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법조 브로커 김홍수씨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드러난 고등법원 부장판사(이하 ㄱ 부장판사)가 실제로 사건 담당 판사들에게 여러 차례 청탁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지방법원의 부장판사로 일하고 있는 ㄴ 판사는 최근 <한겨레> 기자와 만나 ㄱ 부장판사가 집요하게 청탁을 했으며, 사건 청탁 뒤 선물까지 건넨 사례가 있다고 털어놨다.
몇년 전 지방의 한 법원에서 재판장으로 있던 ㄴ 판사는 ㄱ 부장판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ㄱ 부장판사는 “뇌물 혐의로 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업체 사장을 집행유예로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청탁 전화가 여러 차례 이어졌지만, ㄴ 판사는 선배인 ㄱ 부장판사의 청탁을 결국 거절했다. ㄴ 판사는 “청탁 자체도 잘못된 것이지만, 이 피고인을 풀어주면 비슷한 범죄를 저지르고 실형을 살고 있는 다른 피고인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생겨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듬해 우연히 ㄱ 부장판사와 마주친 ㄴ 판사는 “그땐 죄송했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ㄱ 부장판사는 “내가 ㄴ 판사한테 뭐라고 부탁했지?”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ㄴ 판사는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ㄴ 판사는 ㄱ 부장판사의 또 다른 청탁 사례도 털어놓았다. “지난해 한 지방법원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ㄱ 부장판사가 이길 만한 사건을 담당 재판장인 ㄷ 판사에게 청탁을 했다고 합니다. ㄷ 판사는 청탁과 관계 없이 승소 판결을 했는데, 그날 저녁 ㄷ 판사 집에 택배로 백화점에서 산 선물꾸러미가 도착했다는 거에요. ㄷ 판사가 깜짝 놀라 ㄱ 부장판사에게 선물을 돌려보낸 일이 있었죠.”
ㄴ 판사는 “아마 김홍수씨 수첩에는 법원 누구누구한테 선물을 보냈다는 내용은 있지만 돌려받았다는 내용까지는 없을 것”이라며 “의도하지 않게 선물을 받고서 곧바로 돌려준 ㄷ 판사 같은 사람도 검찰의 의심을 받을 거 아니냐”고 씁쓸해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내 가족·친척인데…형량을 좀 낮춰주지”
‘인지상정’ 용인 분위기
“형량을 좀 낮춰달라”
ㄱ판사는 가까운 친척이 형사사건으로 기소됐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 잘 알던 담당 판사에게 전화를 걸어 선처를 부탁했다고 했다. 친척은 피해자와는 합의가 이뤄졌고 판결선고만 남은 상황이었다. ㄴ판사도 아버지가 연루된 사건의 담당 판사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그는 “나와 아주 가까운 친척이나 가족이 판사에게 전화해달라고 부탁하면 정말 거절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고법 부장판사와 법조 브로커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가 드러나 물의를 빚고 있는 가운데 상당수 판사들이 ‘관선변호’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한겨레> 취재 결과 드러났다. 관선변호란, 판사가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고 특정 당사자에게 유리하게 해달라며 사건이 걸린 담당 판사에게 청탁하는 것을 말하는 법조계의 ‘은어’다.
ㄴ판사는 “정말 가까운 친척의 부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전화받는 판사 쪽에서도 어느 정도 이해한다”며 관선변호를 대하는 법원의 분위기를 전했다. ‘인지상정’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행위라는 인식이다.
ㄷ판사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는 청탁을 △확실히 이길 경우 △확실히 질 경우 △정말 억울한 경우로 나눴다. 그는 “이기거나 질 것 같을 때는 ‘담당 재판부에 말을 해달라’는 청탁이 들어와도 그냥 듣고 흘려버리지만, 정말 억울하게 ‘엮였다’고 생각되는 경우엔 담당 판사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참고하라’고 얘기한다”고 말했다.
전화를 이용한 직접적인 청탁은 아니지만, 판사의 직권을 이용한 사례도 있었다. ㄹ판사는 가까운 친척이 형사사건으로 기소되자 그 사건기록을 복사해서 검토한 뒤 “피해자와 빨리 합의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나도 청탁 전화를 받기는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고민 끝에 이런 선에서 끝냈다”며 “담당 판사는 내가 사건 기록을 그런 이유로 복사했는지는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판사들은 “상대방이 있는 민사 사건은 아무리 가까운 사람의 부탁이라도 청탁하지 않는다(ㄱ판사)”거나 “3촌 이내의 사람들 이야기라면 일단 사정을 들어보기는 하지만, 그 이외의 사람이라면 ‘오히려 불리하게 판결할 수 있다’며 자른다(ㄹ판사)”며 나름의 관선변호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들은 “내 청탁이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한 판사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그런 정도의 도움은 줄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법관은 타인의 법적 분쟁에 관여하지 않으며, 다른 법관의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법관윤리강령을 어긴 것이다.
한상희 건국대 법대 교수는 “다른 판사의 청탁이 들어오면, 아무래도 기록을 더 살피게 될 것”이라며 “그것만으로도 판사를 친척으로 둔 피고인이나 소송 당사자에게는 특혜가 돌아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판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판사들의 주장에 대해 “판결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면 전화를 왜 하는 거냐”고 꼬집었다.
서울 지역 법원의 한 판사는 “대부분의 판사들이 나름대로 선을 그어가며 청탁을 하고 청탁을 받지만, 그것이 돈과 연관이 되면 바로 범죄가 되는 것”이라며 “최근 법조 브로커와 연루된 고법 부장판사가 수사를 받는 상황에 이르러, 이제는 ‘인지상정’에 얽매인 관선변호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태규 고나무 기자 dokbul@hani.co.kr
‘관선변호’란?
판사가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고 특정 당사자에게 유리하게 해달라며 사건이 걸린 담당 판사에게 청탁하는 것을 말하는 법조계의 ‘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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