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격투기의 광팬은 아니지만, K-1이나 프라이드에 유명한 선수들이 나올 때는 시간만 허락하면 꼭 보는 편이다.


이번에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최홍만이 나오는 K-1 2007 월드 그랑프리를 한다는 것을 알고, 마침 주말에 할 일이 많은 마눌님에게 비자발적인 자유시간을 얻어 K-1 그랑프리를 모두 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제9경기까지 있고, 1경기 시작하기 전에 선수들의 최근 경기모습까지 해서 거의 5시간 가량을 텔레비전 앞에 있었는데 정말 오래간만에 스포츠의 짜릿함을 느낀 하루였다. 마님에게는 좀 미안하긴 했지만...


1경기부터 4경기까지는 사실 그렇게 유명한 선수가 나오지는 않았다. 1경기에서의 시릴 아비디는 전성기는 지났지만 예전 제롬 르 밴너와의 혈투나 악동 이미지가 있어 오랜만에 보아 반가웠다. 상대는 무명에 가까운 일본의 노다 미츠구였는데 예상과 달리 노다 미츠구가 시종일관 불도저처럼 밀어붙여 전성기는 지났지만 노련한 시릴 아비디를 3대0 판정승으로 이겨버렸다. 맞으면서도 피하지 않고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스모선수 출신이라는 노다 미츠구의 투지가 인상적이었다.


2경기는 이름을 고칸(일본말로 강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에서 구칸으로 바꾼 구칸 사키와 아마다 히로미의 경기였는데 우락부락하게 생긴 터프한 이미지의 아마다 히로미가 구칸 사키의 로우킥에 일방적으로 당해 2라운드가 끝나고는 경기를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구칸 사키의 강력한 로우킥이 들어갈 때마다 경기장에 울려퍼지는 철썩 소리와 시간이 지날수록 검붉게 물들어가는 아마다 히로미의 넓적 다리가 기억에 남는다. 그런 로우킥을 맞는다는 것은...그냥 맞을 일이 없기만을 빈다.


3경기와 4경기는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꽤 잘 생기고 체격도 좋지만 실력은 아직 별로인 호리 히라쿠가 알렉산더 뭐시기 ^^;; 하는 선수에게 싱겁게 KO로 패해버렸고 역시 체격 좋고 인상도 강렬하지만 실력은 별로 신통치 않은 나카사카 츠요시 역시 시종일관 무기력한 경기를 하다가 킥복싱의 강자라는 자빗 사메도프에게 판정패해 버렸다.


5경기는 정말 예상밖의 경기였다. 무관의 제왕인 제롬 르 밴너와 그날 경기중 가장 미스매치라고 생각되는 사와야시키 준이치와의 경기였다. 사와야시키 준이치는 K1경험도 별로 없고 체격도 밴너와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해설자들도 최근 전적이 좋지 않은 밴너를 위한 워밍업 경기라는 말까지 했는데...철저하게 아웃복싱을 하며 거의 도망치듯 경기하는 사와야시키 준이치를 잡는데 밴너가 애를 먹었고 그러다가 1회에 펀치를 맞아 다운을 당하고 말았다. 해설자도, 나를 포함한 시청자들도 놀랐다. 밴너가 저런 애송이에게 다운을 당하다니...그런데 그것은 이변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계속 도망만 치는 경기진행으로 2번이나 경고를 받은 사와야시키 준이치는 3라운드에서 한번 기회를 잡아 몇 번의 연타를 날린 끝에 그 듬직한 밴너를 다시 한번 다운시킨다. 소극적인 경기진행과 그로인한 두 번의 경고만으로는 판정에서 도저히 이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결과는 밴너의 판정패. 믿기지도 않고 믿고 싶지도 않은 경기결과였지만, 역시 스포츠는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축구로 친다면 우리나라가 브라질을 이긴 것보다 더할 것 같은 이변이 그날 K1에서도 나오고 말았다. 시종일관 도망치는 경기운영으로 짜증나게 하긴 했지만 사와야시키 준이치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긴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도 많이 준비하고 밴너를 다운시킬 만한 그 무언가를 갖추고 있는 선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망신을 당한 밴너가 빨리 예전의 강렬한 포스를 되찾았으면 한다.


6경기는 최홍만과 마이티 모의 경기였다. 대부분 최홍만의 낙승을 예상했지만 결과는 최홍만의 첫 KO 패였다. 마이티 모는 오른손 훅으로 최홍만을 잡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것 같았고 상대적으로 최홍만의 잽이나 움직임은 예전만 못해보였다. 1라운드에서 최홍만은 느슨하게 플레이하다가 오른손 훅을 정통으로 맞고 만다. 그때 최홍만은 별것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보는 이로서는 조금씩 불안하기 시작했다. 30센치가 넘는 신장차이에도 불구하고 턱부위에 정확한 훅을 날릴 수도 있구나. 더구나 마이티 모의 펀치력은 K1을 통틀어 최고수준이다. 그리고 결국 2라운드에 최홍만이 어설픈 펀치를 날리느라 상체가 숙여진 순간을 노리고 있던 마이티 모는 번개같은 오른손 훅을 날려 거인 최홍만을 한방에 눕혀 버렸다. 정말 벌침을 쏘듯 순식간에 마이티 모의 주먹이 최홍만의 턱에 작렬했고 최홍만은 그 한방에 링에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최홍만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이번 경기가 최홍만에게 더욱 진지한 마음가짐과 약점에 대해 대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마이티 모의 한방에 넘어가는 골리앗 최홍만


7경기는 초신성 루슬란 카라예프와 바다하리의 경기였다. 루슬란이야 워낙 유명하니까 잘 알고 있었지만 이슬람 계통의 바다하리는 처음 보았다. 큰 신장과 날카로운 눈매가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는데 결국 K1 역사에 길이남을 명경기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공이 울리자마자 두 선수는 정말 스피디한 난타전을 선보였는데 한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하고 재미있는 경기였다. 두 선수 모두 스피드가 빠르고 기본기가 좋았는데 화려한 난타전을 계속하던 중 루슬란의 펀치에 바다하리가 결국 다운되고 만다. 그런데 역시 루슬란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순간 루슬란이 바로 KO 되고 말았다. 다운 이후 다시 맞붙자마자 바다하리가 정확한 오른손 카운터 펀치를 루슬란에게 먹였기 때문이었다. 해설자 말대로 정말 영화와 같은 장면으로, 그리고 정말 드라마틱하게 루슬란은 KO 되었고 바다하리는 새로 신설된 100킬로 이하의 헤비급 챔피언 도전권을 갖게 되었다. 다음 경기에서 무사시를 꺾은 후지모토 유스케와 경기를 할 예정인데 후지모토 유스케를 좋아하고 나름대로 그를 높이 평가하긴 하지만 이처럼 스피드 있고 실력이 뛰어난 바다하리의 상대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루슬란에 카운터 펀치를 작렬시키는 바다하리


마지막 경기인 레이세포와 세미 슐트와의 경기도 정말 극적이었다. 지난번 맞붙었을 때 거의 일방적으로 난타당하다가 간신히 KO패를 면한 레이세포였기에 레이세포의 승리를 바라면서도 사실 많이 걱정이 되었다. 일방적으로 맞다가 끝나지 않을까하고. 하지만 1라운드에서 레이세포는 적극적으로 파고드는 경기운영으로 그 단단하고 쓰러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세미 슐트를 다운시켰다. 레이세포의 펀치로 세미 슐트가 다운 되었을 때 얼마나 짜릿했던지...박수를 치며 환호하여 마님이 뭔 일 있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야, 이런 맛에 스포츠를 보는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레이세포 역시 정말 허무해 보일정도로 세미 슐트의 레프트 잽에 실신 KO를 당해버리고 말았다. 참...스포츠란.

 


무적 세미슐트를 다운시킨 레이세포. 이때까진 정말 좋았는데..

 

거의 5시간 동안 K1을 보면서 정말 오래간만에 스포츠의 짜릿함을 느껴보았다. WBC에서 이승엽이 홈런을 날릴 때의 그런 짜릿함 비슷한 감정을 말이다. 그리고, 격투기 선수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전문적으로 단련된 선수들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보다 40킬로나 더 나가고 30센치 이상 큰 최홍만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고 KO를 따낸 마이티 모나 역시 경기는 패했지만 30센치 이상 차이나는 세미슐트를 링위에 눕게 한 레이세포를 생각하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10센치만 큰 상대와 마주하더라도 일단 주눅부터 들 것 같은데 30센치도 더 큰 상대와 맞서 결정적 순간에 상대를 쓰러뜨리다니...


맞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하며 펀치를 날리고 자신보다 강해보이는 상대 앞에서도 당당히 맞서며 상대를 눕혀 버리는 그 정신력과 강인함...직업으로서 개인적으로 그리 좋은 직업 같지는 않지만 격투기 선수들에게는 남자의 로망이랄까, 뭐 그런 것을 자극시키는 그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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