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 ‘인식-재인식’넘어 ‘새 인식’으로

지식사회 대한 찾기 1. 지금 한국은 ‘역사 내전’ 중
한민족이냐 남한 국가냐
한국사 주체 놓고 좌우 전면전
‘열린 담론 시대’ 계기로 삼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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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해석을 둘러싼 갈등 양상이 한창인 지금 '행복한 책읽기'는 출판.지식계의 돌파구 마련을 위한 '지식사회 대안찾기'시리즈를 이번 주 시작합니다. 학계의 대표적 논객들이 참여하는 지적 논의의 큰 멍석인 '지식사회 대안찾기'는 지난 30년간 어젠다를 선점해온 주요 저작물의 흐름을 점검해가며 논의를 풀어갑니다. 1970년대 이후 지식사회가 어떻게 전개돼 왔는지 찬찬히 훑어보면서 과연 어디로 방향을 잡아갈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까지를 자연스럽게 구해보는 작업입니다.



지난 몇 주 사이 한 권의 책이 유령처럼 나타나 신문 지면을 배회하고 있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이하 '재인식')이라는 유령이…. 좌파들은 이에 대항하는 진보동맹을 결성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우파들은 이것을 일대 반격을 벌이는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이 책의 대표 편집자인 박지향 서울대 교수가 어떠한 정치적 의도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진보세력이 대거 참여한 현 정부는 1894년 동학운동 이래 한국 근현대사를 '심판'하기 위해 과거사 청산작업을 벌였다. 그때부터 논란은 시작됐다. 현 정부의 과거사 청산작업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사회적 기억을 바꾸는 프로젝트이고, 이는 서울대 이영훈 교수의 표현대로 '문화혁명'에 속한다. 이에 따라 역사 논쟁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박정희기념관 건립과 금성출판사 발행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그리고 맥아더 장군 동상 철폐를 둘러싼 강정구 교수 파동 등….

이 모든 국지전은 '재인식' 출간의 전사(前史). 이제는 국지전을 넘어 역사인식 내전이 벌어진 상황이다. 분명한 것은 좌파든 우파든 해방 이후 한국사가 진보를 이룩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는 점이다.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성장은 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현실이 진보했다면 역사는 이성적이다. 그렇다면 헤겔의 말처럼, "역사는 이성의 확대과정"인가?

1980년대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이 현실의 진보를 위한 '운동으로서의 역사'라면, '재인식'은 이 진보된 현실에 근거해 그 역사를 부정하기 위해 나왔다. 그 핵심에 박정희가 있다. 박정희는 민주화를 가로막고 분단체제를 고착화시켰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는가 하면, "고깃국에 쌀밥 먹는다"는 우리 꿈을 실현시켜준 단군 이래 최대 영웅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쟁점은 박정희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어떤 기억을 역사로서 공인하느냐다. 진보진영은 독재자 박정희라는 과거사를 청산하고자 한다면, 보수세력은 기념관을 세움으로써 그에 대한 기억을 영구화하려고 한다.

이는 지난 20년 사회변화와 밀접하게 얽혀있다. 한국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진보운동은 1987년 6월 항쟁을 정점으로 해서 하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가속도가 붙은 민주화가 진척될수록, 운동의 동력은 그만큼 소진되어 갔다. 현실의 진보가 이념의 보수화를 낳는 역설이 생겨났다. 80년대 완간된 '인식'이 우경화한 현실을 교정하려는 노력이었다면, 이제 나온 '재인식'은 그 반대다. 좌경화한 현실에 대한 반발력의 소산이다.

하지만 '재인식'의 출간을 보수.진보의 대립으로만 보는 것은 위험한 단순화다. '재인식' 내부를 들여다보면 분열과 균열이 존재한다. '재인식'의 필자들 가운데 연세대 김철과 신형기 교수는 탈(脫)민족주의자로 볼 수는 있어도 보수주의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보혁(保革)의 대립구도로 보는 이유는 '인식'의 민족 지상주의와 민중혁명 필연론이 한국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는 문제의식을 '재인식' 필자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는 일반적으로 민족주의자를 우파로 보고 탈민족주의자를 좌파로 분류하는 데 반해, 탈민족주의자를 보수주의자로 오해하는 경향은 한국의 특수성에서 비롯했다. 이런 특수성은 분단현실의 토양에서 생겨났다. 확실히 해방 전후사의 한 가운데 분단 문제가 있다. 분단현실은 한국 현대사 연구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해 한국사학을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70년대 말에 나온 강만길 전 고려대 교수의 '분단시대 역사인식'(창비)은 분단체제에 안주하는 실증사학을 비판하고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분단극복사학을 정립했다. 그 책의 영향은 지금까지 우리 지식사회에 깊고도 짙다.

또 전 백낙청 서울대 교수에 의해 66년에 창간된 '창작과 비평'(이후 '창비')은 문학과 인문사회과학을 망라하는 종합지로서 한국사회의 진보담론을 이끌었다. '창비'의 역사는 그야말로 한국 민주화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과제는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말대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이며, 통일보다는 평화다. '창비'가 창간 40주년을 맞이하여 운동성 회복 선언을 하는 것으로 이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결국 문제는 오늘의 한국사 화두가 여전히 분단모순 극복인가 하는 점에 모아진다. '재인식'은 강만길의 분단시대론과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에 대한 일대반격이다. '인식'이 설정했던 한국현대사의 플롯은 한마디로 "민족을 주어로 해서 통일이라는 목표를 실현해야 한다"는 당위였다. 이에 대해 현실의 우위를 주장하는 '재인식'은 한국 현대사를 "남한 국가를 주어로 해서 근대문명을 이룩했던 과정"으로 서술할 것을 요구한다.

얼핏 독일의 역사가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말이 생각난다. 그에 따르면, 역사쓰기는 3단계다. 첫 번째 '역사쓰기'가 있고, 그것을 계속 '이어쓰기'를 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다시쓰기'가 나온다. 즉 첫 번째와 두 번째 역사쓰기를 전면 수정하는 단계다. '재인식'의 등장은 두 번째에서 세 번째로 넘어가는 중간지점으로 보인다. 그래서 '새인식'이 아니라 '재인식'이다.

민족 대신에 남한 국가를 주어로 하고 근대화의 목표를 견지하는 것이 뉴 라이트 운동과 다를 바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민족 대신에 국가를 주어로 설정하는 기존 국사의 플롯을 고수하는 것이다. 나는 해방전후사의 '새인식'을 위해서는 민족이라는 주어뿐만 아니라 근대화라는 목표 둘 다를 수정하는, 이른바 탈근대주의를 지향하는 제3의 한국사 서술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4년 임지현 한양대 교수 등이 펴낸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휴머니스트)가 지향하는 탈(脫)민족주의가 한국 역사학이 시도하는 탈근대주의의 첫걸음이다.

국사를 넘어서 동아시아사와 세계사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쓸 때, '새인식'의 패러다임이 열릴 수 있다. 그 점에서 나는 역사의 내전을 촉발한 '재인식'의 출간은 한국사 서술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고할 뿐만 아니라, 21세기 한국인의 정체성과 나아갈 방향에 대한 문제제기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앞으로의 과제는 '재인식' 안에 내재해 있는 차이.틈새를 더 크게 드러내서 한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담론의 새 장을 여는 일이다.

내가 보기에 80년대 '인식'이 한국사에 대한 해석을 다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시키는 것이 문제라는 근대의 패러다임에 입각해 있다면, '재인식'은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혁운동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탈근대 패러다임을 지향한다. 확실히 모든 역사는 의도하든 안하든 정치적이다. '역사의 정치화'는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역사가의 임무는 '역사의 정치화'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역사화'에 노력해야 한다. '재인식'의 편집자는 어떤 정치적 함의도 갖지 않고 책을 집필했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그 말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위해서는 '정치의 역사화'에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좌파의 책 vs 우파의 책

"그동안 좌파적 해석이 지식계를 압도해왔다."서울대 박지향 교수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서 토해낸 말대로 1970년대 이후 비중있는 저작물들은 이념상 좌파로 분류된다. 우선 70년대.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74년) '8억인과의 대화'(77년) 두 권은 냉전인식에서 벗어나는 신호탄. 여기에 문학이 가세해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78년) 백낙청의 '민족문학과 세계문학'(78년)이 계급.민족이라는 화두를 지식사회에 던졌다.

79년 '해방전후사의 인식' 첫 권 등장은 이런 인식틀을 현대사에 적용하며 전선을 확대해간 케이스. 80년대는 이 문제의식을 사회과학으로 구체화했다. 성균관대 김동택 교수는 이 시기의 핵심저술로 강만길의 '한국근대사'(84년) '한국현대사'(94년),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86년), 이진경의 '사회구성체와 사회과학방법론'(86년)을 꼽았다.

반면 우파 저술로는 자유주의.포스트모던 성향의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87년),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91년)가 새로운 생각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근식의 '자유주의 사회경제사상'(99년)도 꼽아야 한다. 90년대와 2000년대 '우향우' 분위기 속에서 중도로 분류된 책도 성큼 자라났다.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2002년), 임지현의 '우리 안의 파시즘'(2000년), 공병호의 '시장경제와 그 적들'(97년)도 이때 나왔다.

조우석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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