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씨개명의 진실

본래 성씨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고심한 일을 두고 애국심의 발로라고 하는 것은 반듯한 지적은 아닐 것이다. 본래의 성씨에 대한 각별한 집착은 어디까지나 가문에의 집착이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의 성씨와는 무관한 일본식 성으로 고쳤다고 해서 그 집안을 친일 가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윤(尹)씨도 아니면서 '이토'로 한다든가 해서 완전히 일본식으로 고친 사례도 많았다. 또 창씨를 끝까지 거부했다고 해서 그 집안을 반일 가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은 친일 행위는 친일 행위대로 부족없이 이행하고 본래의 성씨를 고수한 사례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창씨 문제가 당사자의 친일 성향이나 반일 성향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짐작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문제의 실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정보나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순진한 학생이 윤동주 가문의 창씨를 알고 크게 실망하는 것은 당대 상황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p15)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었던 사람들...

학생들에게 대혁명이 시작된 날 파리 시민이 습격하였던 바스티유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은 대충 얼마나 되리라 생각하느냐고 묻는 상상력 놀이를 시험한 적이 있다....10만명, 5만명, 3만명에서 5천명에 이르는 다양한 답변이 나왔다. 답변의 공통점은 숫자를 매우 올려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1789년 파리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점거하였는데 바스티유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은 40명의 스위스 용병과 80명의 퇴역병뿐이었고 감옥안에 수용되어 있는 죄수는 16명밖에 되지 않았다.

루이16세의 전제정치, 프랑스 대혁명, 분노한 파리 시민들의 공격 등이 상상력에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크고 벅차고 엄청난 것이다. 따라서 감옥도 죄수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막연히 추측하게 된다. 그래야 대혁명에 어울리는 규모가 되는 셈이다. 상상력이란 이렇게 기성적인 관념에 의해서 규정되고 예단되게 마련이다. (p17,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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