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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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공동체는 선을 추구하며, 모든 공동체를 포괄하는 국가 공동체는, 그러므로 최고의 선을 추구한다고 단언한다. 또 모든 학문과 기술의 궁극적인 목적도 선이며 모든 학문과 기술의 으뜸인 정치도 선을 향해 나아가야 하고, 정치에서의  선은 정의임을 표방한다. 국가는 자연적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주장한 점은 사회계약론에 입각한 국가론과 대비되기도 한다.  

 

아마도 <정치학>의 백미는 최고의 선을 추구해야하는 국가 공동체를 구성할 때, 어떤 정체가 합당할 것인지, 그리고 국가가 국가답기 위해서는 영토, 인구, 도시의 위치 및 설계, 교육 등을 어떻게 조합하는 것이 좋은지 철학적 사유를 덧입혀 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나 차별없이 추첨에 의해 공직에 진출하는 정체를 민주정,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춘 자들만이 공직에 선출되는 정체를 과두정, 특정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고 가장 훌륭한 자들로만 공직을 구성하는 정체를 귀족정, 독재자가 자기와 동등하거나 더 훌륭한 자들을 자의적으로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정체를 참주정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변형과 특성을 분류해나간다.

 

눈여겨볼 것은 대부분의 국가를 위한 최선의 정체를 중산 계급에 결정권이 있는 정체로 정의한 점이다. 빈민과 부자가 양극단의 결정권을 가지면 주인과 노예의 대립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정체의 변혁이 일어나는 이유를 사유한 점도 주목할 수 있는데, 가령 민중이 선동가의 사주를 받아 부자를 박해하면, 부자들이 단결하여 참주정체로 이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과두정은 민중이 부당하게 억압받거나 지배계급이 반목할 때 전복되는데 지배계급의 일부가 선동가 역할을 하거나 일부가 정체의 변혁을 강구할 때,  또 지배계급 내 새로운 지배계급이 생길 때 가능해진다고 진단한다. 귀족정체는 정권에 참여하는 자가 소수라는 구조적 한계 때문에 변혁을 맞이한다고 봤다.

 

정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불법을 경계해야 하고, 공직자들은 공정해야 하며, 상벌을 분명히 하고 특정 계층이 갑자기 신분상승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한편 공직을 축재의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민주정에서는 부자들의 재산을 아껴주고, 과두정에서는 빈민을 배려하는 것이 정체의 보존 수단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정체에 대한 충성심, 업무 수행능력, 정의감을 갖춘 적격자가 요직에 취임해야 하며, 정체의 존속을 원하는 자들을 다수로 유지하되, 늘 중용을 지켜야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근거로 살펴보면 여전히 우리의 정치는 과두정에 가깝고 완전한 자족을 위한 국가공동체의 선을 지향하기 보다는 각개 전투의 치열한 생존들의 혼합이 국가의 민낯이 아닐까 싶은 자괴감마저 든다.

 

공정성이 와해되고 때로는 불법이 합법화되며 공직이 축재의 수단이 되고 있는데도 정체 변혁의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누군가의 지적대로 실제로는 과두정이며 중산 계급의 독보적 지배가 아니라 특정 계층의 독점적 지배가 창궐하는 데도, 우리는 이미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쟁취했다는 우상에 눈이 가리워져,  심연 깊은 끝까지 진지하게 사유해나가는 힘을 잃어버린 까닭은 아닐까.

 

보편적인 지식으로 정리된 편린을 암기하듯 되내이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목적을 정의내리고 다양한 관점에서 정체의 구성을 조합해나가는 사유의 과정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큰 공부가 된다.

국가 형성은 정의 실현의 전제다. 인간은 법과 정의가 없으면 가장 사악하고 가장 위험한 동물이다.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준다. 올바른 지배란 공동의 이익을 위해 동등한 자들과 자유민에게 행사되는 지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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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러피언 드림 -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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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어려운 현실을 뛰어넘고 거칠 것 없는 용기로 역경을 극복하는 개인들에 대해 열광하던 아메리칸 드림의 시대가 저물고,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며 인간의 자유의지로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어가는 생명본능에까지 인식의 단계를 확장해나가는 유러피언 드림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진단한다.

 

특히 영토 없는 정치 체제인 EU의 부상은 단순히 정치적 사건이라기 보다는 유럽인들의 삶의 곳곳에서 네트워크가 확장되면서 일종의 표상처럼 드러난 유러피언 드림의 면모라는 점에 주목한다.

 

자본주의와 민족국가의 확립 등 미국과 유럽의 역사적 궤도를 훑으면서 어떻게 미국과 유럽이 다른 길을 지향해왔는지, 사회 문화적 배경이 갈리게 되었는지 살피면서 미국의 입장에서 다시 유러피언 드림을 성찰해야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또 기후변화, GMO 식품의 등장, 동물의 권리 보호, 예방 원칙 등 과 관련하여, 유러피언 드림의 요체인 시스템적인 사고 방식이, 복잡하고 불확실한 위험이 뒤섞인 여러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지향점이 될 것임을 밝히고 있다.

 

효율, 성과, 결과에 집중했던 아메리칸 드림이 죽음 본능에 충실하다면, 과정, 가치, 성찰 등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 유러피안 드림은 생명 본능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단언하면서, 아메리칸 드림이 보여주고 있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아시아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전체주의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줄 제 3의 대안으로 유러피언 드림의 공동체주의에 대한 기대감도 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EU가 가능했던 이유로 저자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을 꼽고 있는데, 전 세계에서 정보통신기술이 가장 발달한 나라 중 하나인 우리나라에서는 왜 공동체주의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것인지 돌아보게 된다. 전체주의적인 아시아 문화의 배경 위로 개인주의의 극단인 아메리칸 드림이 내려앉은 우리의 현실을 마주하면, 세계사적인 균형 감각을 갖추어나가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책은 없을 것 같다.

유러피언 드림은 이 어둡고 험난한 세상에서 길을 인도하는 등대다. 그 등불은 포괄성, 다양성, 삶의 질, 심오한 놀이, 지속가능성, 보편적 인권, 자연의 권리, 지구상의 평화로 정의되는 새로운 시대로 우리를 손짓하며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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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강의
서대원 지음 / 을유문화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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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을 단순한 처세술을 익히거나 운명을 점치는 책으로 치부하는 단견이 얼마나 어리석은 판단인지 오롯이 일깨워주는 책. 역술가로서의 전문성과 법학 전공자로서의 꼼꼼함을 갖춘 저자의 이력 덕분에 가독성이 높아졌다.

 

공자께서 가죽끈이 여러번 끊어지도록 읽고 읽으셨다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주역>은 원, 형, 리, 정으로 변화하는 인생의 좌표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통찰을 곁들여 인생의 파고를 지혜롭게 헤쳐나가야하는지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자기계발서 같은 일방적인 권고로 일시적인 위안이나 즉각 증발할 옅은 깨달음에 천착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한탕주의식 극약 처방 같은 지침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구체적인 현실을 제시한 후 경륜에 바탕을 둔 지혜로 되짚어준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운명을 바꾸는 방법. 첫째, 무구할 것. 어려울 때일 수록 흠없이 무구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둘째, 주. 밭의 두둑이나 이랑처럼 가지런하고 질서있게 생활할 것, 셋째, 리지. 현재의 어려움과 막힘의 운세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하늘의 복이라고 생각하고 순종할 것.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좌절하고 무력해지면서 삶의 정도를 벗어나기 쉬운데, 정신 바짝 차리고 궤도를 가다듬으며 겸손한 자세와 태도를 바로잡아야한다는 것이다.

 

교육, 결혼, 전쟁, 여행, 가정의 치리부터 권력, 명예, 부, 혁명, 사회변화까지 일상의 소소한 문제부터 인생과 사회 전반에 걸친 거대한 화두까지 전후사방을 살피는 섬세함이 더욱 놀랍다.

 

<주역>의 바른 읽기를 위한 입문서로 제격. 한 번 읽고 덮어버릴 책이 아니라 가까이 두고 되풀이하며 읽어 그 의미를 되새겨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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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콩 강의 진주, 라오스 - 들여다보기, 이해하기, 돌아보기
이요한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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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여행을 앞두고 라오스의 문화, 역사, 정치 등 사회상을 알고 싶어 읽기 시작했다. 저자가 현재 라오스 스파누봉 대학교 교수님으로, 일목요연하게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다. 동남아시아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다시 자각.

 

인상 깊은 것은 라오스가 정치적으로는 일당독재의 사회주의를 표방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 관광지 소개 말고는 탈북자들의 북송 문제로나 국내 뉴스에 나오는 나라이다 보니, 자연스레 자본주의 경제는 아닐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었던 것. 메콩 강을 근간으로 수력발전을 통해 전력을 수출하고, 보펜양 문화(괜찮아)가 보편적이라는 점, 언어에 시제가 없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전후 맥락에 집중해야만 상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문화 속에서 자연히 사람에게 더 집중하게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저자도 지적했듯이 우리나라의 라오스에 대한 원조 정책은 안타까움이 큰 부분. 한 때 라오스를 점령했던 일본이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전략에 따라 라오스에 원조를 하는 것과 달리, 라오스 내 친한 정서가 풍성한데도 경제적인 지원으로만 마무리하고 있는 우리의 대외 정책은 되짚어야 할 것 같다. 특히 정부의 제대로 된 지원이 미흡해 교수님 혼자서 한국 협력 센터를 스스로 설립하여 운영해야하는 현 상황은 우리의 대외정책이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바뀌었다는 감격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북한, 우리나라와 동시에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라오스. 단순히 관광지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라오스를 보고 싶다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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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는 잠들지 않는다
임종욱 지음 / 북인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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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는 독특한 소설의 구조를 지녔다. 각 장의 서두에 김만중과 아내가 서로 주고받는 1인칭 관점의 편지글이 소개된 후, 편지글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다시 3인칭 관점으로 전개되며 확장된다. 이렇게 1인칭과 3인칭이 교차되는 구조가 갖는 미덕은 동일한 이야기를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1차적으로 김만중의 눈을 통해 걸러진 이야기의 큰 흐름과 맥락을 미리 파악한 후, 다시 3인칭 관점으로 묘사되는 세부적인 이야기를 읽게 되므로, 관점 바꾸기를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의 미묘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또 1인칭과 3인칭을 넘나드는 전개 구조는 소설 속 김만중의 위치를 자연스럽게 변화시키는 장점도 갖는다. 서두의 편지글에서는 전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인공으로서의 김만중이 두드러지므로, 나머지 인물들은 자연스레 김만중에 의해 해석되는 조연에 머무른다. 그러나 편지글에 바로 이어지는 3인칭 관점의 전개 속에서는 숱한 인물들이 각 장의 주인공으로 생생하게 거듭난다. 박태수, 옥진이, 양설규, 나정언, 아미, 호우, 채란, 덕보, 홍길찬, 소정 등은 각각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세밀하게 그려지고, 오히려 김만중은 단지 이들의 얽힌 삶을 엮어내는 조연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이렇게 관점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소설의 구조는, 전체적으로 김만중도 소설 속 숱한 주인공들 중 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독자들에게 드리우게 된다. 그 결과 주인공과 조연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사연 많은 그들의 삶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남해’라는 유배의 땅에서도 멈춤 없이 풀무질 되는 질긴 삶들이 뒤섞이는 모습을 한 눈으로 보듬게 되는 것이다.

 

독특한 소설의 짜임새가 전체적인 이야기의 윤곽을 명확히 짚어내는 데 일조한다면, 소설읽기의 즐거움을 더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김만중이 왜 유배지에서 한글로 소설을 썼는지 추적하는 집요한 물음과, 작가의 상상력이 쏟아내는 치밀한 시선이다.

 

이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의 단초는 장 선달 댁 며느리의 이야기와 양설규의 행보 등 김만중이 절망의 유배지 현장에서 직접 겪은 경험으로부터 영감을 얻는 내용이라는 설정이다.

 

조선의 정 중앙에 서서 끊임없이 백성을 입에 올렸지만, 정작 그들과 섞이지 못했던 김만중이, 주변부로 밀려나 유배를 온 후 백성과 삶을 섞고, 함께 어우러지고 나서야 진짜 조선의 백성이 되고, 백성을 위하게 되었다는 주제 의식은 뜻하지 않은 감동을 주었다.

 

김만중이 중앙 무대로의 복귀를 꿈꾸며 위대한 작품을 남기겠다는 거창한 의지를 다지거나 어두운 정치의 이면을 신랄하게 풍자해 백성의 여론을 주도하겠다는 원대한 소망으로부터 소설을 써나갔다는 설정이었다면 어떠했을까. 김만중 개인의 천재성과 치적은 돋보일지라도 소설이 주는 문학적 감동은 현격히 줄어들었을 게 자명하다.

 

삶은 중심에서만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멀리 주변부의 낮은 곳에서도 어김없이 피어나고, 그 좌표가 어디든 날것으로 주어지는 생을 살기 위해 제 할 일을 다 하며 함께 걸어 나가는 것, 거기서부터 우리 문학사에 큰 획을 긋는 작품이 탄생되었으리라는 작가의 상상력은, 그러므로 나에게는 또다시 남해에서의 힘찬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벼리가 되었다.

 

소설 속 김만중은 한글 소설 쓰기를 통해 어머니와 아내, 주변부로 밀려난 삶들을 보듬게 되었고, 그 삶들을 그들의 언어로 체현하려는 소박한 꿈을 꾸게 된다. 관념과 이상만으로는 결코 마주할 수 없는 생생한 실체들을 마주한 그에게는, 어쩌면 유배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을는지 모른다.

 

한편 사씨남정기, 구운몽의 탄생 과정과 더불어 씨줄처럼 가로지르는 이 소설의 또 다른 이야기, 박태수와 옥진이의 사랑, 호우, 아미, 나정언 간에 오가는 엇갈린 풋사랑은 소설이 갖는 이야기의 폭을 한층 풍성하게 한다.

 

신분 사회가 품은 구조적 한계에 매인 그네들의 삶이지만, 각자 자신들답게 제 몸짓의 생을 살아가려는 몸부림은 생경스러울 정도로 신선하다. 그들의 애잔한 사랑 이야기는 열린 결말이어서 더욱 여운이 남는다. 소설 속 세상이 닫힌 조선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박태수와 옥진이, 호우와 아미, 그리고 나정언이라면 어떻게든 그 막힌 구조를 비집어 파고들며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그려 나가리라는 확신이 든다고 할까. 그만큼 이들은 소설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며 그들 특유의 생명력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

 

다만 김만중이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내려오면서 유배 기간 동안 느꼈을 비련, 애증, 분노 등에 대한 묘사가 좀 더 강조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만중의 성품이 원래부터 단아하고, 선비 정신이 드높아 주어진 삶을 달관의 경지에서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같은 착각 때문에 자칫 김만중의 한글 소설이 백성에 대한 시혜적 글쓰기로 머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김만중 역시 여느 민초들처럼 똑같이 아파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인물이었지만, 유배지에서 만난 민초들의 삶을 통해 성숙해지는 과정이 조금 더 섬세하게 그려졌더라면, 그의 소설이 김만중만의 것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삶을 나눈 이들 모두의 것이라는 주제 의식이 뚜렷하게 부각되면서, 더욱 설득력이 있었을 것 같다.

 

활자를 읽는 내내 염두에 두었던 것이 소설의 제목이었다. 왜 작가는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을까. 단순히 김만중이 유배 중에 쓴 한글 소설들이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작품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다다른 끝이라고 여겨졌던 주변부에서 김만중이 죽음으로써 남해에서의 유배를 끝냈어도, 지속적으로 숱한 삶의 이야기를 피워내는 주변부의 백성들이 살아내는 한, 또 다른 사씨남정기, 구운몽은 수많은 김만중들에 의해 피어나리라는 의미에서 덧붙인 것이 아닌가 싶었다. 어디에서건 생이 지속되고,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엮이고 이어져 마침내 하나의 큰 덩어리로써 다시 거대한 이야기로 줄기져 가는 한, 김만중은 죽을 수 없고, 민초들은 멈출 수 없으며 남해는 결코 잠들 수 없다.

 

생의 겉모습에 천착하며 깊은 곳으로 침잠하는 대신, 때로는 표독스러울 만큼 괴로운 생의 생채기일지라도 있는 힘껏 껴안으며,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생의 의지를 되새기는 것이 구원의 해답일 수 있다는 사실.

 

내가 지금 서 있는 좌표와 맥락을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마침내는 많은 이들의 걸음이 맞닿고, 이어져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큰 줄기로 이어져 나가리라는 확신. 부서지고 무너져 철저히 분리되었던 나의 삶과 너의 삶이 만나 우리의 이야기로 부활하는 그 아름다운 여정이, 김만중을 추적하면서 작가가 정말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왜란을 가로질러 살아내고, 유배지란 오명 속에서도 삶을 피워낸 숱한 민초들의 삶이 계속되는 한, 어느 시대와 조건 속에서든 김만중은 김만중답게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썼을 테고, 소설 속 숱한 주인공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삶을 너끈하게 살아냈을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한 인터뷰에서 문학은 주변부에서 쓰여야 한다고 했다. 중심에 서서는 결코 문학의 사명을 다할 수 없다는 게 지론이었다. 밀려나고 어그러져 초라한 모습으로 선 주변부에서, 있는 그대로를 편견 없이 목도하여, 가려진 생의 이면, 중심부와 주변부를 관통하는 궤와 그 의미를 포착하는 게 문학이 정말 해야 할 일이라는 취지였던 것 같다.

 

중심부에서 순식간에 주변부로 밀려난 김만중을 쫓으면서, 주어진 생을 자신답게 살아내는 개인들과, 그 개인들이 어우러져 이루어내는 면면한 생의 역사를 그려내는 동시에, 누구 하나 조연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면서, 주변부와 중심부의 인위적인 경계를 한꺼번에 무너뜨린 작가의 역량에 감사했다. 그만큼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문학적 소명에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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