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집에 오는 날인데 내가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아파트 단지 전체가 정전이 되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정전이 되어 온세상이 깜깜해 지는 것이 무서웠고,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는 어머니와 함께 촛불을 켜고 다시 불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는데,

나이가 들고, 집을 떠나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살다 보니 내가 20년도 넘게 산 아파트에 정전이 된 것은 아주 오래간만의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하늘은 가을의 저녁 5시 정도의 빛깔처럼 붉은 빛이 감돌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서울에 하도 불빛이 밝아서 그렇다고 하는데 어쨌든 그날 저녁의 밝은 하늘 자체도 나에게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금방 불이 들어오겠지라는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정전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전기가 없이는 그 시간에 사실상 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올 초엔가 읽은 '아침형인간'에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는 말을 하면서 논거로 제시한 것 중 하나가 인류가 해가 뜨고 지는 것에 맞추어져있는 생체리듬을 거스르면서 밤늦게까지 자지 않는 생활을 한 것이 사실 채 100년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그날 정전이 되고나니 그 말이 정말 실감이 났다. 불과 100년전, 아니 50년전만 해도 이 시간에 사람들은 모두 자고 있지 않았을까? 내가 전기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시각 이후의 시간을 과연 100년전 사람들이 수면을 취한 것보다 더 값지게 보내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또 한가지. 정전이 되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자 나는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할 수 없어 무척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막상 전기가 들어온다고 해도 특별히 볼 것이나 할 것도 없으면서.

그리고 약 1시간 후에 전기는 돌아왔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해가 지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주무셨을 시간에 전기로 불을 밝히고 안도감을 느끼며 또 무엇인가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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