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줄 잇는 낙하산 인사
정치인-퇴직관료 ‘공기업’ 낙하전문가
2월이면 인사의 계절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해마다 인사철이면 그 어느 곳보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핫 포인트가 있다. 공기업 CEO 자리이다. 전임자가 물러난 자리에 자천타천 수많은 응모자들이 한판 세 대결을 벌인다. 낙하산 인사 논쟁이 벌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수많은 공기업들이 인사 몸살을 앓고 있다. 비단 공기업뿐 아니라 인사결정권이 청와대나 정부부처에 속해 있는 준 공공기관들도 마찬가지다. 후보추천위원회의 철통 보완에도 불구하고 2파전, 3파전 얘기가 새나오고, 누구는 누구를 밀고 누구는 눈 밖에 났다는 입소문도 쉽게 퍼진다.
실상 낙하산 인사는 우리만의 고유 현상은 아니다. 동서고금에 두루 통용된 세계사적 관습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미국에는 ‘회전문(revolving door)인사’가, 일본에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뜻의 ‘아마쿠다리(天下り)’ 가 있다. 프랑스의 ‘파라쉬타주(parachutage)’도 같은 의미다. 과거 고려와 조선사에는 부조의 음덕에 의지해 그 자손을 관리로 서용하는 음서제도가 있었다.
전문 분야에 대한 소양과 식견없이 추천서 하나만으로도 위풍당당할 수 있는 힘, 낙하산 인사의 정체는 커튼 뒤에 가려진 특권이다.
과거 신분 사회나 철권통치 사회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효율과 합리가 일반화된 21세기에 와서도 이같은 능력불문 프리패스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인간이 조직과 집단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낙하산 인사는 어찌보면 ‘사회의 필요악’일지도 모른다.
올바르진 않지만 인정하고 넘어가야 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암묵적 동의’인 셈이다.
선진 외국에서는 최근 사회 필요악과 암묵적 동의의 산물인 낙하산 인사를 개선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사회의 실질적인 권한을 강화해 낙하산 인사 그 자체보다는 낙하산이 점찍은 인물의 됨됨이를 먼저 살피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낙하산 인사의 현 주소는 어떨까.
낙하산 인사의 주력부대라 할 수 있는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의 인사 행태에서 실상의 일단을 들여다 볼 수 있겠다. 역대정권에서는 고위 공무원의 재취업에 대해 이런 말들을 해왔다.
“고인물은 썩는 게 원칙이다. 고인물 대신 새물이 많이 흘러들어야 한다.(김영삼 전 대통령)”, “개혁ㆍ전문성을 갖춘 인사가 공기업 사장이 될 수 있도록 인력 풀을 만들겠다(김대중 전 대통령)”, “누구를 찍어서 내려 보내는 식의 ‘낙하산 인사’는 하지 않겠다(김진표 전 경제부총리)” 하지만 이 말들의 성찬은 무기력한 화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문민정부하에서는 퇴직자 307명 가운데 220명이 다시 취업해 재취업률 71.7%를 기록했다. 국민의정부에서도 퇴직자 783명 가운데 521명이 다시 일자리를 찾았다. 재취업률 66.5%다. 참여정부에서는 초창기 2년동안 퇴직자 334명 가운데 212명이 취업에 성공해 재취업률이 63.5%에 달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재취업률이 조금씩 낮아졌지만, 공복으로 지내다 다시 정부기관으로 되돌아간 ‘낙하산인사’ 비율은 오히려 그 반대다. 문민정부 50.0%, 국민의정부 50.1%, 참여정부 들어서는 그 비율이 53.3%까지 높아졌다.
‘공직자는 퇴직일로부터 2년간 퇴직 전 3년 이내에 소속했던 부서 업무와 관련있는 사기업체 또는 협회에 취업할 수 없다.’는 공직자윤리법의 인사 규정이 무색할 정도다.
정치인 출신 인사들의 행태도 이와 다르지 않다.
기획예산처가 분류한 7대 대규모 공공기관의 감사 자리를 살펴보면, 그 실상이 두드러진다. (감사는 권한에 비해 책임이 적고 억대연봉은 기본이어서 세간에 사장보다 더 좋은 직책으로 소문나 있다.) 농촌공사 박병용 감사와 주택공사 성백영 감사는 17대 총선에 출마했던 정치인이다. 전력공사 곽진업 감사는 17대 총선 후보경선에 뛰어든 경험이 있고, 도로공사 이상익 감사는 열린우리당 중앙위원, 철도공사 안호성 감사는 열린우리당 삼척시당원협의회 위원장, 토지공사 최교진 감사는 열린우리당 대전시 창당준비위 상임위원을 역임한 인물이다.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을 역임한 배석범 가스공사 감사를 제외한 나머지 6명 모두가 여당 인맥이다. “누구를 점 찍어서 내려 보내지는 않겠다”던 정부에서 이런 우연한 현상이 쉼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공기업 사장들을 출신별로 가려봐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국내 비금융 공기업 27개 가운데 80%이상인 22개사의 사장이 고위 공무원 아니면 정치인 출신들이다.
해당공사 출신으로 사장까지 오른 내부 승진 사례는 김재현 토지공사 사장이 유일하고, 민간 채용 케이스도 이수호 가스공사 사장, 이재희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 황두열 석유공사 사장, 지난 1월 사표를 낸 한행수 주택공사 사장 등 4명 뿐이다.
철도공사와 석탄공사, 조폐공사 등 6개 공사의 사장은 정치인 출신, 나머지 전력공사, 도로공사, 수자원공사 등 16개 공사의 사장은 관료 출신이다. 서구 선진국들이 낙하산인사의 득(누구에게 득인지는 여전히 모호하다)과 실에 대한 균형점 찾기에 골몰하고 있지만, 우리사회의 낙하산은 좀처럼 펼쳐 든 날개를 접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공기업의 도덕적 해이가 많은 지적을 받고 있다(한명숙 국무총리)”, “능력이 부족하면 공공기관 임원으로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겠다(장병완 기획예산처 장관)”, “공공부문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전윤철 감사원장)” 해마다 되풀이 되는 고위 공직자들의 자기 반성에도 불구하고, 왜 공공기관은 달라지지 않는 것일까. 사회학자들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해묵은 정치잡담 속에 답이 있다고들 한다. 뿌리깊은 인정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인정주의는 이중적 잣대와 자기 합리화의 근원병이다. 그래서 제 스스로는 치료약을 구하기 어렵다. 이런 가운데 행정자치부는 오는 4월부터 ‘공공기관 운영법’을 발효하고, 금융감독위원회는 ‘은행 지배구조 개선작업’에 착수해 낙하산 인사에 대한 최소한의 잠금장치를 마련키로 했다.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그러나 사문화되고 있는 ‘공직자 윤리법’의 취업제한 조항에서 보듯, 법ㆍ제도를 갖추는 것만으로는 낙하산 인사의 폐해를 해소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제도 이전에 인사권이 있는 고위인사들의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양춘병 기자/yang@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