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차사는 없다(p 146~)

태조 이성계가 아들들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쟁탈전에 회의를 느끼고 함흥으로 가서 태종이 보내는 사자를 활로 쏘아죽였다는 함흥차사 이야기는 유명하다. 속담으로도 심부름을 간 사람이 소식이 아주 없거나 또는 회답이 좀처럼 오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함흥차사는 뒷사람들이 무자비한 태종 이방원의 행동을 풍자하느라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성계는 사자들을 죽이지 않았으며 함흥차사로 죽었다는 벼슬아치들은 그 뒤에도 조정에서 계속 활동하였다고 한다. 
 
조선 최초의 반란(p 143~)

태종대에 동북면을 중심으로 강비의 외가붙이인 조사의가 군사를 동원하고 함흥 주변의 여러 고을을 위협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반란군의 수는 7천을 헤아렸으며 여진의 우량하이의 군사까지 합하면 1만명이 넘을 정도로 세력이 컸다. 조정의 중앙군은 초기에는 반란군에게 밀렸으나 반란군에게 사로잡힌 김천우가 중앙군의 숫자를 4만명으로 불려 말하는 바람에 이에 겁을 먹은 반란군은 우왕좌왕하다 결국 진압되고 말았다.

놀라운 점은 저자에 따르면 이 조선왕조 최초의 반란에 태상왕 이성계가 동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태상왕의 종적을 보면 그가 반란군을 따라다닌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록에서는 태상왕의 행재소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그가 반란군에 동조한 사실도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스스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아 새로운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가  자식들 간의 서로 죽이는 권력쟁탈전을 보고 오히려 반란군에 동조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