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본관엔 기자실 없나? 왜 보도를 못하지?
한겨레|기사입력 2007-11-01 22:09 |최종수정2007-11-02 08:00
[한겨레]
‘해도 해도 너무 한다.’
한국기자협회가 한국 신문을 뼈아프게 질책했다. 기자협회는 정부의 브리핑룸 통폐합에 대해 ‘언론자유 침해’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언론사들이 ‘삼성 비자금’ 앞에서 '꼬리 내린 강아지'이자 ‘배부른 돼지’ 꼴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지난 10월29일,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의 “내 계좌에 삼성 비자금 50억 있었다”는 양심고백을 기자회견을 열어 전달했다. 사제단은 상세한 보도자료와 함께 김 변호사가 공개한 자신 명의의 차명계좌 4개 거래내역 사본을 공개했다.
한국사회의 대표적 양심세력인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한국사회 최대 권력이라는 ‘삼성그룹’의 비자금 조성과 관리 의혹에 대해 본격 고발을 하고 나선 것이다. 이튿날 모든 신문의 머릿기사가 될 뉴스였지만, 한국 대다수 신문은 ‘침묵’했다.
29일 석간과 30일치 전국 단위 일간신문에 실린 관련 기사는 모두 26건이었다. <한겨레>가 12건이고 <문화일보>가 2건, 나머지 조중동과 <매경>·<한경>을 비롯해 12개 일간지들은 모두 1건씩이었다. <머니투데이> 등 4개 경제지들은 관련기사를 1건도 싣지 않았다.
‘삼성 비자금’ 보도에 침묵한 언론에 누리꾼 “검색어 순위 올리기 합시다” 제안
<미디어오늘>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를 다룬 기사의 총면적은 <한겨레>가 6918.5㎠, 조중동이 각각 191.5㎠, 148.5㎠, 218.8㎠였다. ‘판도라의 상자’ 뚜껑이 열린 ‘삼성 비자금’ 뉴스는 김용철 변호사와 사제단을 통해 계속 쏟아졌다.
“금융실명제, 막강 재벌 앞에선 ‘허수아비’”“삼성, 검찰간부 40여명에 연 10억원 떡값” “‘삼성 떡값 리스트’에 현직 판사·대법관도 포함”
그러나, 한국 신문 대다수는 30일치의 1단~2단 기사로 ‘끝’이었다. 국민을 대리한 ‘알 권리’를 그토록 금과옥조로 내세우던, 보수언론들은 이후로 ‘침묵’을 이어갔다.
누리꾼들이 이를 못참고 행동에 나섰다.
한 블로거(arexi.egloos.com)는 “검색어순위 올리기합시다! 이 기사를 읽고 뭔가 분노가 느껴지시면 각 포탈에 가서 삼성, 삼성 차명계좌, 김용철 등 관련 검색어를 넣어주세요!”라며, 신문이 무시하는 삼성 비자금 사건을 이슈화하자는 제안을 했다.
<오마이뉴스> “신정아 누드가 알권리라던 신문의 서비스 정신은 어디 갔나?”
<미디어오늘> 편집국장을 지낸 백병규 미디어평론가는 지난 30일 <오마이뉴스>에 ‘백병규의 미디어워치’를 통해, 그동안 알권리와 언론자유 수호를 외쳐온 언론인들을 비판했다.
백병규씨는 “정부의 기사송고실 통폐합 조치 등에 대해 언론탄압이라며 한국언론사상 두 번째로 모임을 갖고 '언론자유 수호'를 외쳤던 신문·방송 편집국장과 보도국장들은 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국민의 알권리와 언론자유를 그렇게 외친 분들이 어떻게 신문을 이렇게 편집하고 방송 보도를 이렇게 편성할 수 있을까”라며 “신정아의 '누드'까지도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서비스했던 그 신문의 서비스 정신은 도대체 어디로 출장 나갔나”라고 질타했다.
백씨는 “정부의 기사송고실 통폐합에 맞서 투쟁까지 불사하던 기자들은 어디에 가 있는가”라며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언론의 자유를 위해 기자들이 떨쳐 일어나야 할 일이 아닌가. 지금 언론자유를 위해 탄핵할 자들은 누구인가”라고 되물었다.
‘삼성 비자금’에 대해 ‘침묵보도’하는 신문들의 행태에 주요 언론단체들은 마침내 자신들을 질타하고, 동료들에게 자성을 촉구하는 성명을 잇따라 발표했다.
언론노조 “언론은 ‘삼성 가족’을 자처하는가?” 취재·보도 촉구 성명
언론노조는 10월31일 ‘언론은 “삼성 가족”을 자처하는가?’ 라는 성명을 내어 “모든 언론사와 언론인들이 즉각 삼성 비자금 조성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취재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언론노조는 성명에서 “정치권력을 향해선 막말까지 쏟아내며 비장한 비판자 행세를 해온 언론들이 재벌 삼성을 향해선 입을 쏙 닫아버린 처사를 국민은 이해하지 못한다”며 “국민의 알권리 충족과 권력 감시를 위해 정부의 취재 지원 개선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던 대한민국 언론의 사명감이 고작 이 수준이었단 말인가”고 지적했다.
기자협회도 이날 성명을 내어, 한국 언론이 ‘배부른 돼지’가 되지 말고 ‘배고픈 소크라테스’ 되어야 한다고 동료 기자들에게 촉구했다.
기자협회 “회원 동지들에게 호소한다. 이번 사건은 크게 보도해야 한다”
기자협회는 “회원 동지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한다. 이번 사건은 크게 보도해야 한다. 그것이 언론의 기본”이라며 “지금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기 위한 용기가 필요한 때다. 그것만이 바닥을 모른 채 추락하는 한국 저널리즘의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회복하는 길”이라고 밝혔다.
일부 누리꾼들은 조중동을 비롯한 대다수 신문들이 삼성 비자금에 대해 축소보도하고 침묵하는 상황을 ‘기자실’이 없어 국민 알권리가 위협받는다고 주장해온, ‘기자실 방어논리’를 되돌려줬다.
“삼성 본관에 기자실 만들어주면 되겠네요”(독자)
이 블로거는 잘못 알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삼성 본관에는 ‘훌륭한’ 기자실이 있어왔다. 언론이 삼성 본관에 기자실이 없는 까닭에, ‘삼성 비자금’ 기사를 못쓴 것은 아니었다.
아래는 기자협회의 31일 성명이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기자협회 성명] 삼성 비자금 사건 제대로 보도해야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자본주의, 아니 어떤 사회체제에 살더라도 이 말은 거역할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진실은 반쪽이다. 온전한 진실이었다면, “배 부른 돼지보다는 배 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다”는 말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삼성그룹의 핵심인 구조조정본부에서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이 내 이름으로 돼 있던 50억원 규모의 비자금 계좌를 운용했다”고 폭로하고 나섰다. <한겨레> <한겨레21> <시사인> 등 일부 일간지와 시사주간지들이 이 사안을 ‘크게’ 보도했다. 방송을 포함한 나머지 언론들은 ‘작게’ 보도했다. 아니, 언론계 표현을 빌리면 구석에 처박았다.
‘삼성 불법 비자금 계좌 사건’을 크게 보도한 일부 언론사를 한국 저널리즘의 양심을 대변하는 언론으로 추켜올리자는 게 아니다. 이들 언론 역시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진실로부터 벗어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경제권력’에 대한 비판 보도는 거의 모든 언론이 외면하고 싶은, 보통의 경우엔 종종 외면해왔던 영역이다. 다만, 이번 사안의 경우 몇몇 언론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제약을 넘어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최소한,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언론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을 지켰다는 얘기다.
대다수 언론들의 보도행태는 언론학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의도적 무시’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대다수 언론의 보도행태가 갖는 심각성을 드러내기엔 너무 점잖다.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말 정도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정부의 브리핑룸 통폐합 조처에 대해 ‘언론자유 침해’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몇몇 언론사들은 ‘경제권력’ 앞에서는 꼬리 내린 강아지 꼴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 불법 비자금 계좌 사건은 ‘세게’ 취재하고 ‘크게’ 보도해야 한다. 드러난 액수만도 50억원이다. 계좌가 개설된 우리은행과 삼성이 ‘공모’했을 정황도 엿보인다. 2003년 흐지부지된 대선자금 수사 때 삼성의 검찰 로비 실상의 일단도 드러났다. 2003년 삼성이 야당 대선후보에 건넨 돈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개인 돈만이 아니라 비자금 계좌에서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회원 동지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한다. 이번 사건은 크게 보도해야 한다. 그것이 언론의 기본이다. 지금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기 위한 용기가 필요한 때다. 그것만이 바닥을 모른 채 추락하는 한국 저널리즘의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회복하는 길이다.
2007년 10월 31일 한 국 기 자 협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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