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 (보급판) - 사기 130권을 관통하는 인간통찰 15
김영수 지음 / 왕의서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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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마천의 <사기>가 특별한 이유는 뭘까. 사건이나 영웅 중심의 역사에 익숙한 바, 권력가나 세도가는 물론 여성부터 치부한 자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에 관심을 두고, 면밀한 삶의 길을 통찰한 방식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만큼 발군의 면모를 보인다. 


사마천의 인생을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소명'이라고 할 수 있다. 태사령 사마담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부터 전국을 돌면서 지형, 다양한 이야기 등을 수집했고, 위대한 역사서를 쓰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가슴에 새긴다. 이후 흉노족과의 대결에서 투항한 이릉을 옹호하다 궁형을 받고 죽음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명예라면 목숨을 걸던 시대에, 그는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이는 죽음을 이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구차하더라도 끝까지 살아남아 역사서를 기술하는 데 천착한다. 


<사기>의 가장 큰 특징은 연대순으로, 왕을 중심으로 기술하는 역사 서술 방식을 버리고, 왕은 물론 권력 주변의 다양한 군상과 일반인까지 포집하고 이를 주제별로 엮어 교훈을 뽑아내는 데 주안점을 두는 기전체를 고안함으로써, 특별한 입체성을 옹립했다는 데 있다. 


더불어 권력을 지향하는 통찰뿐만 아니라 치부의 길, 비범하지 않았던 여성들의 삶까지 기록하면서 역사가로서의 시선을 권력의 정점에서 민중의 세세한 삶까지 포착하는 데까지 확장시키며 비범한 혜안을 보여준다. 


사마천의 지혜는,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사기>에 드러난 다양한 인물의 생을 단순한 권선징악의 구도 속에 가두고 있지 않는 데서도 발현된다. 


<사기>에서 표현되는 인물과 주제의 특색은 인물이 놓인 맥락 속에서 그 인물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현실을 읽어내고 생사를 넘어서는 바른 방향으로 관계를 맺어가는가를 교차시키면서, 올곧은 함의를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술 방식을 통해 최선의 노력에도 뛰어넘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도 분명하게 추출하면서, 매 순간마다 달라지는 생의 궤적 속에서 찰나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정하기에, 하나의 교훈만으로 만사형통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임을 규명해낸다. 그러므로, <사기>는 늘 가까이 두고 나의 좌향과 정위를 가늠할 수 있는 이정표 같은 책임을 부정할 수 없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은 <사기>연구의 전문가가 직접 집필하면서 자신이 실제 방문하고 마주한 장소의 사진을 수록한 것인데, 사기를 읽고 나서 관련 장소를 임장하는 것도 의미있는 여행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꿰뚫어 일가의 말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 P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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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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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는 마음으로 투그리듯 읽어나가리라, 그렇게 마음 먹기까지 망설임의 시간도 꽤 흘러갔다. 바쁜 일상 속에서 의지를 다잡고 집중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 대한 의문도 있었지만, 톨스토이의 책을 진득하게 앉아 곱씹으며 읽지 않는 것은 뭔가 불경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 같은 강박증도 한 몫했던 덧 같다. 


그럼에도 독서를 시작하게 한 힘은 순전히 작가가 드러내고 싶은 삶의 의미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어떤 열망의 추동이었다. 산란하는 가벼운 충고나 맥빠진 권고를 넘어서서 대문호가 포효하듯 쏟아내는 어떤 진실, 장문의 저작이 아니면 전달할 수 없는 묵직한 발견을, 지금이 아니면 체득할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 비슷한 감정도 일었던 것 같다. 


<전쟁과 평화>는 표면적으로는 피에르 베주호프,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 마리야 볼콘스카야 공작 영애, 니콜라이 로스토프 백작, 나타샤 로스토바 등 세 가문을 대표하는 다섯명 주인공들의 성장기를 담고 있다. 


피에르는 사생아로 아버지의 죽음 후 러시아 최고의 부호 중 한 명으로 등극한다. 선량한 마음을 가졌지만 야무지기 보다는 상황에 휩쓸리는 청년으로 최고의 미녀인 엘렌과 사랑 없는 결혼을 시작하고, 방탕한 생활과 공허함에 지쳐 프리메이슨에 가입한다. 삶의 의미를 추적하던 그는 이를 통해 도덕적이고 선함을 추구하지만, 이내 흔들린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입 때 모스크바에 남아 포로로 잡히고, 포로 생활을 하면서 전쟁의 참상과 인간의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나타샤와 결혼 후 다시 사회적 연대와 희망을 꿈꾼다.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은 냉철하고 이지적이며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유형이다. 명예와 영광을 추구하는 인물로, 전쟁의 참화 속에서 두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맞는다. 아내의 죽음을 목도하지만, 그의 이상적 갈망은 멈추지 않는다. 처음 죽음의 고비를 맞으면서 적이지만 심취했던 나폴레옹의 졸렬함을 마주하면서 실망하게 되고, 이후 변심한 나타샤에 대한 번민과 적수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전장을 누비다가 죽음을 앞두고 나타샤와 극적으로 재회한다. 나타샤와 여동생의 돌봄을 받으면서 영광이나 이상의 허무함을 발견하게 되고, 죽음이 새로운 세계로의 문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나타샤를 용서하고 사랑을 받아들인다. 


마리야 볼콘스카야 공작 영애는 아버지에게 억눌리면서도, 안드레이의 어린 자녀를 돌보면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삶에서 실천하는 인물로, 어떤 상황에서도 가정을 돌보고, 주변을 살피는 따스한 인품의 소유자다. 그녀의 외모는 뛰어나지 않지만, 니콜라이는 헌신적이고 신실한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마침내 그녀와 결혼한다. 


니콜라이 로스토프 백작은 밝고 낭만적인 청년으로, 친척인 소냐에게 결혼의 의지를 내보일 정도로 일견 충동적이지만, 로스토프 가문의 장남으로 나폴레옹과의 일전에 참여하면서 전쟁을 통해 명예를 얻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품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세가 기울자 집안의 경제적 책임을 떠 안고, 가족을 돌보면서 점점 책임감 있는 인물로 성장한다. 


나타샤 로스토바는 니콜라이의 여동생으로 밝고 아름다우며 재주가 많은 아가씨. 아무런 걱정 없이 자신을 표현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상처한 안드레이 볼콘스키와 사랑에 빠진다. 안드레이 공작과 약혼까지 했지만, 아나톨 쿠라긴의 유혹에 빠져 그와 도망치려는 계획까지 세우다 결국 파혼하게 된다. 감정에 솔직한 그녀는, 극적으로 죽어가는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을 만나게 되고, 그의 마지막을 지키게 된다. 이후 남동생 페챠의 죽음으로 부모님이 흔들리자 다시 생의 의지를 불태우며 일어서게 되고, 모스크바 탈환 후 피에르를 만나면서 부부의 연을 맺는다. 


이들 다섯명의 주인공은 <전쟁과 평화>를 관통하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통해 성장하는데, 이 배경이 되는 전쟁 자체가 또 하나의 주제를 펼쳐나간다. 톨스토이는 나폴레옹의 영웅화와 명령이 완벽하게 수행되는 전쟁을 그려내는 역사적 접근을 비판하면서, 전쟁은 결코 한 영웅적 인간의 의지나 천재적 면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전장은 결코 명령대로 수행될 수 없음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소설적 장치로 피에르의 전쟁에의 자원이 중요한 삽화로 제시되는데, 명령 전달 체계는 물론, 러시와와 프랑스의 전쟁 목표, 지형적 입지, 병사들의 상태와 요구, 공과를 과장하려는 관행과 입신양명을 꿈꾸는 지휘관들의 욕망 등 세세한 요인들이 뒤엉켜 전장은 새로운 시공간으로 탈바꿈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공간에서 무능하고 겁 많은 것으로 알려진 총사령관 쿠투초프가 오히려 지혜롭고 명민한 지휘관으로 묘사된다. 톨스토이는 전쟁을 이끄는 심연의 무언가를 포착하면서 나폴레옹의 붕괴를 예견하고, 끝까지 심연의 무언가가 도드라질 때까지 인내했다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쿠투초프의 혜안을 긍정한다. 


전쟁의 큰 흐름을 포착하는 노인의 안목과 더불어 중요한 인물은 러시아 병사 플라톤 카라타예프다. 피에르가 포로로 잡혔을 때 만난 카라타예프는 돌처럼 눕고, 빵처럼 일어난다면서 앞날을 알 수 없는 포로 생활 속에서도 단순하며 평온한 모습을 보여주며 피에르의 마음을 연다. 그는 죽음조차도 온전히 수용하는 인물로, 이동 중에 기력이 점점 떨어져 결국 총살된다. 


지휘관으로서의 쿠투초프만 전쟁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익명의 병사지만 전쟁 속에서 살고 죽으며, 자신의 방식대로 실존한 이들이 있었다는 점을 그려내면서, 톨스토이는 균형 감각을 잃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가장 특이하면서도, 소설의 주제를 드러내는 부분은 단연 <에필로그>와 <전쟁과 평화에 덧붙이는 말>이다. 역사가와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소회, 학문으로써 재단할 수 없는 실재의 삶에 대한 톨스토이의 주장은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엄숙하다. 어쩌면 그는 역사의 눈으로 재편되면 사라질 수 밖에 없는 다양한 삶의 편린들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사실이 아니라 진실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진짜 인간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전쟁과 평화>는 스토리로 읽는 소설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 일부에서 소설이 아니라며 비판하듯 철학서이면서 새로운 역사서이면서 장엄한 서사시이기도 하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 수용하며 성장하는 생, 직면하며 인내하는 명. 역사를 이루는 모든 층위가 부딪히면서 개별적인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가며, 인간들은 부딪히면서 '전체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 

"상거지보다 못하지 않은가. 저들이 강할 때 우리는 몸을 사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는 저들을 동정할 수 있다. 저들도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가, 제군들?..중략..하지만 누가 저들을 이곳으로 불렀느냔 말이지. 자업자득이야. 개...자식들..."병사들은 아마 쿠투조프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원수의 엄숙한 말로 시작되어 선량한 노인의 말로 마무리된 연설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연설의 진심어린 의미는 전달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적에 대한 연민과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자각과 어우러진 위대하고 엄숙한 감정, 다름 아닌 노인의 이런 악의 없는 욕설로 표현된 바로 그 감정은 병사 한 사람 한사람의 영혼 속에 깃들었고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 기쁨의 함성으로 표현되었다.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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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
페르낭 브로델 지음, 김홍식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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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역사 분야에 노벨상이 있다면 페르낭 브로델이 수상자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독서를 하지 않을 이유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연구에 대한 학술적 근거와 개요를 설명하면서도 역자의 깊이 있는 해제까지 더해져 가독성까지 확보한 책이라니, 독자에게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있을까. 


브로델이 주는 가장 큰 감명은, 인간의 일상 생활을 소외시키지 않고, 샅샅히 살펴보면서 그 흔적을 역사의 가장 중요한 근간으로 상정했다는 점이다. 흔히 자본주의는 물질의 축적과 더불어 인식의 변화 등을 통해 시장 경제가 발달해 나타난 일차원적 개념으로 인식하기 쉬운데, 도시와 화폐의 출현은 물론 자급자족을 넘어서서 생산과 소비를 잇는 시장경제를 통해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배지가 이미 마련되고 있었다는 점을 규명하면서 자본주의 태동의 입체성을 확보한다. 즉, 인간 삶의 축적이 구조화되면서 인간의 행위를 구속하기도 하면서, 전혀 새로운 현상을 발현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다. 


브로델은 관념적이고 사변적으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특정 관점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관찰하고, 추적하며, 그려보는 과정을 집요하게 수행하면서, 일상이 시간의 축적을 통해서 물질생활이라는 장기 구조를 형성하고, 그 위에서 교환이 이루어지는 시장 경제라는 경제 생활이 중기 구조로 층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 구조의 토대 위에 자본주의라는 현상이 최상위층에 나타났다고 본다. 


그는 다수의 행위자들 사이에 경쟁이 일어나고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는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 마르크스가 생각한 대로 하부구조에서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가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상부구조에 존재하는 자본주의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명확히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일련의 특징적인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을 밝혀낸다. 자본주의는 경쟁과 분업을 하지 않으며 일종의 특권층처럼 독점하면서 오히려 반시장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이익이 난다면 국가와 경계를 넘어서서 활동하며 잇속을 위해 게임을 왜곡할 수 있는 수천 가지의 방법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구가한다. 또한 지식, 정보, 문화면에서 누리는 다양한 우위를 바탕으로 무엇이든지 장악하며, 높은 이익이 발생하는 분야라면 닥치는 대로 뛰어들어 독점할 뿐 전문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자본주의는 상부구조의 현상이고 소수의 현상이며 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으로, 단순히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사회 질서를 이용해 생존하고, 국가와 대등한 지위에서 맞서기도 하며 공모하기도 하면서 사회 구조를 지탱하는 문화로서의 역할도 감당한다. 동시에 여러 지배 계급과의 결탁을 도모하기에, 단순히 경제적 문제로만 국한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본주의는 다양한 영역으로 침투하기에 명확히 경계를 지을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3층 구조의 맨 꼭대기에서 독점을 통해 높은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으로 사회질서, 위계, 국가, 문화 온갖 영역에 침투하여 사회적 구조를 생성하고, 그와 결합해 존재하는 실체로,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는 변신의 귀재라는 것. 


카멜레온과 히드라처럼 변화무쌍한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견해는, 기존의 시장 경제, 마르크스주의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경제의 경계에 자본주의를 가두어 재단하는 대신 이익을 위해서 사회 전체에 걸쳐 작동하는 거대한 현상이며, 상층부에서만 이루어지기에 투명하지 않다는 그의 일침은, 왜 우리가 사회 전반의 영역에서 자본주의에 민감해야 하며, 그 독점과 불투명성에 대한 균열에의 의지를 가져야 하는지 상기시킨다.  

이익이 콸콸 쏟아지는 고전압이 흐르는 곳, 예나 지금이나 바로 그러한 곳에서만 자본주의가 존재한다. 예나 지금이나, 산업혁명 이전이나 이후나 반시장이야말로 자본주의란 실체가 존재하는 곳이다. 자본주의적 과정은 원거리 무역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자본주의란 것은 본질적으로 가장 높은 곳의 경제 활동에서 비롯된다. 자본주의는 물질생활과 촘촘한 시장경제를 겹으로 깔고 앉아, 높은 수익이 나는 영역을 대변한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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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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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보다 더 흥미를 끈 것은, 오롯이 제목과 강렬한 표지의 색감이었다. 21세기 소설 제목으로 통용하기에는 뭔가 어색한 '사탄'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붉은 색 바탕에 철심으로 그어댄 것 같은 삭삭한 선들이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붉은 표지에 균열이라도 낼 것처럼 꾹꾹 눌러댔을 법한 뾰족한 선들은 표지에 선명한 자국을 남기는 동시에, 표지를 뚫을 것 같은 강한 강도를 가늠하게 하는데,  '사탄'이라는 단어와 기묘하게 어울리는 디자인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튼, 표지와 제목에 사로잡힌 순간부터, 독서는 별 모를 의무감이 아니라 어떤 갈망같은 추적이 되었다. 현재의 텍스트를 읽으면서도 동시에 다음 문단을 열망하는 방식으로 읽게 하는 몰입감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폐허가 된 헝가리의 집단 농장에서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이 살아간다. 슈미트 부인과 함께 있던 후터키는 종소리를 듣고 깨어 때마침 집으로 돌아오는 슈미트의 인기척을 듣게 된다. 불륜 장면을 들키게 될 우려에도 불구하고 후터키는 재치 있게 슈미트의 약점을 파고 드는데, 그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번 돈을 크라네르와 함께 빼돌리려 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건수를 잡은 후터키가 슈미트와 돈을 나누려는데, 헐리치 부인이 찾아와, 죽었던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마을로 오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전한다. 뜻밖의 소식을 접한 일단의 무리는, 자신들에게 구원자이자 지도자 역할을 했던 이리미아시의 꿈과 영광을 상기하면서 술집으로 몰려가 그를 기다린다. 


한편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는 죽은 것이 아니라, 군의 대위 아래에서 정보를 수집해서 보고하는 하수인으로, 대위의 신뢰를 잃고 마지막 기회를 살리기 위해 마을로 향한다. 권력의 말단에서 마을 사람들을 감시하면서도 들키지 않고 그들에게 위대한 영도자로 추앙받았던 과거를 부활시켜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려는 데 여념이 없다. 


이리미아시에 대한 집착과도 같은 맹신과 희구 속에서, 일단의 무리들과는 짐짓 멀리 떨어져 무너져 가는 마을과 사람들의 일상을 세세히 기억하고 기록하는 의사는, 적어나가는 데 천착하는 인물. 평소에도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는 최소한의 인물과만 접촉할 뿐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조차 없었었던 그는 한 차례 쓰러지지만 기어이 일어나 모두가 떠난 마을로 돌아와 과거를 상기하면서, 부재하는 인물들을 재구성하는 일에 몰두한다. 이리미아시의 감시와 결은 다르지만, 그는 집단 내부에서 동향을 파악하는 데 주력한다. 그러나 그의 지식과 정보는 공동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다만, 그는 와해되어 가는 세계와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야 한다는 일념에만 도착되어 어떤 교훈도, 소망도 제시하지 못한다. 


일단의 무리들이 몰려든 술집은 매일 매일 거미줄이 쌓이는 곳으로, 그들은 제각각 이리미아시를 기대어 삶의 도약을 꿈꾼다. 그들의 속내는 욕정, 탐욕, 허튼 기대감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결국 이리미아시를 붙들기만 하면 삶은 송두리째 바뀔 수 있다는 공통된 믿음으로 점점 취해간다. 그리고 취한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탱고를 춘다. 


반면 이리미아시를 동경하는, 소년 서니의 여동생 에슈티케는 가족들에게조차 사실상 방치된 소녀로, 선뜻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오빠를 신뢰하지만, 끝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목숨을 버린다. 


마을로 돌아온 이리미아시는 에슈티케의 죽음을 화두로 꺼내면서 그의 죽음에 모두의 책임이 있다는 선동을 통해 수금하고, 이곳을 떠나 주변의 성으로 모일 것을 명령한다. 자신이 도시에 다녀와 새로운 삶을 보장할 소명을 줄 것임을 약속하는데, 의사를 제외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질척대는 길을 따라 성으로 나아간다.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 서니는 성으로 가는 도중 에슈티케의 환영을 보게 되며 잠깐 혼비백산하지만, 부활을 믿지 않는 이리미아시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마을 사람들이 이리미아시 일당에게 속았다고 힐난하는 순간 영웅처럼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도시로 이동시키면서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배정한다. 그리고 서로 연락하지 못하도록 지침을 주면서, 감시의 부역자로써 자신의 촉수 역할을 하도록 맡긴다. 


소설의 말미에서 집단 농장에 남은 의사는 종이 없는데도 울리는 종소리를 듣게 되는데,  탱고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처음 후터키가 종소리를 들었던 시점으로 되먹이된다. 


작가는 거짓 구원자인 이리미아시 일당과 참된 회복 대신 한탕을 노리는 탐욕의 무리, 어떤 진리도 외치지 못하는 맥 빠진 지식인, 한 순간 꺾여버린 순수한 에슈티케, 감시와 보고로 연명하는 지배층, 그리고 다시 이들의 각전투구가 어떻게 자기 파괴의 기만 속으로 침강해 가는지 오싹할 정도로 정밀하게 드러낸다. 


치우친 제도와 관습, 일련의 악당이 난무하는 구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악의 심원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제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우리에게 참 희망이 사라지고, 부활과 회복이 흐트러지는 까닭, 과연 그들 때문이고 정치, 사회의 폐단 때문인가. 매번 제자리로 돌아오는, 훼파된 세계를 향한 작가의 예리한 시선은 회피할 수 없을만큼 날 서 있다. 

우리 아버지...음, 거기 하늘에 계신, 에...주님을 찬양하라, 우리 주님, 아니..거룩하시고..거룩하시고..거룩하신..주님 이름, 그리고 이루어지게 하소서..모든 게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도록..하늘에서도..땅에서도, 당신 손 닿는 모든 곳에서...땅 위에서..그리고 하늘에서..아, 꺼져라, 지옥으로. 아멘..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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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 최한기 : 실학에 길을 묻다 지식인마을 18
임부연 지음 / 김영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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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무엇이든 찬양하고 고양하는 태도를 갖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역사를 배우면서 나도 모르게 우리 안에는 우리의 문제를 타개하거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심상 자체가 빈약하다며 근거 없는 자괴감을 갖기도 했었는데, 정규군 대신 의병이 일어나고 합심해야 할 때 정쟁만 하다 무너졌다며 섣부른 결론을 내면화한 까닭도 있었던 것 같다. 부끄럽게도 시대의 물꼬를 트는 사상적 기반이 연약하므로 상황에 휩쓸리며 순간의 기지나 영웅의 출현에만 기대어 왔다며 독단적으로 조소했던 적도 있었다. 


이 책은 순전히 최한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선택했는데, 내 오랜 편견을 산산히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단순히 자국 우월주의에 잇댄 감성 발언이 아니라, 오히려 연구 기반과 인프라가 연약한 탓에 뛰어난 사상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 실학이라고 뭉뚱그려 묶어 듣고는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채, 게으름과 일천한 지식으로 결론을 재단하는 못된 습성이 빚어낸 편견은, 저자의 매우 정확하고도 정직한 방법적 기술 앞에서 와그리 무너졌다. 


단순히 정약용과 최한기의 사상을 비교하고 대조하는 방식을 넘어서서 후반부에는 선거 유세라는 상황 설정을 통해 각각이 추구한 사상의 핵심 쟁점을 짚어냈기에 사전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엇나가지 않고 이해하는 데 수월하다. 


정약용은 성리학이 추구하는 유교적인 인륜 질서와 형이상학적 정당화가 사변화되면서 소수의 지식인들에게 지적인 만족만을 주었을 뿐, 일상에서 조우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구체적인 윤리적 실천을 소홀히 하는 경향을 만들어냈다고 비판하면서 선을 추구하려는 본성의 욕구는 외부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천주교의 교리를 자신의 사상적 발전에 적용하는데, 상제는 만물을 만들고 주재하는 인격적 존재이지만, 우리의 성찰적 양심으로 발현되며 숭앙할 대상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들였더라도 효도와 공경 등 유교의 덕목을 받아들이기에 제사 금지에 반대하며, 천당과 지옥을 믿지 않는 점을 들어 자신의 사상은 천주교와는 다르다고 일축한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 하에 그는 군자의 학문에서는 자기 수양이 반이고, 백성의 통치가 나머지 절반을 차지한다는 식견을 필두로, 여를 만들어 공동 소유와 공동 경작을 통해 생산물을 분배하는 여전제나 지역, 귀천의 차별 없이 유능한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정약용은 본성이란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우주적인 원리나 마테오 리치가 말한 이성적인 추론 능력이 아니라 선을 좋아하는 윤리적인 욕구이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충족할 수 있기에, 본성의 실천이야말로 삶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정약용은 상제가 본성을 내려주었으며 일상 생활에서 시시각각 명령을 내린다고 가정하는데, 성령님의 역할과 흡사하다. 그리고, 상제의 관심은 사람이 그 명령에 따라 인륜을 실천하는 것으로 타인을 섬기는 것이 곧 하늘을 섬기는 것이라고 본다. 두려움은 상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면서 동시에 바르게 살기 위해 긴장을 유지하는 수양 방법으로 이해하는데, 왜 정약용이 천주교에 심취했는지 유추해볼 수 있다. 


최한기는 일종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 기에 주목하면서, 기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정신 작용이 추측이라고 본다. 그는 세계는 기라는 보편적인 요소에 의해 형성되며 기야말로 진정한 실재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기의 양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기는 영원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운동하며, 이치란 실재하기 보다는 인간의 경험을 통해 구성한 추측의 결과물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기는 생명력을 가지고 자발적인 운동으로 순환과 변형의 능력을 발휘하는 성질이 있는데, 이를 활동운화라고 지칭하면서 자연의 차원에서 천지운화, 정치나 교육 등 사회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통민운화, 개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신운화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일신운화와 통민운화 사이에는 교접운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일신운화는 통민 운화를 따르고 통민운화는 천지운화를 따르는 체계성을 강조하면서, 천지운화는 인위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고, 인간은 이를 받들어 따라야 한다는 관점을 보여준다. 


신기는 기의 신묘한 작용의 능력으로, 모든 존재 속에 들어 있는 기의 보편적인 구성 요소이며 인간에게는 지각의 주체로 나타난다고 본다. 칸트와 유사하게 우리가 감각 기관을 통해 경험한 외부 세계는 사람의 신기인 마음에 물들어 지각이 발생하며 지각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사물과 사태에 대한 인식과 판단이라는 것이다. 최한기는 추측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추측은 앎을 넓히는 요체라고 주장하는데, 윤리적인 선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지운화에 기준을 두고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며 학문은 바로 이 추측을 배우는 것이라고 표명한다. 


그는 우리의 생명은 외부 세계와의 통함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보존되는 것으로써, 무엇에 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기가 유동적으로 변한다고 논하면서, 천지운화를 기준으로 인간은 원래의 부여받은 신기의 소통 역량을 실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끊임없는 변통은 결국 개인, 사회, 세계의 모든 것들과 대동하는 데 까지 나아가야 하며 인간의 문제를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만물의 조화와 협력 속에서 풀어나가야 한다는 데 이르른다. 


최한기의 주장은 모든 학문의 통합, 서양과 동양의 병합에 대한 지향성 뿐만 아니라 현재 뇌과학의 추론 관점과도 유사한 부분이 있어 특히 흥미를 끈다. 더욱이 기존의 뇌과학이 일종의 신호 전달 체계의 확장처럼 보이면서 도덕이나 윤리는 그렇다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에 대한 답변을 충분히 주지 못하고 있는 반면, 최한기는 추측의 과정을 윤리를 넘어서서 만물과의 조화까지 추구한다는 데서 더 넓은 지평을 보여준다. 


게다가 최한기의 기는 융의 집단 무의식이나 동시성과도 연결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데다, 본인은 인격적인 궁극의 실재로서의 신을 부정했지만, 오히려 신과 교통하며 만물에서 영감을 얻는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일종의 단서를 안겨주기에 참신하다.


우리 사상의 뿌리를 더욱 두텁게 할 최한기에 대해 더 깊이 있고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단순히 ‘기에 천착한 실학자’로 치부하기에는, 그의 탐구가 보여주는 치열함과 깊이가 결코 가볍게 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정약용과 최한기 두 분과 대화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배우는 학문, 우리가 지향하는 주체에 대해 성찰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분들이 말하는 통합의 학문이나 윤리 주체는 개별 분과로 나뉜 우리 시대의 학문이나 무한경쟁의 신화에 내몰린 우리 사회의 소시민과는 다릅니다. 따라서 그분들의 설계도가 그대로 우리의 실존적인 해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정직한 만남과 대화는 우리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성찰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지하게 만나는 일은 사랑과 정성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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