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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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매우 도발적인 시와 함께 시작된다 ' 오오, 나는 글쟁이들에게 정말 질려버렸다. 유익하고 즐겁고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은 도무지 쓰려 들지 않고 땅속에 숨겨진 온갖 더러운 비밀만 캐고 있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아름다운 연애 소설로 부흥시키지 못하고, 가난의 섬세한 위계를 까발려 끝끝내 더러운 비밀을 고발하는 자신의 글을, 어떻게든  변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은 주인공 마까르 제부쉬낀과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가 주고 받은 편지를 통해 서사가 진행된다. 관청에서 서류를 정서하는 제부쉬낀은 돈이 없어 부엌 한쪽 칸막이 방으로 쫓겨갔으면서도 돈이 아니라 편안함 때문에 선택한 것이라고 둘러댄다. 게다가 자신은 강인한 기질과 확고부동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서 매우 궁색한 형편에도 한 참 어린 연인에게 사탕까지 보낼 정도로, 가난을 인정하는 대신 온갖 변명을 끌어대서라도 가난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는 부모님을 여의고, 첫사랑이었던 뽀끄로프스키까지 질병으로 잃게 된다. 그녀는 가난하지만 책의 무게로 휘어버린 뽀끄로프스키의 선반을 바라보면서 아는 것도 없고 책을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다며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삯바느질을 통해  뽀끄로프스키에게 푸쉬킨 전집을 사줄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다.

 

제부쉬낀과 알렉세예브나의 편지는 서로 엇갈리면서 이들이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지 종종 드러내는데, 고르쉬꼬프의 아이가 성홍열로 죽은 삽화가 한 예가 될 것 같다. 제부쉬낀은 아이의 죽음 을 마주한 가난한 가족의 아픔을 전달하지만, 놀랍게도 알렉세예브나의 답장은 그가 전에 보낸 삼류 문학에 대한 경멸이 담겨져 있다.

 

제부쉬낀은 문학에 대한 소양을 갈망하면서 짐짓 문학 비평 모임에도 참석하지만 꾸어 놓은 보릿자루처럼 바보같이 앉아 있을 뿐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단지 그럴듯해 보이는 비평 모임의 주도자 라따자예프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근거해 그가 소개하고 언급하는 작품을 문학적 작품의 기준으로 투영한다. 그러면서 알렉세예브나가 권한 문학 작품들은 자신의 마음을 사람들 앞에서 그대로 뒤집어 보이는 것 같고, 자신도 모르고 지나쳤던 일을 기억나게 하고, 내막을 알게 한다고 답신하면서, 가령 <외투>는 가난을 모욕했을 뿐 아니라 매일 되풀이되는 시시하고 공허한 단면만 썼을 뿐 실제로 외투 하나 장만해줄 것도 아니냐며 혹평을 한다.

 

제부쉬낀은 문학적 소양도 부족하고, 현실감각도 부족하지만, 작가는 그를 통해 가난에 대한 특유의 통찰력을 내보인다. 작가들이 무엇이라고 적든, 가난은 커다란 부끄러움도 없이 벗겨지고 성스러운 것도 자존심도 그 무엇도 없이 드러나며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 검열되지만, 작가들과 가난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 문학적으로 재구성되는 가난이, 가난한 현실을 뒤바꾸지 못하는 그 이중성을 포착해낸다.

 

그와 얽힌 여러 삽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중요한 서류를 망친 그가 각하에게 불려갔을 때, 때마침 떨어진 단추로 인해 불호령 대신, 다시 정서하라는 명령을 받고 1백 루블을 받는 부분이다. 작가는, 지옥의 유황불에서 건져진 인간의 심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자신의 가난과 죄과를 아랑곳 않고 각하를 찬양하는 데 들뜬 주인공의 문장을 통해, 가난으로부터의 구원, 죄로부터의 구원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한편 알렉세예브나는 지주 비꼬프의 청혼에 두려워하며 당장 자신에게 와달라고 부탁하지만, 제부쉬낀은 하숙집에서 가장 가난했던 고르쉬꼬프의 갑작스런 죽음을 알리는 데 지면을 할애한다. 사기로 얽힌 소송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뜻하지 않게 죽게 된 그는, 제부쉬낀이 돈을 빌려야했던 처지에 놓였을 때조차 그의 긍휼을 자극해 돈을 빌렸던 가장.

 

결국 알렉세예브나는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졌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며 지주 비꼬프와의 결혼을 택해 떠나고, 주름장식을 사주어 결혼을 택했다고 믿는 제부쉬낀은 주름장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나며 절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을 통해 정신적 풍요를 지향하던 알렉세예브나도 가난에 몰려 지주를 택하고, 물질뿐만 아니라 문학적 심미안도 빈한했던 제부쉬낀 역시 가난 때문에 연인을 떠나보낸다.

 

알렉세예브나와 제부쉬낀이 물질적으로 가난하더라도 동등한 수준의 문학적 감수성을 교류했더라면 결과가 달랐을까. 또 하나는 검증된 문학을 통해서 세상을 읽는 것이 아니라 비록 수준 낮은 것일지라도 자신의 관찰과 소신에 따라 현실을 판단하고, 신앙의 선열에 따라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며 주변 사람들을 연민으로 보듬은 주인공의 나레이션을, 통찰력이 결여된 비현실적인 인식이라며 가볍게 치부할 수 있을까. 더불어 문학적 고양이 과연 현실에서 갖는 실질적인 힘은 무엇인가. 작가는 해답이 아니라, 과제를 내준 것만 같다.

그곳엔 지금 나뭇잎도 다 떨어지고 비가 내리고 추울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런 곳으로 가신다고요! 비꼬프 씨한테는 일이라도 있죠. 토끼 쫓는 일이오. 하지만 당신은 무엇을 하시렵니까? 당신은 지주의 아내가 되고 싶었던 겁니까! 하지만, 나의 천사여! 자신을 한 번 바라보세요. 당신이 지주의 아내를 닮았다고 생각합니까?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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