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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덫
장하준 지음 / 부키 / 2004년 8월
평점 :
‘개혁의 덫’은 장하준 교수가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신문과 잡지 등에 쓴 컬럼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래서 각각의 글이 무척 짧아 내용이 깊게 들어가지 못하고 같은 내용이 중복되는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우리가 우리 경제 전반에 대하여 막연히 가지고 있는 생각이 얼마나 편향되고 맹목적인 것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장하준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내용은 우리가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는 영미식 자유경제체제(또는 자유경제체제로 포장된 신자유주의)가 사실은 우리경제가 요즘 겪고 있는 많은 구조적 문제점들의 근본 원인이며 우리경제가 따라야할 만병통치약적인 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도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하는 위치에 있을 때에는 강력한 보호무역과 유치산업보호정책을 펼치다가 자국의 경쟁력이 제일 강해진 다음에야 자유무역을 주장한 점이나, 실제 개발도상국들이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했을 때가 자유무역체제를 도입한 이후보다 경제 성장률이 훨씬 높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영미가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는 다같이 잘살자는 것이 아니라 잘사는 자만 더 잘살겠다는 체제이고 아직 선진국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우리가 받아들일 제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물론 우리가 우리보다 경쟁력이 약한 후진국들에게 그러한 체제를 강요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책이 담고 있는 시각은 장하준 교수가 말하듯이 우리의 기존 통념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것들이 많다.
예컨대, 정부주도 경제는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계획경제체제여서 현시대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이제는 시장의 자율적인 기능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고 경제상황이 변했어도 정부의 산업정책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주장이나,(p71~)
국영기업의 민영화가 무조건적인 절대선은 아니며 아직도 성공적으로 국영기업체제를 실현하고 있는 국가들도 있고 섣부른 민영화는 부작용이 더 크다는 주장,(p91)
공적자금으로 살린 국내기업들을 공적자금을 회수하기 위하여 서둘러 해외자본에게 매각하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라는 주장(p95),
한국의 재벌체제가 여러 부작용도 있지만 반드시 타파해야만 하는 비효율, 무능력한 체제만은 아니라는 주장(p99)
중국의 성장 앞에서 우리나라는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업에 치중해야 한다는 주장의 허구성을 지적하거나(p181)
주주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것이 가장 선진적인 제도는 아니라는 주장(p189) 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각이나 소위 보수나 진보에서 주장하는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적어도 경제 전문가가 아닌 우리 대부분이 너무 막연하고 단순한 논리에 기초하여(예컨대 재벌의 부도덕한 측면만을 보고 재벌체제는 무조건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나 공기업은 이윤추구의 동기가 약하고 비효율적이어서 민영화를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는 생각 등) 우리 경제를 둘러싼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자문을 하게 된다.(불행하게도 우리 경제정책을 이끄는 소위 시장제일주의자들은 어떤 면에서는 지식에 기초한 더욱 견고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장하준 교수가 수년 전부터 일관적으로 이야기하던 것들이 그 수년 동안 그대로 현실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2003년에 쓴 FTA에 관한 컬럼(경쟁력이 차이가 나는 국가간 FTA의 체결은 장기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고, 미국과의 투자협정체결은 미국의 국익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우리나라에는 반드시 이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내용 -p38~, p147~)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아직도 늦지는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소위 개혁론자, 시장주의자들이 현실을 직시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