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원래 나는 소설을 즐겨 읽었으나 최근에는 역사를 비롯한 사회학적 서적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소설을 좋아하지만 최근에는 비교적 쉽게 읽히지 않는 책을 주로 읽고 소설은 거의 읽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바람의 그림자 두권을 며칠만에 다 읽고 나서, 나는 오래간만에 이런 맛으로 소설을 읽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잠시 동안 잊고 지냈던, 소설의 내용에 몰입되고 감정이입이 되면서 느끼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간만에 다시 느꼈다고나 할까.


바람의 그림자의 배경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이다. 게다가 시대적 배경은 1950년대, 또는 그 이전인 20-30년대이다. 그렇지만,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시간과 장소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바람의 그림자를 읽으면서 나는 등장인물들의 복잡하면서도 극한 감정을 고스란히 가슴으로 느끼면서 소설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바람의 그림자는 소설의 구성 자체도 복잡하다. 주인공인 다니엘이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을 처음 만나게 되면서 ‘바람의 그림자’의 작가인 훌리안 카락스의 삶을 추적하고 재구성하면서 거꾸로 ‘바람의 그림자’가 다니엘의 삶을 만들어가고 그러한 다니엘의 삶이 또다시 ‘바람의 그림자’를 변모하게 한다. 이렇게 복잡한 소설적 구조 안에서 다니엘과 훌리안, 그 이전의 여러 인물들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절묘하게 톱니바퀴가 돌아가듯이 서로 맞물린다.


다니엘이 클라라를 처음 만나 느끼는 강렬한 느낌, 그녀와의 사랑이 좌절되었을 때의 분노와 좌절감, 페르민이 폭행당할 때 힘이 되어 주지 못하고 일신의 안위를 먼저 겁내는 자신에 대한 경멸감, 베아와의 시련을 뛰어넘는 강렬한 사랑과 처음으로 여체를 탐할 때의 짜릿함, 항상 옆에서 지켜보는 아버지의 다니엘에 대한 은근한 사랑, 그리고 훌리안을 둘러싼 너무나도 비극적인 운명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감정들이 ‘바람의 그림자’를 통하여 내게 강하게 전달되었다. 너무나 생생하게 전해져서,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훌리안의 감정을 내가 느끼면서 내가 마치 그를 오랫동안 알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두권짜리 소설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 작가가 등장인물들에게 인생의 온갖 풍파를 입혔고 그것을 내가 함께 목격해 왔다는 느낌이랄까...


‘바람의 그림자’는 폭력과 무법이 난무하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는 너무나도 비극적인, 오래되어 검게 눌러 붙은 피딱지 같은 빛깔의 소설이다. 하지만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의 극단을 느껴볼 수 있고, 영리한 작가 덕분에 책을 다 읽고 나면 눌러 붙은 피딱지 밑으로 고개를 드는 새살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기부기 2006-05-02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재밌게 읽은 책을 발바닥도 재밌게 읽어서 좋아. ^^

외로운 발바닥 2006-06-06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그렇게 재밌고 감동적일줄은 몰랐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