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항쟁의 실체(p103이하)

삼별초는 원래 최이가 조직하였다. 최씨 무신정권 시기에 도둑떼와 농민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나자 최이는 개경 경비를 위해 용사들을 뽑아 야별초를 조직하였다. 치안상황이 오히려 악화되자 최이는 야별초를 확대하여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고 강화도로 조정을 옮기고 몽골과 전쟁을 벌일 때 몽골에 잡혔던 장정들이 강화도로 들어왔는데 최이는 이들로 군대를 조직하여 신의군을 만들었다. 신의군과 좌별초, 우별초를 통틀어 삼별초라 하였다.

삼별초는 선택된 군대로 국가에서 많은 봉급을 주었고 공을 세우면 죄인들의 재산을 나누어받는 등의 특별대우를 받았다. 삼별초는 1980년대의 육군보안사령부와 같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p104)

삼별초는 대몽항쟁 기간에 수백 명 단위로 출전하여 지방군과 농민군을 이끌고 몽골에 맞서 싸우기도 하였으나 삼별초의 주력부대는 강화도에서 무신정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정권의 비호를 받는 이들은 다른 군사들에게 횡포를 부리기 일쑤였으며, 백성들을 침탈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따. 또한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하수인이었으나 주인을 내무는 일에도 동원되어 최이, 김준, 임연, 임유무를 축출할 때 중간 지휘자들은 삼별초를 동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유무를 죽인 뒤 삼별초는 구심점을 잃었고 새로운 무신정권이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이들에게 주어졌던 특권도 사라지게 되었다. 삼별초 지휘관들은 무신정권이 사라진 뒤에 그 하수인 노릇을 한 일로 처벌을 받을까 두려웠고 몽골군에 대항해 싸웠기 때문에 몽골에게도 자신들이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와같은 배경에서 삼별초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조정에서 개경환도를 결정한 뒤 강화도에서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배중손, 노영희 등은 '오랑캐 군사들이 대거 밀려와 인민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은 구정으로 모이라.'고 선동하였고 이에 속아 모인 사람들을 강제로 강화도에 가두며 강화성을 지키다가 형세를 보고 배 1천 척을 모아 재물과 군사와 가족을 싣고 진도 쪽으로 향하였다.  삼별초군은 진도 일대에서 고을과 성을 점령하여 세력을 떨쳤다.  한때는 창원, 김해, 마산, 동래, 황해, 탐라 등을 석권하기도 하였으나 끝내는 고려와 몽골 연합 토벌군에게 밀려 진도에서 대패하여 위왕인 승화후와 배중손은 죽음을 당하고 김통정은 남은 세력을 이끌고 탐라로 가서 끝까지 항쟁하였으나 1273년 4월 28일 토벌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끝내 김통정이 자결을 함으로써 삼별초는 종말을 고했다.

삼별초는 몽골에 반감과 원한을 지닌 민중들의 호응을 받아 세력 범위를 넓히고 민중들의 호응도 어느정도 얻었다. 그러나 삼별초의 역량으로서는 강력한 몽골에 끝까지 맞설 수 없었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고려의 30년 대몽항쟁이 고려인의 의지와 정신을 드날렸다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그로 인한 피해는 그에 비례하여 높았고 삼별초의 항쟁도 그와 같았다. 삼별초의 항쟁은 민족 정신사에 남을 뿐 현재적 실익은 아무것도 없었다.

1970년대 군사 독재정권 아래에서 어용학자들은 무신정권을 민족적이고 진취적인 정치세력으로 높이 평가하고, 삼별초군의 활동을 국난극복 사례로 꼽았다. 이는 군사 독재 정권의 민족주의적인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역사 조작의 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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