼는 것은 그런 노력하지 않는 태도, 거만하고 방만한 태도이다. 독자가 무서운 줄 안다면, 그런 식으로 함부로, 대충 번역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도 이해가 안되는 책을 번역해서 출간하는 만용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나쁜 번역서’들을 두고 하는 얘기이다). 그게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따라서, 한 독자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독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은 부실한 번역서들에 대해서까지 “왜 그렇게 하셨어요? 감히 말씀드리거니와, 저라면 이렇게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한번 봐주시겠어요?…”라는 식으로 예의를 갖출 생각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 사실, 그런 똘레랑스(불간섭의 관용주의)야말로 지젝 자신이 경멸해 마지 않는 태도이다(그가 가장 맘에 들어하는 영화 중의 하나가 <파이트클럽>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피하거나 얼버무리지 않고, 외상적 실재와, 혹은 적대(나는 상냥하게 말하지 않는다!)와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이른바 ‘실재의 윤리학’이다). 오역의 실상과 직접 대면함으로써만, 그런 자극과 충격을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만, ‘나의 번역’은 개선될 수 있다. 창피하다거나, ‘인신공격’이라거나 하는 것은 부차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 참에 오역의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확실히 밝혀두고자 해서 이런 글을 쓰게 됐다. 결론은 독자에 대한 번역자의 예의란 것인데, 사실 거기에 덧붙여 ‘책에 대한 예의’ 또한 나로선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여기선 더 부연하지 않겠다. 다만, “복사된 유인물에서의 오역과 정식으로 출간된 책의 오역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라는 말에서 그러한 생각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부실한 번역의 엉터리 책들은 도색잡지보다도 부도덕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본적으로 책은 고급 누드집만큼이나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며, 그러해야 한다.



끝으로, 나쁜 번역서들만 판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기 위해서, (드물긴 하지만) 좋은 번역서들에 대한 옹호도 곁들인다. 내가 직접 읽은 한정된 범위 내에서 말하자면 <데리다와 예일학파>(문학동네)나 <니체-데리다, 데리다-니체>(책세상) 같은 건 좋은 번역서였다(후자는 내가 갖고 있던 영역본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역자들은 모두, ‘관행적으로’ 존경받는 교수들이 아니라 박사과정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이 책들에서도 약간 미심쩍은 곳(동의하지 않는 곳)이나 오타 등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옥에 티에 불과하다. 해서, 나는 이들 번역자들의 이름을 기억해 두고 있으며, 그들의 또 다른 번역서들까지도 주목하고 있다. 다른 번역서들에서도 그러한 역자들이 속속 나오기를 기대한다…

06.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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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잠에서 깨는 일 없이 아침까지 푹 잠을 자는 편인데

어젯밤에는 웬일인지 중간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어제 술을 마셔서 그런 것인지...몇 시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아침에 출근을 해야 하는데 알람도 맞춰놓지 않고 잤다는 생각이 든다.

젠장, 벌써 주말이 다 지나갔다니...지금 일어나서 알람을 맞추기도 귀찮다.

잠깐, 오늘이 일요일 같기도 하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도 잘 모르겠다.

다시 뿌연 머리를 부여잡고 생각하니 어제가 토요일이 맞다. 아싸~

오늘 늦잠을 자도 된다는 생각이 스치는 그 순간 느꼈던 안도감과 달콤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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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려면 
승주나무(mail) 2006-03-04 11:29
 

글을 잘 쓰려면


글 쓰기는 어렵다. 남보다 글을 잘 쓴다는 사람들, 나아가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작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대문장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첫 문장이 쉽게 떠오르지 않으면 연필을 마구 깎아대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한 미국 작가는 글쓰는 일에 견주면 “사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다.

문학작품의 산고(産苦)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학창시절 글짓기 시간은 지루하고 당혹스런 기억으로 남아있기 일쑤다. ‘봄’이니, ‘낙엽’이니, ‘남북통일’이니 하는 천편일률의 주제들은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데, 쥐어짜듯 몇 줄 써놓고 아직 한참 남은 원고지의 공백에 막막해지던 심정 말이다.

그런데 사회로 나와도 곤혹스런 글쓰기와 영영 이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다 못해 자기소개서나 업무상 필요한 보고서, 보도자료 한두 장을 쓸 일이라도 생긴다. 자주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글쓰기는 더 까다롭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맞춤법과 문장은 제대로 됐는지, 의도한 바가 잘 담긴 글인지 도무지 자신이 없다. 요즘은 ‘자기표현의 시대’다. 말도 잘해야 하지만, 글로써 자기 의사를 정확히 전달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을 것인가. 전문가들의 조언을 토대로 그 원칙들을 살피고, 분야별 글쓰기 요령도 점검해본다.              
                     

▷ 글을 잘 쓰려면 이렇게 
                     
*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한다            
  가장 흔히 나오는 글을 잘 쓰기 위한 방법으로는 ‘많이 읽고 많이 쓰라’는 조언이다. ‘감동적인 글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은 감동적인 글을 쓸 수 없다’는 말도 있다.

시인 김수영은 일기에서 ‘피로서 책을 읽고 무기로서 쌓아두어야 한다’고 적었다.

작가 김원일씨는 문학을 하게 된 동기의 첫째를 독서체험으로 돌린다. “남의 글을 부지런히 읽다보면 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글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자비를 들여 수필집이나 자서전을 출판하기도 하고, 인터넷 사이트에는 수천명의 사이버 칼럼니스트들이 활동 중이다.

구청 공무원이 소설을 쓴다거나 현직 순경이 자신의 경험담을 인터넷에 연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글쓰기에 대한 선망은 크면서도 그 밑거름이 되어줄 글읽기에는 여간 소홀한 게 아니다. 한국 성인의 독서량은 한 해 평균 10권을 밑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면 한번쯤 자신이 얼마만큼 치열하게 책을 읽고 있는지 헤아려볼 일이다.     
        
                     
* 좋은 문장을 외운다       
     
  민음사 편집부장 장은수씨는 “글쓰기를 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글을 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문장교육만큼은 좋은 글을 외우는 주입식이 꼭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조선시대 지식 엘리트의 평균수준은 지금보다 높았다. 조선시대 서간문을 보면 고금의 전거를 넘나들며 유려하게 문장을 펼칠 뿐 아니라 논리정연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당대의 교육방식에서 비롯된 결과다.

옛날 선비들이 어릴 때부터 달달 외우다시피 하며 배운 ‘천자문’이나 ‘논어’ ‘맹자’ 등은 사실 시와 논설문의 전형 아닌가. ‘동문선’도 고금의 대표적인 문장들을 모아 70여 가지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주는 참고서다. 결국 선인들은 이런 문장들을 되풀이 익히고 외움으로써 ‘동서고금의 아름다운 문장이 핏속에 흐르게 한’ 것이다.”

모델이 될만한 좋은 글을 많이 접해서 내면화하는 과정을 통해 독자는 글쓴이의 독창적인 사고와 표현체계는 물론 논리적이고 수사적인 글쓰기의 기본 요령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처음에는 재미있고 쉬운 글에서 시작해 점차 정도를 높여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 말하기와 글쓰기는 다르지 않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가 지은 ‘사람답게 사는 즐거움’에는 선비의 예절을 이르면서 “언어는 소근거려도 안 되고, 지껄여도 안 된다.

또 산만하게 해도 안 되고, 지체해도 안 되며, 길게 끌어도 안 되고, 뚝뚝 끊어지게 해도 안 된다. 뿐만 아니라 힘없이 해도 안 되고, 성급하게 해도 또한 안 된다”고 적고 있다.

본디 이 구절은 말하기에 대한 것이지만, 글쓰기에 대한 원칙으로 바꾸어 되새겨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글을 잘 쓰는 한 방법은 말하듯 쉽게 쓰는 것이다. 자기가 쓴 글을 소리내어 읽어보는 것도 좋은 확인 방법이다. 말하듯 쉽게 쓴 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가 홍명희의 ‘임꺽정’이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얘기를 들려주듯 담담하게 적어내려간 그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 자연스런 문장의 한 표본으로 남아 있다.  
           
                     
* 단문을 쓰는 훈련을 한다   
         
   글을 잘 써보겠다며 수식어를 자꾸 집어넣다 보면 글이 길어지게 된다. 이것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글이 길어지면 잘못된 문장이 되기 쉽다. 특히 주어 술어의 호응이 엇갈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간단하다. 한 문장에는 한가지 생각만 담기로 하는 것이다.

여자의 스커트와 연설은 길이가 짧아야 한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이것은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렇다면 짧은 글쓰기 연습은 어떻게 할까.

미국에서 통용되는 아주 기술적인 교육법으로 단문을 반복하는 훈련이 있다. 이를테면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는 동작을 3단계로 묘사한다고 하자. 동전을 넣는다-자판기 단추를 누른다-커피를 꺼낸다가 된다. 이것을 4단계, 5단계, 10단계 하는 식으로 계속 늘려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황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묘사하는 습관, 사고훈련이 이뤄진다.         
    
                     
* 글쓰기의 특징과 단점을 빨리 찾아내 고친다    
        
   문장도 각자 개성이 있는 것이므로 일률적으로 어떤 모범답안만을 따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일반인들은 자기 글의 특징을 빨리 발견해 단점을 반성하고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단락의 첫 부분에 ‘그러나’ ‘그런데’ 등 접속어를 계속 써야 말이 이어지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대표적인 잘못된 습벽인데, 이런 것들은 얼른 찾아내 고쳐야 한다.

또 늘 문장이 길어진다면 짧고 간결하게 구사하는 문장도 간간히 집어넣고, 늘 짧게만 쓴다면 지속성과 유장한 흐름이 없으므로 복문을 쓴다든가 하는 식으로 의식적인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    
         
                     
* 짜임새 있고 자연스러운 글을 쓰도록 노력한다    
        
   서울대 권영민교수는 “부분적으로 아무리 표현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잘 쓴 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전체를 훑어보아 짜임새가 있어야 한다”고 ‘좋은 글’에 대한 기준을 밝힌다.

이 짜임새란 단락의 구획이라든가 논의의 흐름같은 여러 측면에 해당할 수 있다. 글이란 생각을 표현해놓은 하나의 덩어리이므로, 짧은 글이건 긴 글이건 사고의 균형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가 지목하는 것은 얼마나 정확한 어휘를 사용하는가이다. 상황에 맞는 어휘를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다소 전문가적인 접근이며, 사실 일반인들은 막힘 없이 자연스럽게 읽힌다면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심오한 사상을 담았더라도 문장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면 잘 쓴 글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래 써온 자기 언어에 대해서는 누구나 어느 정도 직관을 가지고 있다. 좋지 않은 문장은 굳이 잘못된 점을 따져보지 않아도 단박에 부자연스런 느낌이 온다. 이런 부자연스런 느낌이 적은 것이 좋은 문장이다.

글에 변화를 주는 것도 중요하다. 변화가 없다면 밋밋한 문장이 될 것이다.             
                    
 
* 글에 개성을 살려라            

   글맛 좋기로 소문난 작가 이윤기씨는 모든 글에 적어도 하나의 위트를 집어넣는다. 그의 글을 읽는 이들은 언제 어디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나 기대감을 갖고, 그런 덤을 만날 때마다 싱긋 웃음짓는다.

‘관촌수필‘에서 보여준 이문구의 해학, 지적인 유머를 선보이는 성석제의 톡톡 튀는 문장도 때론 미소를, 때론 폭소를 자아내며 읽는 흥을 돋운다.

탁월한 문장가로 꼽히는 작가 이문열씨는 논란이 많았던 소설 ‘선택’에서 보듯, 옛스런 의고체(擬古體) 문장을 잘도 구사한다.

방대한 한학 지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역시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훌륭한 도구임에는 틀림없다.

산문집 ‘풍경과 상처’ ‘자전거 기행’ 등에서 김훈은 현기증 날 정도의 미문으로 읽는 이의 기를 질리게 한다.

이렇듯 글 잘쓰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 나름의 개성이 글에서 묻어 나온다. 유명 작가 수준의 명문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인도 자신의 글에 자신만의 체취를 담아볼 일이다. 그 방법은 솔직하게, 열심히 쓰는 것이다. 따뜻한 성품이 우러나는 글, 정직한 글, 재치있는 글, 시원시원한 글, 모두 매력적이고 좋은 글이다.             

                     
* 전문가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우리나라는 문장 교열 전문가가 드물다. 몇몇 출판사의 고참 편집자들도 대부분 기획과 편집, 행정업무까지를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편 필자들은 자기 글에 손대는 것을 마치 권위를 침범당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것이 제대로 된 좋은 글, 좋은 책이 나오지 않는 중요한 한 가지 이유가 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아무리 유명한 대학교수라도 책을 내기 전에는 출판사를 통해 철저한 전문 교열과 편집을 거친다.

전문가들은 문제점을 지적하며, 필요하다면 책 전체의 구성을 재조정하기도 한다. 표기법이나 어법상으로 완벽하면서도 저자의 개성을 살리는 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적어도 공식적으로 출간되는 글이라면 제도적으로 전문가의 손을 거칠 필요가 있다.

일반인들도 혼자서 끙끙대지 말고 전문가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 잘잘못을 가리고 고치는 기회를 가진다면 좋을 것이다.

외국 대학에서는 자체적으로 학술문장센터가 있어 글쓰기 실력이 모자란 학생들이 잘못된 점을 교정하고 좋은 글을 쓰는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학들에도 이런 체제의 도입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고도의 지식과 자격을 갖춘, 제대로 된 편집 교열자를 길러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겠지만.             
            

* 글쓰기에 관한 책을 참조한다     
       
  '뉴욕타임스’나 AP 등 해외 유명 언론사들은 독자적인 문체집(style book)을 펴내곤 한다.

이런 책들은 훌륭한 영어문장 쓰기의 원칙과 사례들을 보여준다. 윌리엄 스트렁크(1869∼1946)가 쓰고 얼윈 브룩스 화이트가 개정한 ‘문체의 요소들(The Elements of Style)’은 100여쪽에 불과한 분량에다 1930년대에 출간된 옛날 책임에도 핵심을 찌르는 원칙과 좋은 문장으로 오늘날까지 글쓰기의 바이블로 통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대형서점에 가보면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꽤 많이 나와 있다.

대학 입학시험에 논술이 포함된 이후 입시용으로 나온 책들까지 포함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책들은 맞춤법이나 문장론 전반을 다루기도 하고, 자기소개서 이력서 논문 에세이처럼 상황에 따른 글쓰기 요령을 알려주기도 한다.

필요에 따라 이런 책들을 골라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런 책들 가운데 정작 읽기가 괴로운 책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딱딱하게 어휘나 문법적인 사실만을 나열한다거나, ‘실전…’ ‘해법…’ 식의 중고교생 참고서처럼 기술만 가르치는 책은 손이 안 가게 된다.

중견작가 한승원씨의 ‘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문학평론가 박동규 서울대교수의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등의 책은 비교적 읽는 맛도 있으면서 좋은 글쓰기의 이론과 실제를 풀어놓고 있다.

좀더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글쓰기의 고전으로 꼽히는 이태준의 ‘문장강화’와 시인 박목월의 ‘문장의 기술’을 찾아봐도 좋겠다.

이즈음의 젊은 필자로 주목받는 이는 고종석이다. ‘국어의 풍경들’ ‘감염된 언어’ 등은 직접적으로 글 잘 쓰기를 일러주는 책은 아니지만 말과 글쓰기에 대한 단상들을 모아놓은 것으로 일독해볼 만하다.     
        
                     
★ 스티븐 킹의 글쓰기 제안 “당신만의 ‘연장상자’를 가져라”   
         
   미국의 인기있는 공포소설 작가 스티븐 킹(52)이 최근 글쓰기에 관한 조언을 담은 자전적인 에세이집 ‘글쓰기에 대하여(On Writing)’를 펴냈다.킹은 30권이 넘는 베스트셀러를 출간하고, 국내에도 개봉된 ‘캐리’ ‘미저리’ ‘쇼생크 탈출’ 등 나오는 책마다 영화로 제작돼 할리우드의 간판 영화 원작자로도 꼽히는 인물. 그는 1999년에 집필한 이 책에서 작가 지망생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흥미로울만한 제안들을 내놓고 있다. 다음은 그 내용의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 어휘의 사용이 중요하다글쓰기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길 원한다면, 자신만의 고유한 연장상자(toolbox)를 구성해야 한다.

그 연장상자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이 되는 것은 어휘다.그러나 어휘란 많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특히 문장에서 쓸데없는 어휘를 늘어놓는 것은 마치 애완견에게 이브닝 드레스를 입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를 써라단어를 선택할 때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쓴다는 원칙을 명심해야 한다. 주저하고 숙고하다보면 처음 생각해냈던 것보다 더 못한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

* 문법을 지킨다지나치게 문법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쁜 문법은 나쁜 문장을 낳는다. 문법은 일반 교육을 마친 사람이라면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익히게 된다. 서점에 나가 책 한 권만 사서 읽어보면 해결될 일이다.

* 수동태 문장과 부사는 가급적 쓰지 않는다수동태 문장은 가능하면 피하는 게 좋다. 수동태 문장은 글쓴이의 주저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 단문을 쓴다글쓸 때는 독자를 꼬드겨야 한다. 말솜씨가 좋으면 유혹하기도 쉽듯, 말하기에 가까운 단문 문장을 써라. 그것이 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주어와 술어로만 구성된 단문 구조는 완벽한 문장으로 문법의 기본이면서 매우 유용하다.

* 단락을 잘 사용하라단락이란 글쓰기의 기본 단위이며, 응집이 시작되는 곳이고, 단어들이 단순한 단어 이상의 의미를 나타내는 무대다. 단락은 한 단어 길이에서 몇 페이지까지 계속되기도 하는 대단히 유연한 기구다.

기본적인 단락구성 - 주제 문장 뒤에 그를 뒷받침하고 기술하는 문장이 뒤따르는 것 - 은 글쓰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조직화하고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글쓰기를 잘 하려면 단락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 여기에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대단한 작품을 쓴다기 보다는 단락 하나를 짓고, 어휘와 문법지식, 기본적인 문체들을 쌓아가며 차근차근 다음 단계로 넘어가다 보면 언어의 집을 지을 수 있게 된다.

* 즐겁게 써라.
대부분의 잘못된 글쓰기의 근저에는 두려움이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기쁨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라면, 그러한 공포감은 훨씬 누그러질 것이다.

* 완벽한 구성보다는 흥미있는 상황을 설정하라.
구성은 훌륭한 작가들이 맨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수단이지만, 얼간이 작가들은 이것을 맨먼저 선택한다.

* 많이 읽고 많이 써라.
만일 작가가 되고 싶다면, 다른 무엇보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게 중요하다. 내가 아는 한 이 두 가지에는 지름길이 없다. 나 역시 독서 속도가 느린 편이지만 1년에 70∼80여권의 책을 읽는다.            
      
              

 ▷ 실전 글쓰기 
                     
* 보도자료는 글머리가 절반  
          
   언론사에 전달되거나 각 기업의 홍보책자에 들어있는 보도자료의 수준은 참으로 천차만별이다. 제목과 첫머리만 보아도 단박에 이해가 되고 구미가 당기는 글이 있는가 하면, 도무지 홍보의 초점이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글도 있다.

이는 흔히 두괄식 문장서술에 실패한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읽는 이의 시선을 모으는 화제를 글머리에 한 두 문장으로 요약해 넣어야 하는데, 한참 구구한 설명이 나오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가는 식이다.

이것은 귀납적인 사고와 글쓰기 방식에 익숙해 있는 것이 원인일 수도 있다.
보도자료는 언론이나 일반인을 상대로 특정 기업이나 단체, 상품 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작성하는 것이다.

숱하게 쏟아져나오는 정보들 사이에서 눈길을 끌려면 글의 첫 부분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시작이 반’이란 말은 보도자료에서 정말 맞아떨어지는 원칙이다.

1. 제목을 눈에 띄게 단다. 수치를 넣거나 신개념의 용어를 넣는 것도 효과적이다.
2. 최근 유행이나 조류, 사건 등과의 연관성을 부각시켜 시의성을 살린다.
3. 첫 문장에 간결하게 내용 전체를 요약한 뒤 본문에서 다시 상세하게 기술하는 방식을 취한다.
4. 새롭거나 난해한 개념은 따로 설명해준다.
5. 긴 문장을 피한다.
6. 반영되기를 원하는 지면에 맞는 특성을 부각시킨다. 예를 들어 인물을 내세울 수도 있고, 역사적인 기념일에 맞출 수도 있다.
7. 홍보할 초점이 여러 가지라면 각각 소제목을 달아 항목별로 나누어 설명한다.            
                  
   
* 이메일은 경쾌하게    
       
   요즘은 전자우편이 업무상이나 공적인 통신수단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메일은 컴퓨터 화면에서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용건만 간단히, 분량이 길어지지 않게 한다. 적당히 격식을 차리되, 너무 엄숙하고 딱딱한 문장도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문장 말미에 이모티콘(emoticon. 문자와 부호 등을 사용해 사람의 표정을 나타낸 상징들, 예를 들어 미소(^^) 놀란 표정(:-ㅇ) 진땀 흘리는 모습(-_-;) 등이 흔히 쓰인다)을 사용해 부드럽고 친숙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에 걸맞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건 편지글인 만큼 한마디로 요약해 말하듯 글을 쓰는(Write as you talk) 것이 좋다. 미국의 인터넷 사이트 플레인랭귀지(www.plainlanguage.com)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들이 소개돼 있다.

1. 주어와 술어를 바짝 붙여 의미가 분명한 문장을 만든다.
2. 한 문장에는 한가지 주제만 집어넣도록 한다.
3. 짧은 문장과 문단을 쓴다.
4. 명사나 명사구 대신 동사를 사용한다.
5. 능동태를 쓴다. 주어를 강조할 경우나 꼭 필요한 경우에만 피동태를 쓴다.
6. 부정적인 의미가 들어간 단어는 될 수 있는 대로 피한다.
7. 읽는 이의 취향에 맞는 톤을 유지하고 지나치게 엄격한 형식은 피한다.
8. 단순하고 친숙한 일상어를 사용한다.
9. 전문용어나 약자는 가급적 피한다.
10. 난해한 단어에는 설명을 붙인다.            
                     

* 자기소개서 대필에 100만원?     
       
   최근 인터넷에는 ‘자기소개서 대필에 100만원, 교정에 30만원’을 내건 전문가(?)들이 등장했다. 또 서울 강남 일대 학원가에서는 ‘특별지도’라는 명목으로 자기소개서를 대신 써주기도 한다. 학교장 추천서와 함께 대학입학 수시 모집 서류심사에서 중요한 전형자료로 쓰이는 자기소개서와 수학계획서를 대필시키는 것.

자기소개서는 교내 활동 상황, 수상 경력 등 7개 항목에 걸쳐 원고지 2∼4장 분량으로 쓰게 돼 있는데 ‘남보다 잘 써야 한다’는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강박관념이 '신종사업’을 탄생시킨 셈이다.

자기소개서란 말 그대로 자신을 소개하는 글이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특정한 목적(취업이나 입학 등)을 위해 자신의 언어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소개서를 스스로 쓸 수 있다는 것은 사회생활에서 꼭 필요한 중요한 능력이다. 최근 기업에서는 신입이건 경력이건 간에 사원을 뽑을 때는 자기소개서를 첨부하도록 요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는 면접 외에 대인평가방식을 좀더 정밀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자기소개서에 나타난 내용을 토대로 개인의 성격과 가치관을 파악하고, 대인관계나 조직에 대한 적응, 성실성, 책임감, 창의성, 심지어 장래성까지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조직 생활에서는 공식적인 의사전달 과정이 주로 글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이나 객관적인 사실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이 중시될 수밖에 없다.

자기소개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내용은

▲ 경력 혹은 성장과정
▲ 성격과 특기
▲ 지원동기
▲ 장래의 희망 또는 포부
▲ 기타 자격증이나 대외활동 등 특이사항 등이다.

자기소개서는 서두가 중요한데, 한 마디로 말하면 강렬하게 시작하는 게 좋다. “나는 몇 년에 어디서 태어났다”식의 뻔한 나열 형태를 피하고,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내세운다거나 자기 자신에 대해 핵심적인 사항을 먼저 요약하고 연대기적 기술로 나아가는 역순(逆順) 방식도 취해볼 만하다.

1. 기본적인 내용을 필수적으로 포함시킨다. 독특하게 쓰려다 빠트리는 게 있다면 오히려 감점 요소다. 회사에 정해진 양식이 있다면 반드시 초고를 써본 후 소재별 분량을 맞춘다.

2. 객관적인 서술을 한다.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배타적인 시각이나 표현은 삼가고 상식선에서 거부감 없는 내용이 돼야 한다.

3. 추상적인 문구나 과다한 수사법을 삼간다. 한문이나 외래어를 사용하면 의미가 빠르게 전달되고 고급스런 표현이 될 수도 있지만 확실하게 맞는지를 확인한다.

4. 표현과 문체에 일관성을 유지한다. 종결형 어미, 호칭, 존칭도 통일한다.

5. 틀에 따라서 쓰기보다는 개성있게, 참신하게 쓴다. 굴곡 없이 무미건조한 글은 보는 사람을 지루하게 만든다. 상투적인 표현도 금물이다.

6. 모든 서술은 한가지 주제, 즉 자신을 충실하게 나타내는 것으로 모아지도록 한다. 자신을 소개한다는 전제를 잊고 다른 화제로 새면 곤란하다.             
                     

 ★  인터넷 사이트 ‘텍스트코리아’ “문장을 치료해 드립니다”

 ‘텍스트코리아’(www.textkorea.com)는 권영민 서울대 교수 등 서울대 출신 교수 40여명이 모여 만든 인터넷 사이트다. 한국 문학정보를 총체적으로 검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 사이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지난 11월8일 문을 연 ‘국어문장상담소‘다.

‘국어문장상담소‘에서는 한국어문정보연구소(소장 최명옥 서울대교수) 연구원으로 국어학을 전공한 박사급 전문상담요원 10명이 인터넷 사용자의 문장을 진단하고, 문장과 문체, 맞춤법 등 글쓰기 전반에 걸쳐 치료법을 알려준다. 일종의 ‘어문 병원’인 셈이다.

상담과정은 접수-초진-본계약-작업-추가작업의 순으로 잡혀 있다. 우선 상담자가 신청란이나 전자메일을 통해 문서를 접수한다. 다음은 문서의 종류나 의뢰인의 요구사항 등을 고려해 수수료를 산정하는 ‘초진’이 이루어진다. 본계약에서는 교정, 교열, 컨설팅에 관계된 정식 계약을 맺으며, 상담원이 직접 교정, 교열 컨설팅을 하는 작업이 이뤄진다. 의뢰인이 원할 경우에는 추가교정도 가능하다.

“신청자가 알림문, 설명문, 논술문, 학술논문 등 자신의 글을 올리면, 분석 프로그램을 통해 같은 어휘가 글 속에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문장의 길이는 어느 정도인지 등 세세한 부분까지도 진단을 해줍니다. 이것에 근거해 글쓴이에게 특징과 고쳐야 할 점 등을 알려주죠. 그 다음에는 원하는 사람에 따라 이른바 ‘치료’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시간을 요하는데, 단순히 글에 대한 교정만 해줄 수도 있고, 문장이나 글의 틀까지 바꾸는 교열이라든가, 글쓰기에 대한 컨설팅도 가능합니다.”

유료서비스로 운영될 이 국어문장상담소가 활성화된다면 국민들의 국어생활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권교수는 기대했다.

이밖에 텍스트코리아에는 개화기 이후 창작된 현대문학 작품과 300여명에 이르는 작가들을 소개하는 한국현대문학관, 희곡 연극공연 배우 극작가 연출가에 이르는 연극관련 자료들을 두로 제공하는 한국연극관, 고전문헌의 내용을 담은 한국고전문헌관 등이 설치돼 있다.

- 신동아 2000년 12월호에서-



마이페이퍼 링크 주소 : http://www.aladin.co.kr/blog/mypaper/83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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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
강제규 감독, 장동건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태극기 휘날리며’는 2004년 ‘실미도’와 함께 처음으로 1,000만 관객 시대를 연 영화다. 관객을 많이 동원했다고 반드시 훌륭한 영화라는 것은 아니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는 아직도 우리 사회가 완전히는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모든 전쟁이 비극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지 않은 전쟁이 어디 있을까 만은 어제까지는 동포였던 사람들로 하여금 갑자기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만든 한국전쟁의 모순적이고 비극적인 상황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통감할 것이다.


한국전쟁에 관한 영화가 잔혹한 북괴군을 쳐부수는 국군을 그린 반공영화의 틀을 벗어난 지가 엊그제는 아니지만,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압축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한국전쟁의 비극을 그린 영화는 흔치 않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것은 아마도 한국전쟁이 영화의 소재로서 드라마틱한 요소가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한국전쟁에 관한 이전의 반공영화의 틀을 깨면서 진지한 문제의식을 담아내는 영화를 찍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태극기 휘날리며’는 제작비를 많이 사용하여 전쟁에서의 대규모 전투신도 효율적으로 묘사하면서도 - 그런 장면에 관해서는 한국영화를 한단계 발전시키지 않았나 싶다 - 한국전쟁의 비극성을 부각시키고 한국전쟁에 관한 우리의 선입견을 깨는데 어느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소박한 꿈을 안고 살아가던 의좋은 두 형제가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어떻게 변해가고 서로를 오해하고 원망하며 한국군과 북한군을 오가게 되는지, - 우리나라를 위해 싸웠다고 반드시 참전용사로 대접받았던 것도 아니고 우리와 상대방인 적이 우리나라가 외국과 전쟁을 할 때처럼 명백한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 지금보면 놀랍지 아니한가 - 그리고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그 실상에 비해서는 잘 묻혀져 있는(?) 보도연맹에 관한 단면 - 역사적 비극의 한 장면을 이제는 고인이 된 이은주가 장식하여 기분이 착잡했다. 부디 고이 잠드시길... - 등을 통하여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전쟁이 단순히 우리가 생각했듯이 북한군에 맞서 국군이 용감하게 싸웠던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블록버스터 영화가 이토록 재미도 있고 감동도 주면서 문제의식도 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카리스마 넘치는 장동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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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6-03-19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케이블에서 방송한 '태극기 휘날리며' 마지막 부분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영화관에서 볼 때는 그냥 가슴이 찡했을 뿐인데...나도 많이 감정적이 되었나보다.
 

http://news.joins.com/series/society/200601/4364/ - 중앙일보 week& 

대한민국 직장인들은 언제나 가난하다. 월급날 하루 느끼는 행복도 잠깐, 어느새 은행 잔고는 텅텅~.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는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렇다고 맛있는 음식을 포기할 수는 없다. 푸짐한 점심 식사 한 끼를 3500원에, 돈가스 한 접시를 2900원에, 맛있는 스테이크를 단돈 1만원에 먹을 수 있는 곳.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도 당당하게 찾아갈 수 있는 최저 비용의 최고 맛집 4곳을 소개한다. 주머니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계산하고 돌아설 때 값이 너무 싸 조금 미안해질 그런 집들이다. 다만 모두 서울에 있는 곳인지라 지방 독자들에게는 미안할 따름이다.



*** 종로의 숨은 보배 … 3500원에 상다리 휘청


황소고집 ▶ 돼지불고기백반


 골목마다 사람들로 넘쳐나는 종로에는 식당도 사람 수만큼 많지만, 한 번 가고 다음에 또 갈 마음이 생기는 집은 찾기 힘든 것 같다. 황소고집을 처음 발견한 날, 광교 쪽 길로 걸어가는데 초저녁부터 한 고깃집 화덕에서 연기를 피우며 고기를 굽는 것이 보였다. 이미 가게 안은 꽉 찼고 그 앞에 대기하는 팀까지, 맛있는 집일 거라는 느낌이 단박에 꽂혔다. 점심 시간이면 일대 직장인들로 북새통을 이룬다는 이곳은 5~6가지 반찬이 나오는 돼지불고기백반이 단돈 3500원이다. 오후 6시 이후에는 1인분에 4000원짜리 돼지불고기를 파는데 주문을 받을 때 술을 마실 건지 밥을 먹을 건지 물어서 반찬을 달리 내준다. 밥 손님에게는 공깃밥 1000원을 따로 받는 대신 기본 반찬을 차려 주고, 술 먹는 손님에게는 묵무침과 상추 정도만 준비해 준다. 돼지불고기는 얇게 썬 목살 부위를 사용하는데, 숯 냄새를 살짝 풍기는 달착지근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입맛을 확 돋운다. 반찬으로 나온 버섯볶음.무생채.미역초무침.콩나물무침 등도 보통은 넘는 정갈한 맛이고, 된장국도 구수하다. 먹다가 떨어진 반찬은 알아서 가져다 먹는 셀프 시스템이니 눈치 볼 것 없이 왕창 먹을 수 있다. 일하는 사람들 호흡이 척척 맞아 손님이 많아도 재빠르게 돌아가는 집, 간만에 종로에서 괜찮은 밥집 찾아내서 뿌듯하다.



*** 얼굴만 한 접시가 꽉 … 짠돌이 미식가들 Happy Song


온달 돈까스 ▶ 왕돈가스


 얼마 전 TV에 나왔던 2900원짜리 돈가스를 떠올리고 찾아간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온달 돈까스. 가게 안 조명이 노란빛이라서 첫 느낌에도 돈가스를 안주 삼아 맥주 한잔해도 괜찮을 분위기다. 실제로 식사하는 테이블과 술 마시는 테이블의 비율이 반반이었다. 이 집의 대표 메뉴인 왕돈가스와 콜라를 주문하니, 주문받는 종업원이 콜라는 후식 메뉴에 있으니 그걸 먼저 갖다 주겠다고 싹싹하게 말한다. 요즘처럼 1000원숍, 3000원으로 밥상 차리기 같은 짠돌이 라이프 스타일이 각광받는 시대에 딱 부합하는 외식 장소가 아닌가 싶다. 이 집에서 4인 가족이 돈가스 외식을 한다면 1만원짜리 한 장에 1600원만 더하면 된다. 종잇장 같은 돈가스가 새모이처럼 나오면 어쩌나 하는 기우를 깨고 종잇장보다 스무 배쯤 두툼하고 바삭한 돈가스가 커다란 접시 한 가득이다. 계피 향이 나는 것 같은 달착지근한 돈가스 소스에, 옆에 따라나온 콩도 설탕에 버무린 것처럼 달큼해 아이들이 아주 좋아할 것 같다. 그 다음에 또 찾아가서는 전기구이 통닭을 먹었는데, 기름기 쪽 빠진 통닭은 당연히 쫀득쫀득하면서 부드러웠고, 함께 나오는 무맛도 달착지근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맛있고 가격 부담도 없는 이곳이 늘 한결같기만을 바랄 뿐이다.



*** 행복한 '굴 벼락'… 보쌈김치 리필에 감자탕 덤까지


삼해집 ▶ 굴보쌈


 삼해집에서 굴보쌈을 주문하면 세 번 놀란다. 일단 엄청난 양에 놀라고, 그중에서도 밑에 깔린 김치와 고기가 비명을 지를 것 같은 엄청난 굴의 양에 다시 놀라고, 정식 메뉴라고 해도 손색없을 감자탕이 서비스로 딸려 나와 또 놀란다. 다른 보쌈집에서는 추가 주문 메뉴인 보쌈김치도 이 집에서는 무한정 리필. 혹시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하는 집 아니냐고? 고기쟁이 메뚜기떼를 만족시킨 집이니 염려하지 마시길.


일단 얼큰한 감자탕 국물로 목을 축인 뒤, 본격적으로 보쌈 먹을 준비를 한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비계가 약간 붙은 고기를 한 점 놓은 뒤, 그 위에 돌돌 말린 하얀 김치와 빨간 김치 소, 싱싱한 굴 한 점을 얹어 입을 크게 벌려(크게 벌려야 한다. 고기가 좀 크게 썰렸다) 입에 넣는다. 두툼하게 씹히는 고기 맛도 좋지만, 시원한 보쌈김치와 함께 싱싱한 굴 맛이 정말 최고다. 이 집에서는 여름철에도 생굴을 먹을 수 있는데, 굴이 나는 충무에서 공수해오는 덕분이란다. 조미료에 민감한 사람은 감자탕이나 닭도리탕의 국물을 먹는 순간 뜨악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조미료 사용도 일종의 노하우라고 할 수 있으니 든든하게 감자탕과 보쌈 둘 다 먹고 싶은데,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을 때 이 집으로 가자.



*** 우아한 칼질 … 1만원의 무한 감동


쿠킨 스테이크 ▶ 오늘의 스테이크


 어느 날 TV에서 스테이크를 단돈 1만원에 파는 집이 나오는 것을 봤다. '정말 스테이크가 1만원이야? 혹시 컵라면에 들어 있는 것 같은 가짜 고기가 아닐까?'란 의심을 품고 밑져야 1만원이라는 심정으로 찾아갔다. 가게 문 앞에 요일별 스테이크를 안내하는 문구가 커다랗게 쓰여 있다. '오늘의 스테이크'는 하루 50개 한정 판매. 그렇다면 선착순 50명 안에 들지 못하면 제값 주고 먹어야 하는 건가? 50개 이후부터는 일괄적으로 비프스테이크로 대체한다고 하니 헛걸음할 걱정은 없다. 비교하기 위해 '오늘의 스테이크'와 제값 다 받는 메뉴판의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1만원짜리 스테이크 코스도 수프와 샐러드, 디저트까지 나오는 제대로 된 코스다. 스테이크에는 볶음밥 한 덩이, 매시드 포테이토 한 덩이, 옥수수샐러드까지 곁들여 있어 꽤 그럴싸하다. 스테이크를 써는 데 육질이 부드러워 크게 힘주지 않아도 쉽게 썰리고, 입 안에서는 몇 번 씹기도 전에 꿀떡꿀떡 넘어가 버린다. 육질이 정말 훌륭한데, 달착지근한 소스 맛이 강해 고기 맛을 가리는 것 같아 아쉽다. 소스를 뿌리지 말고 따로 달라고 해서 먹는 것도 더 맛있게 먹는 요령이다. 어린 시절 경양식 집에서 먹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정감 있는 맛의 '오늘의 스테이크'와 제값 다 받는 스테이크와의 차이는 고기가 약간 더 큰 것과 장식용 음식 아이템이 좀 더 추가되는 정도.


◆ 글을 쓴 메뚜기떼는 (blog.naver.com/meddugi_five)


맛있는 걸 싸게 먹는 것이 최대의 행복인 대식가 회사원들. 먹는 것을 인생 최대의 낙으로 삼는 먹성 좋은 여자 다섯 명이 3년 전 삼겹살판 위에 손을 모으고 도원결의를 했다. TV에서 맛있다고 온갖 감언이설로 사람을 살살 녹여 찾아갔더니 생각보다 별로인 데가 많더란다. 사람이 그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간 TV에 소개된 맛집 가운데 정말 맛있는 집만을 골라 'TV 속 맛집 즐겨찾기(랜덤하우스중앙)'를 책으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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