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하기 짝이 없는 단순 이론가들의 피비린내나는 행태들과 비교하면 강대국 미국이 이제까지 취해온 태도는 분명 존경받을 만하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호의적이고 책임감 있게 약소국을 대해온 맹주는 세계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 미국의 정치에 대해 아무리 비판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 점만은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니교'는 미국의 정치 문명과 역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미국의 국부들은 의식적으로 미국을 시대에 뒤떨어지고 완고한 유럽, 종교 탄압과 내전으로 갈가리 찢긴 왕정 유럽과는 정반대되는 사회, 악의 세계 한가운데 들어선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설정했다. 정착민 대 원주민, 북부 대 남부, 자유로운 미국 대 보수적인 제국주의 권력 등 미국사의 중요한 단계마다 '우리 대 그들'의 도식은 어김없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전력을 기울여 독일 황제와 싸우고 나니, 악마의 자식 히틀러의 나치스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이 다음 상대로 떠올랐다. 미국민들은 이런 경험을 치르며 세계 지도자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그들은 민주주의와 인권, '선'을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역사적 과제라고 믿게 되었다. (p33)

비록 최근 미국의 행태에 상당히 비판적인 나이지만, 과거 제국과 비교하면 미국이 상대적으로 점잖다는 저자의 지적은 새로우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리부동한 미국에게 실망을 넘어서는 감정이 생기는 것은 미국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일까?

세계 모든 종교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성스러운 말이 언어로 전승되고 있으며 영원한 유효성과 보편성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성스러운 말은 그 시대에 엄격히 한정된 상세한 서술과 고도의 일반성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다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본래의' 의미를 찾아내려는 근본주의적 시도는 비극적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다. 이 '본래성'은 예언자가 살고 활동했던 문명적, 사회적 맥락에서 밝혀질 수밖에 없다. 언어의 의미론은 언제나 역사적 배경과 묶여 있다. 의미는 동시대인들의 삶의 세계로부터 풀려날 수 없으며 수백 년 간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운반될 수도 없다. 하지만 이 삶의 세계는 이미 흘러가 복원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재구성은 모두가 불완전하다. 합리적인 논리를 근거로 여러 개의 해석들 가운데 사나에게 많은 점수를 주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관철은 오로지 신학 외적 수단, 다시 말해서 권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에는 폭력적인 분열, 경찰력과 군사력에 의한 신자와 성직자의 분열이 이미 내재해 있다. (p195)

나는 포용을 거부하고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들, 그들이 추종하는 **주의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들이 남에게 강요하는 교리 또는 사상이 수천년 전 예언자가 전한 말에 대한 누군가의 주관적 해석이라면 정말 무언가 주객이 한참이나 전도된 느낌이다. 물론 내가 비종교인이라서 이렇게 쉽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천년이 된 텍스트의 문구에 지나치게 얽매인 해석과 그런 사상의 강요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지...첨단을 걷는 현대에도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당연히 포함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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