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2
켄 키지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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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작동 방식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끊임없는 구별과 길들이기의 교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대사회에 적응한 정상적인 소시민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은, 해체해서 따지고 들면, 결국 딛고 사는 거대한 세계가 선사하는 구별의 경계선에서 운 좋게도 바깥이 아니라 안쪽을 점유했다는 것이며, 동시에 세계가 길들이는 방식에 놀라울 정도로 순응하며 살아낸 결과다.

 

이것이 켄 키지가 바라보는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구별, 존재와 비존재로써의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그의 세계관을 집약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곳은 어쩌면 정신병동일 수 밖에 없다. 소설가는 환자를 '미쳤다'고 진단하고 '비정상'이라고 단정하는 대신, '다르다'고 보며, 그들에 의해 '낙인찍혔다'고 간주한다.

 

실제로는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지만, 청각 장애인으로 치부된 브롬든은 인디언의 후손으로, 이 소설의 화자다. 그는 이 세상을 거대한 콤바인으로 이해하면서, 콤바인의 주된 기계적인 작동 원리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환자로 병동에 갇혀 있으며, 콤바인에 맞추어 길들여가는 것을, 그들은 치료라고 인식한다고 이해한다. 콤바인의 실질적인 권력자는 랫치드 수간호사로, 그는 의사의 치료 방향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가는가 하면, 누가 전기치료와 뇌전두엽 절제술을 받을 것인지 결정적으로 증언하는 매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끊임없는 통제를 생산해낸다. 병동의 가장 오래된 권력자 랫치드 수간호사 아래서 환자들은 웃음을 잃어버리고, 병동의 규칙에 순응하면서, 모두가 점차 상태가 악화되어간다.

 

그러던 어느날 작업 농장에서 싸웠다는 이유로 법정에 섰다가 정신병으로 판결 받은 맥머피가 병동에 입원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는 입원한 첫날부터 체온 측정을 거부하는가 하면, 병동의 집단 치료 과정을 힐난한다. 랫치드 수간호사와 교묘하게 대립하면서, TV 시청권을 연장하는가 하면, 여자들까지 끌어들이고, 의사까지 설득해 환자들을 데리고 합법적인 바다 낚시를 감행한다. 이에 맞서는 랫치드 수간호사는 다양하는 방법을 구사하는 데, 가령 맥머피가 단순하게 호의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돈을 따내며 자신의 이득을 구가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제공하해 환자들을 분열시킨다. 거기에 환자들이 동요하면서 한때 고립되기도 하지만, 맥머피는 특유의 돌파력으로 분위기를 전환한다.

 

바다낚시에 다녀온 환자들을 소독한다는 명분으로 병동은 소란해지고, 이 과정에서 브롬든과 맥머피는 보조원들과의 몸싸움에 연루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져 전기치료까지 받지만, 맥머피는 좀처럼 굽힐 줄 모른다. 맥머피의 끊임없는 저항은 조금씩 환자들을 변화시키고, 브롬든 역시 스스로 자신이 커지면서 힘이 생겼다는 느낌이 든다. 이후 맥머피는 여자들을 병동까지 끌어들여 파티를 하게 되고, 술과 감기약에 취한 채 다음 날 발각되는 바람에 랫치드 수간호사에게 일격을 당하면서, 마침내 맥머피는 뇌전두엽 절제술을 받아 식물인간 상태로 병실로 돌아오게 된다.

 

브롬든은 맥머피가, 랫치드 수간호사를 필두로 한 콤바인에게 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후의 수단을 강구하고, 맥머피가 가르쳐준 대로 최대한 힘을 모아 제어반을 뜯어낸 후 병동을 탈출한다.

 

소설가는 우리의 존재 방식은 '저항'이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자신답지 못하게 살도록 제어하고 통제하는, 기계 같은 세상의 단단하고 교묘한 외관에 겁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권력의 중심에 균열을 내는 것은 콤바인에 동조하지 않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는 그것. 그것이 최고의 힘이며 무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뚜렷한 주제의식 뿐만 아니라, 세밀하게 교차되는 다양한 감정선에 대한 묘사 또한 압권이다. 특히 브롬든이 전기치료를 받으면서 기억해낸 인디언 세계의 와해와 콤바인의 침습은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영화로도 훌륭하지만, 독서를 통해 소설가의 독특한 문체를 읽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다른 환자들도 맥머피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하딩은 수습 간호사를 보기만 하면 치근덕거리고, 빌리 비빗은 ‘관찰‘이라는 명목으로 타인에 대한 중상을 일지에 적는 일을 완전히 중지했다.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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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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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매우 도발적인 시와 함께 시작된다 ' 오오, 나는 글쟁이들에게 정말 질려버렸다. 유익하고 즐겁고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은 도무지 쓰려 들지 않고 땅속에 숨겨진 온갖 더러운 비밀만 캐고 있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아름다운 연애 소설로 부흥시키지 못하고, 가난의 섬세한 위계를 까발려 끝끝내 더러운 비밀을 고발하는 자신의 글을, 어떻게든  변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은 주인공 마까르 제부쉬낀과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가 주고 받은 편지를 통해 서사가 진행된다. 관청에서 서류를 정서하는 제부쉬낀은 돈이 없어 부엌 한쪽 칸막이 방으로 쫓겨갔으면서도 돈이 아니라 편안함 때문에 선택한 것이라고 둘러댄다. 게다가 자신은 강인한 기질과 확고부동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서 매우 궁색한 형편에도 한 참 어린 연인에게 사탕까지 보낼 정도로, 가난을 인정하는 대신 온갖 변명을 끌어대서라도 가난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는 부모님을 여의고, 첫사랑이었던 뽀끄로프스키까지 질병으로 잃게 된다. 그녀는 가난하지만 책의 무게로 휘어버린 뽀끄로프스키의 선반을 바라보면서 아는 것도 없고 책을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다며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삯바느질을 통해  뽀끄로프스키에게 푸쉬킨 전집을 사줄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다.

 

제부쉬낀과 알렉세예브나의 편지는 서로 엇갈리면서 이들이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지 종종 드러내는데, 고르쉬꼬프의 아이가 성홍열로 죽은 삽화가 한 예가 될 것 같다. 제부쉬낀은 아이의 죽음 을 마주한 가난한 가족의 아픔을 전달하지만, 놀랍게도 알렉세예브나의 답장은 그가 전에 보낸 삼류 문학에 대한 경멸이 담겨져 있다.

 

제부쉬낀은 문학에 대한 소양을 갈망하면서 짐짓 문학 비평 모임에도 참석하지만 꾸어 놓은 보릿자루처럼 바보같이 앉아 있을 뿐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단지 그럴듯해 보이는 비평 모임의 주도자 라따자예프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근거해 그가 소개하고 언급하는 작품을 문학적 작품의 기준으로 투영한다. 그러면서 알렉세예브나가 권한 문학 작품들은 자신의 마음을 사람들 앞에서 그대로 뒤집어 보이는 것 같고, 자신도 모르고 지나쳤던 일을 기억나게 하고, 내막을 알게 한다고 답신하면서, 가령 <외투>는 가난을 모욕했을 뿐 아니라 매일 되풀이되는 시시하고 공허한 단면만 썼을 뿐 실제로 외투 하나 장만해줄 것도 아니냐며 혹평을 한다.

 

제부쉬낀은 문학적 소양도 부족하고, 현실감각도 부족하지만, 작가는 그를 통해 가난에 대한 특유의 통찰력을 내보인다. 작가들이 무엇이라고 적든, 가난은 커다란 부끄러움도 없이 벗겨지고 성스러운 것도 자존심도 그 무엇도 없이 드러나며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 검열되지만, 작가들과 가난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 문학적으로 재구성되는 가난이, 가난한 현실을 뒤바꾸지 못하는 그 이중성을 포착해낸다.

 

그와 얽힌 여러 삽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중요한 서류를 망친 그가 각하에게 불려갔을 때, 때마침 떨어진 단추로 인해 불호령 대신, 다시 정서하라는 명령을 받고 1백 루블을 받는 부분이다. 작가는, 지옥의 유황불에서 건져진 인간의 심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자신의 가난과 죄과를 아랑곳 않고 각하를 찬양하는 데 들뜬 주인공의 문장을 통해, 가난으로부터의 구원, 죄로부터의 구원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한편 알렉세예브나는 지주 비꼬프의 청혼에 두려워하며 당장 자신에게 와달라고 부탁하지만, 제부쉬낀은 하숙집에서 가장 가난했던 고르쉬꼬프의 갑작스런 죽음을 알리는 데 지면을 할애한다. 사기로 얽힌 소송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뜻하지 않게 죽게 된 그는, 제부쉬낀이 돈을 빌려야했던 처지에 놓였을 때조차 그의 긍휼을 자극해 돈을 빌렸던 가장.

 

결국 알렉세예브나는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졌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며 지주 비꼬프와의 결혼을 택해 떠나고, 주름장식을 사주어 결혼을 택했다고 믿는 제부쉬낀은 주름장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나며 절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을 통해 정신적 풍요를 지향하던 알렉세예브나도 가난에 몰려 지주를 택하고, 물질뿐만 아니라 문학적 심미안도 빈한했던 제부쉬낀 역시 가난 때문에 연인을 떠나보낸다.

 

알렉세예브나와 제부쉬낀이 물질적으로 가난하더라도 동등한 수준의 문학적 감수성을 교류했더라면 결과가 달랐을까. 또 하나는 검증된 문학을 통해서 세상을 읽는 것이 아니라 비록 수준 낮은 것일지라도 자신의 관찰과 소신에 따라 현실을 판단하고, 신앙의 선열에 따라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며 주변 사람들을 연민으로 보듬은 주인공의 나레이션을, 통찰력이 결여된 비현실적인 인식이라며 가볍게 치부할 수 있을까. 더불어 문학적 고양이 과연 현실에서 갖는 실질적인 힘은 무엇인가. 작가는 해답이 아니라, 과제를 내준 것만 같다.

그곳엔 지금 나뭇잎도 다 떨어지고 비가 내리고 추울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런 곳으로 가신다고요! 비꼬프 씨한테는 일이라도 있죠. 토끼 쫓는 일이오. 하지만 당신은 무엇을 하시렵니까? 당신은 지주의 아내가 되고 싶었던 겁니까! 하지만, 나의 천사여! 자신을 한 번 바라보세요. 당신이 지주의 아내를 닮았다고 생각합니까?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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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젠더 수업 창비청소년문고 27
김고연주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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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가 개념화되고 그 필요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면서, 청소년이 성의식을 갖는데도 일종의 교과서격인 가이드가 필요할텐데,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그 요구에 충실하게 부응하고 있다.

 

사회문화가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혼선과 혼돈의 물결이 범람하는 가운데, 젠더교육이 지향하는 철학은 물론 알아야할 내용도 쉽게 서술해 가독성이 좋다.

 

저자는 여자와 남자는 얼마나 다를까, 다이어트에서 내 몸을 지켜 줘, 사랑은 언제나 낭만적일까, 모성은 위대하다 우리 엄마만 빼고, 누가 왜 무슨 일을 해야할까, 우리 가족은 팀워크가 필요해, 혐오의 말은 그만 모두가 나답게, 로 소주제를 열거하고, 각 장마다 그동안 우리가 지녔던 편견, 고정관념을 깨는 데 집중한다. 중간에 제시되는 연구 결과나 사회적 삽화들은 이해력을 높이는 데 일조한다.

 

남녀의 성은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며, 복잡한 미의 기준에도 불구하고 상품화되고 획일화되는 미적 욕망 속에서 씨름하는 몸의 문제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역사와 시대에 따른 사랑의 담론과 연애 각본에 따른 사랑은 청소년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신선하다. 본능적 모성의 강조가 가져오는 폐해나, 남녀 역할 구분이 아니라 남녀 협업이 필요한 가족공동체의 삶, 젠더박스를 넘어서는 나다움 등은 각성하도록 도전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다만, 독자 입장에서 욕심을 내자면, 젠더의 관점을 넘어서는 성의식도 일부분 소개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가령 생물학적인 관점이나, 융처럼 남녀가 다르다고 주장하는 심리학적 관점도 대조함으로써 젠더 이상의 그 너머를 종합하는 부분이 할애되었더라면 뭔가 성의식의 지평이 더 넓어지지 않을까. 또 젠더의 탄생이 필요했던 역사적, 사회적 맥락도 짧게나마 언급되었더라면 왜 청소년의 성의식 구성에 있어서 젠더가 강조될 필요성이 있는지 스스로 판단하고 더 탐구하도록 자극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때때로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은 불편함, 또는 다른 옷을 입고 싶은 답답함을 느낄 거예요. 그런 불편함과 답답함을 억지로 모른 척하지는 마세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진짜 자기 모습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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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인생론 범우고전선 14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최현 옮김 / 범우사 / 199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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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와 위안, 행복과 긍정이 넘쳐나는 시대야말로, 쇼펜하우어의 직설적인 일갈 앞에 전면으로 마주서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알콩달콩 확실한 즐거움을 찾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다고 자위할 때, 벼락같은 호통으로 우리의 삶은 단지 맹목적인 생의 의지가 확장된 구현의 한 형태일 뿐이라는 철학자의 단언은, 사라져가는 통증마저 다시 명징하게 되살려낼만큼 예리하다.

 

쇼펜하우어의 인생관은 분명한데, 삶은 즐거움을 누리도록 우리에게 부여된 선물이 아니라 우리가 고역으로 갚아야할 의무나 과업으로 인식해야한다는 것이다. 파리가 태어나는 것은 거미에게 잡혀 먹히기 위해서이며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번뇌의 노예가 되기 위해서라고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면서, 인간이란 생의 의지가 맹목적으로 드러난 욕구 덩어리라고 명료하게 정의내린다.

 

인간의 삶이란 궁핍과 권태의 양극단을 오가는 것과 다름 없으며, 특히 행복과 불행이라는 것이 결국은 육체적인 쾌락과 고통을 근간으로 이루어지며, 동물처럼 간단하게 현재적 쾌락에 만족하지 못하다보니 쾌락을 추구한다면서 중독에 이르고, 필요 이상의 망상적 쾌락을 꿈꾸면서 야심, 명예 등을 쫓아 한 무더기의 권태를 부여받는다는 것. 압권은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사실상 행복하지 못하며, 누구나 거의 파선당해 항구로 돌아오면서 죽게 되는 마당에 이르면, 행복했던 일이든 불행했던 일이든 별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주장.

 

그는 결국 식욕과 성욕이 인생의 요란스런 소동의 기저를 이루는 두 축이며, 거기에 권태가 부수적으로 따를 뿐이라고 간결하게 정리한다.  사랑에 대해서도 다음 세대의 생산이라는, 생의 의지가 갖는 목적은 감추어져 있다보니, 인간은 사랑의 욕구 충족을 위해 자유 의지를 발현하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결국은 생의 의지에 따르는 무의식적 노예가 될 뿐이라고 지적한다.

 

평생 미혼이었던 철학자는 개보다도 여자에 대해 낮은 평가를 내리는데, 여자의 미덕은 우매하고 근시안적이어서 큰 어린아이와 같을 뿐이며 이성의 힘이 약해 남자보다 현재에 더 충실하다는 관찰을 덧붙인다. 흥미로운 점은 남편의 신분이나 간판을 내세우는 이유는, 여자들이 누구나 할 것없이 가사에 종사하고 있어 피차 비슷한 처지에 있다보니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어떤 남자의 사랑을 받고 있느냐 밖에는 차별점이 없다고 비꼬기도 한다. 위대한 철학자가 편견에 사로잡혀 주체적으로 독립된 여성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이러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우리의 죽음이 자연에는 아무런 타격을 주지 않는 점을 기억해야한다면서, 죽음으로 명멸하는 것은 형상일 뿐, 우리 속에 숨어서 끊임없이 작동하고 활동하는 의지 속에 우리가 다시 깃들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쇼펜하우어는 특히 음악을 찬양하는데, 단지 현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 자체를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극찬한다. 음악은 의지의 몸부림을 표현하는 것으로, 음악을 듣다보면 자신의 생애가 어떤 영원한 꿈이고 죽음은 이 꿈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고 고백한다.

 

쇼펜하우어의 위대함은, 아마도 고통의 의무로서 부과되었다는 삶의 의미를 견고히 파헤친 까닭일 것이다. 그는 불행과 궁핍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인식한다. 고통 속에 놓인 인간으로서 서로를 인식하게 되면, 인간은 설사 피해를 입힌 사람이 있더라도 오히려 동정하게 되며, 이 의식이 확장되면서 모든 생물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도 확대될 수 있다고 풀이한다. 특히 세계와 인생의 고통과 번뇌를 깨닫게 되면 오히려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나고 확고한 안식, 내적 명랑성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절망의 나락에 부딪히면서, 마침내 살려는 의지가 피워낸 모든 것이 허상임을 깨닫게 될 때 진정한 심적인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것.

 

일부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면도 있지만, 인생의 대전제를 역전시킴으로써 다시 딛고 일어서는 힘을 부여하는 매서운 훈계는, 쓴 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고통과 고뇌를 받아들이고, 한계를 긍정하며 명멸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현재에 충실하도록 하는 쓴 소리야말로,공허한 긍정, 들뜬 행복론을 끌어내리는, 진정한 격려와 힘이 되는 철학이 아닐까.

세계의 영: 여기 네가 고생을 달게 받아야 할 일이 있다. 너에게는 거기에 정력을 기울이는 것이 곧 생존하는 것이 된다. 다른 모든 생물도 그렇지만. 인간: 그런데 내가 대체 생존에서 무엇을 얻고 있단 말입니까? 생존을 요구하면 궁핍에 시달리고, 요구하지 않으면 권태에 사로잡힙니다. 나에게 이런 고역과 번뇌를 주면서 어찌하여 그 대가는 이처럼 보잘 것 없습니까?...중략..세계의 영: 나는 잘 알고 있다. (옆을 돌아보면서) 저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 줄까. 생존의 가치는 오직 그를 타일러 그 생존을 원치 않도록 하는 데 있다. 그가 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미리 생존 자체로부터 예비적인 단련을 받아야 한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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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에 훤해지는 역사 - 남경태의 48가지 역사 프리즘
남경태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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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책이 출간되고 있지만, 저자의 이름만으로도 독자에게 신뢰를 제공하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므로 다소 딱딱한 인문학의 껍질을 손수 벗겨내어 속살을 먹기 좋게 잘라 융숭하게 대접하는, 근사한 기술을 지닌 저자의 소중함은, 떠나간 자리를 더욱 짙은 그리움으로 물들게 한다. 둔탁한 책상에서 거대한 암기 덩어리들로 다가왔던 학창 시절의 역사를,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문화, 교양의 분야에 걸맞게 배치하고 의미화한 저자의 치열함 덕분에, 몸 편히 기대고 누워 평안한 독서로 역사의 가르침을 탐독할 수 있었다. 새삼 감사하다.

 

역사 시간에 우리의 혁명-항거는 왜 이렇게 족족 실패했는지, 관군 대신 백성들이 직접 나서 싸운 전쟁이 왜 이렇게 많았는지 답답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정치 분야부터 가려웠던 곳을 막힘 없이 긁어주는 시원함이 느껴졌다. 지배이념을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에게 내면화함으로써 통치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지배자의 권위를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적 의미로까지 확장시켰던 절대성의 철옹성이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고 할까. 삼권분립을 외치면서도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기보다는 행정부에 기대어 대통령을 왕처럼 인식하는 우리의 정치 의식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혈통 정치가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참화를 통해 북한의 세습정치, 재벌의 경영 세습 등이 갖는 불안정성, 중앙집권체제의 단일 소유권 독점이 갖는 강고함의 취약점, 불법 쿠테타 정권의 권력욕과 레임덕에 대한 분석도 신랄해서 기억에 남는다.

 

신항로 개척과  금융제도의 발달, 세금을 의무가 아니라 권리의 통로로 인식한 서양과,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한 동양 사회의 차이점, 계약과 신용에 대한 동서양 인식의 비교, 수탈을 당하면서도 충성을 다하게 한 이념의 배태가 낳은 권력지상 사회의 면모, 분열을 기반으로 성장하는 자본주의의 본질 등은 경제의 역사가 시사하는 바를 성실히 다루었다.

 

사회를 다루는 장에서는, 상식을 위해 싸운 미국 독립의 혁명 정신, 좌파와 우파의 기원과 공식화의 필요성, 대동단결의 위험성과 파시즘, 중화세계에서 꽃피우는 서열주의,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를 대하는 섬세한 전환에서 시작되는 강국의 면모, 상하 개념과 역할 배분 개념의 차이가 낳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제도가 아닌 문화를 개선해야 하는 이유 등을 거론하면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탐색한다.

 

국제 상황의 변모도 세심하게 다루고 있는데, 서양 문명이 외부로 진출한 방식, 역사 자체의 흐름 속에서 그 경로를 따르는 역사의 전개 방식, UN과 교황의 유사점, 중세 발명품의 운명, 새로운 프레임의 등장과 변혁, 기후변동과 역사, 국경에 대한 인식과 통일 문제, 미국이 강국이 된 이유, 사회주의 등장의 이론과 현실의 괴리 등도 흥미롭다.

 

융합 방식 및 충돌과 정복 방식의 동서양 문명 비교, 노마디즘과 정착민의 정신, 해외 진출의 상반된 방식과 그 결과, 달력과 주권, 중화주의에서 비껴난 일본의 독자적인 역사, 진리와 천리의 철학 비교, 고전의 해체와 독해, 심층을 바로보는 안목과 구조주의 인식, 사용가치-교환가치-기호가치의 개념, 신학과 과학의 분리, 종교의 첨단성, 예술과 상업성, 호모루덴스의 중요성은 문화를 형성한 역사의 근간을 또렷이 보여준다.

 

교육을 관통하는 역사의 프리즘은 대학입시와 과거제, 대학 등록금 문제, 아비투스와 교육, 소비자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 국사가 아닌 지역사여야 하는 이유 등을 살펴본다.

 

현재의 좌표로 밀어온 역사의 파도는 눈에 쉽게 보이지 않으므로 더더욱  인식하기 어려운데, 저자 덕분에 쉽게 파도 위를 올라타고 파고를 넘나든 느낌이 든다. 언제 또 어디서 저자처럼 쉽고 풍성한 이야기로 채근질하는 글들을 만날 수 있을까.

어느 나라나 사회에 관해 가장 절약적으로 알게 해주는 방법은 뭘까? 다시 말해 최소의 비용과 시간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게 해주는 지식은 뭘까? 바로 역사다...역사에는 생략이나 비약은 없어도 지름길은 있다. 단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어도 전체 과정에 소요되는 기간과 노력을 줄일 수는 있다. 우리에게 부족한 역사적 두께를 채우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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