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 데리다 들뢰즈 지식인마을 33
박영욱 지음 / 김영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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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것에 대한 부정, 진부한 것에 대한 도전, 획일화된 감성에 대한 반성. 책 표지의 도발적인 문구는 일자포수라도 된 듯 들뢰즈와 데리다에 대한 호기심을 삽시간에 심장으로 밀어 넣었다. 그들에 대해 얼핏 주워들은 내용은 있었지만, 제대로 정리된 내용을 알았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기본 지식이 일천하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간만에 성하고 알찬 독서를 한 것 같아 뿌듯하다. 


책 서두에서 저자는 피카소, 마네, 폴 세잔, 루치노 라우라나와 야코프 판 라이스달 등 회화의 발전과 비교를 통해 유일하며 변함없는 객관적 진리라는 표상을 근거로 세계를 개념화하여 이해하는 방식은 완전한가, 이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들뢰즈와 데리다의 철학이 출발했다는 점을 설명한다. 


먼저 들뢰즈는 칸트가 제시한 도식의 유용성을 포착하여 도식화를 통해 개념이 만들어지고 진부함이 일상화되는 실례를 파악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차이 자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차이를 드러내고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동일성의 억업과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확언한다. 


반면 데리다는 차이의 개념과 유사하지만 자신의 철학을 대표하는 차연을 내세운다. 차연은 두 가지 관점에서 고안한 것인데, 첫째 말과 문자의 위계를 파고드는 데서 시작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서양 철학은 말을 숭상하면서 문자를 폄하했는데, 말은 말을 하는 사람의 현전을 드러내지만 문자는 독자가 읽는 시점에서 볼 때 글쓴이의 부재를 전제하므로 항상 왜곡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문자가 말을 보조하고 대신하는 대리보충에 불과하여, 말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는 소크로테스와 플라톤이 죽고 없는 현재 그들의 생각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남긴 기록으로, 사람들은 텍스트를 믿고 신뢰한다는 것이다. 글은 익명성을 통해 속마음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지만, 말은 오히려 은폐할 수 있으므로 문자를 통해서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대리보충의 대리보충을 주장한다. 발음으로 들리는 말로서는 구분되지 않는 것들도 문자의 음절을 바꾸는 것으로 새로운 의미를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차이는 항상 현재 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처음부터 차이가 결정되어 있지 않고, 상황과 맥락 속에서 차이가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가령 '의협심'이라는 단어 하나로 어떤 인물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유일한 요소가 아니며, 어느 순간에는 '의협심'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다른 경우에는 '의협심'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차이는 진행되는 것으로 완전한 차이 또는 완전한 의미는 영원히 완결될 수 없다고 인식하면서, 차이는 공간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사과라는 기호가 사과라는 개념으로 연결되면 그 체계 안에서 기호의 변경은 절대 있을 수 없고, 시간의 변화 가능성도 배제된다는 것. 그러나 그의 사유를 확장하면 존재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하며 절대 선과 절대 악의 개념 등도 모호해질 수 밖에 없다. 다만 기호는 상황적 전제 안에서 일시적으로 관찰되고 규정되는 것이기에 훨씬 많은 자유와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다. 


저자는 칸트의 개념과 이념에 빗대어 들뢰즈를 설명하면서, 사물 본래의 모습인 물자체는 우리의 지각이나 사고 능력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듯이, 가령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도'는 '도' 자체가 지닌 무한한 잠재적 소리 중 하나를 현실적으로 인식하는 것이기에 잠재적인 수많은 소리들은 실재하며 다만 실현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해설한다.  또한 들뢰즈는 사람의 시각 구조를 닮은 카메라는 개념이나 관습 등에서 자유롭기에 우리의 진부한 사고를 소스치어 뛰어넘을 수 있다고 본다. 


데리다는 선을 예로 들어 선은 선일 뿐인데, 관습에 의해서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가 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경계 자체가 관습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라면 안과 밖이 실재하며 구분 가능한 것인지 묻는다. 그러면서 이 틀로부터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파고든다. 


예술작품이 에르곤이라면 액자 틀처럼 예술작품의 주변적인 것이 파레르곤으로, 에르곤과 파레르곤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예술작품 자체가 틀 안의 실체가 아니며 안과 밖을 구분하는 틀 자체라고 인식한다. 칸트가 주장하는 무관심성, 보편성, 합목적성, 필연성 중 합목적성에 주목하면서 목적없는 합목적성,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로서의 미에 집중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액자영화에 주목하면서 실제 공간과 영화 속 영화가 서로 반영하는 구조를 통해 원본과 복사본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공허한 것일 수 있으며 이것이 기호의 특성을 나타낸다고 인식한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변화되는 의미를 담지 않는, 그러므로 무의미한 기호에의 천착, 이것이 현대 미술 작품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은 무의미의 찌꺼기가 가득하며 의미와 무의미가 중첩되고, 무의미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편 들뢰즈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기계로 규정하는데, 다만 기계론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을 구분한다. 그는 기계론적인 것은 미리 설계된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형성된 체계이며, 기계적인 것은 엄밀한 체계를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어떤 존재든 나름대로의 체계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절단에 근거하여 단절과 흐름의 연결을 통해 기관이 만들어지며 이를 근거로 기계는 단절과 연결을 동시에 수행하는 기제라고 소개한다. 


들뢰즈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의 단일한 체계로 규정할 수 없으며, 이러한 다양체는 어떤 다른 것과 관계를 맺어야만 체계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기계는 다른 기계와 접속을 하는데, 이러한 통접은, 연결이 곧 단절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 다른 기능을 억제하는 분리의 과정, 즉 이접이 이루어지는 데 통접이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이접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설명한다. 이를 종합하면 기계는 연접적인 관계로 이루어진 체계로써 이해된다.


그는  기계론적이고 개념적인 체계를 수목, 기계적이고 이념적인 체계를 리좀이라고 명명하면서 강제적이고 경직된 구분 체계는 수목, 일탈을 허용하는 유연한 절단의 체계는 리좀으로 구분하고, 엄격한 체계로서의 존재를 강제하는 사상들에 반기를 든다. 


제한된 지면 안에서 데리다와 들뢰즈의 사상을 보다 깊이 있게 다루기 위하여 다양한 철학자를 배치하고, 그들의 철학과 비교하면서 전개해 가는 과정이 탁월하다. 다만, 물리적인 한계 탓에 어느 정도 선행 지식이 있어야 비교나 계승, 반박의 과정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다양성, 폭력과 억압에 대한 전위, 고정과 단일에서의 퇴영 및 역동과 변화의 진취 등을 고양하는 철학으로서의 들뢰즈, 데리다가 왜 다양한 분야에서 각광받고 있는지 이해하기에는 충분하다. 

나는 다른 사람과 어떤 면에서 구별될 수 있을까. 다른 사람과 나와의 차이는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번 자신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차이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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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전원교향곡 / 배덕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6
앙드레 지드 지음, 동성식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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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숨은 묘의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교리와 강령을 통해 성경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이 정립되고, 어리석음이 지혜로 교의된다고 배우고 있지만, 분명 이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는 없다. 성경의 숱한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다양한 방법으로 인도된다. 수많은 지류가 있지만 결국은 하나의 줄기로 통합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해설에 따르면 기독교 배경 하에 자란 지드는 신화를 읽듯 성경을 읽었다고 하는데, 그는 천재적 감수성과 꼼꼼한 성격, 그리고 끊임없는 궁리로, 자신이 마주한 삶의 일단들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풀어낸다. 때로는 너무 밀착된 나머지 엉뚱하게도 신에게로의 포섭을 내세우며 삶을 비극으로 몰아넣는가 하면, 냉담하고 범연해져 둘레 밖 세상을 무조건 동경하기도 한다. 마치 돋보기로 번득대며 생을 들여다보다 날카로운 반사점을 발견하면 그것을 모티브로 성경 구절과 엮어 소설로 써 내려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위험천만한 독단을 발휘하면서도 누구보다 신앙적 고뇌를 보여준 까닭에, 소설 읽기의 재미는 독자에게 쏠쏠한 선물이 된다. 


<좁은 문>운 외사촌 알리사와 사랑에 빠진 소년의 성장기로 신에 대한 사랑에 과몰입된 알리사의 신앙에 대해 다룬다. 주인공 제롬은, 어머니의 외도를 알고도 침묵하며 슬퍼하는 알리사를 사랑하게 되고, 알리사 역시 제롬을 사랑하지만, 결혼을 향해 가는 길은 제대로 진척되지 않는다. 알리사는 동생 쥘리에트가 제롬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제롬과의 관계를 멀리하기도 하고, 자신과 제롬이 결혼하면 앞길이 창창한 제롬을 막는 것이 아닐까 염려한다. 세상적인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야 할 제롬을 자신이 방해하는 것 같다는 막연한 심정 탓에, 제롬을 향한 마음을 막아내다 죽어간다. 외도에 대한 배척과 성결에 대한 집착,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동시에 양립 불가능하다는 도착된 고집은 알리사를 죽음으로 이끄는데, 소설가는 치우친 신앙의 모순을 드러낸다. 


<전원교향곡>은 늙은 목사와 그가 거둬들인 눈 먼 소녀의 사랑을 통해 "눈을 뜬다"는 것의 의미를 되묻는다. 주인공은 어느 날 죽어가는 노파의 임종 예배를 갔다가 아무런 연고가 없는 눈 먼 소녀 제르튀르드를 집으로 데려온다. 빈한한 가정 형편이었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제르튀르드를 돌보기 시작한 그는, 그녀의 영특함과 성실함 등을 보면서 점점 연민과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부성애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아들과 제르튀르드가 가까워진 것을 보면서 자신 안의 질투를 대면하게 되고, 제르튀르드 역시 아들이 아니라 목사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목사의 친구에게 눈 수술을 받고 눈을 뜨게 된 제르튀르드는 눈을 뜨고서야 자신은 목사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의 아들을 사랑했다고 단언하며 절규한다. 내가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그녀와 그의 아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한 것인데, 성경 말씀을 각각의 목사님이 자율적으로 전하는 개신교와 달리 모든 성당에서 동일한 말씀으로 선포되는 카톨릭교의 특성과 맞물려, 주인공들에 대한 지드의 관점을 엿본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배덕자>는 지적이며 정적인 삶의 굴레에 살던 미셸의 이야기다. 풍족한 명문가의 엘리트로 살던 미셸은 오직 죽음이 임박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일념으로 마르슬린과 결혼한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마침 떠난 신혼여행에서 병이 도진다. 식단을 바꾸고 산책을 시키는 등 마르슬린의 극진한 간호 속에서 그는 점점 기력을 회복하게 되고 여행지를 바꾸어가면서 염소를 모는 소년들, 생경한 아랍인들을 만나게 되고 육체의 단련에 힘을 쏟는다. 산책의 범위가 점점 확장되면서 마침내 남몰래 바위에 올라가 처음으로 벌거숭이가 되어보기도 하고, 수염을 밀며 머리를 기르면서 점점 '새로운 존재'로 변모해간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건강이 회복된 그는 아버지의 유산이 있는 라모리니에르에 도착해 농장 운영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샌님같던 그는 차차 농장의 운영에 대해 배우고 하인과 소작인을 다루는 데 익숙해진다. 특히 늙은 마름 보카쥬의 아들 샤를과 교제하면서 그의 젊음과 생기를 흠모한다. 강의와 저서 출간을 위해 파리로 돌아온 미셸은 마르슬린과 함께 파리의 고급 주택지에 자리를 잡고 사교 모임에 집중한다. 미셸은 자신의 전문 분야인 고고학과 언어학 관계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기쁨을 추구하지만 사전을 펼치는 것 이상의 삶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를 구할 수 없다며 실망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메날크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미셸의 가위를 훔쳤던 목티르와의 일화를 꺼내면서 목티르는 자신의 절도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한 미셸에 대해 알아차리고 있었다면서 목티르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목티르가 미셸을 쥐고 있었던 것이라면서, 미셸은 이제까지 신이 숭상하던 것, 소유의식이 없다고 칭찬한다. 당혹해하는 미셸과 이후 다시 만난 메날크는 사람들이 삶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흉내만 내고 있다고 단언하면서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남을 모방하면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쏟아 붓는다. 메날크는 사람들은 소유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상은 소유당하고 있으며 모든 기쁨은 날마다 썩어가는 사막의 만나와 같은 것이라면서 떠나간다.


 메날크의 파렴치한 기쁨에 대한 증오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지 못한 것에 대해 화가 났던 미셸은 그제서야 아이를 임신하고 시름시름 앓던 마르슬린과의 현실을 급작스레 조우한다. 그는 마르슬린의 회복을 위해 그녀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곳곳에서 야성의 기쁨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르슬린이 조금씩 회복하자 계절과 고장의 특성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경험을 되살려 열과 빛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서 여행지를 옮겼고, 마침내 목티르를 만났던 비스크라로 가게 된다. 거기에서 감옥에 다녀온 목티르를 만난 미셸은 마르슬린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투구르에 함께 가자며 약속을 한다. 마침내 투구르에 도착한 미셸은 마르슬린의 상태를 염려하면서도 한참을 무어인 카페에 머무르다 호텔로 돌아가고 마침내 마르슬린은 사망한다. 미셸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지금은 네가 허리띠를 두르고 원하는 곳으로 가려니와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말씀에 천착하면서, 자신이 가졌던 확고하고 고정된 사고가 진정한 인간을 만드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항상 푸른 하늘만큼 그 사고를 꺾어버리는 것은 없다고 도파한다. 


지성에 갇힌 굴레를 넘어서서 새로운 존재로 변모했던 미셸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지던 거짓된 삶을 팽하고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겠다며 거리와 여행지를 헤매지만 결국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인 아이와 마르슬린을 잃게 된다. 변함 없이 푸른 하늘-어쩌면 신의 모습일런지 모른다- 아래서 결국 할 말을 잃어버린 미셸의 이야기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가 대한 의문을 던진다. 


지드의 화두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을 전제로 한 인간의 존재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지드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죄인이라는 존재적 위치에서 출발하지 않는, 삶의 의미에 대한 치열한 구색이 어떤 배리의 현상으로 이어지는지 들추어 내는 것 같기도 하다. 

만약에 문제를 드라마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 작품이 말하는 것은, 내 주인공의 영혼 속에서 연출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의 기이한 모험 속에 가둬 버리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인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내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내 작품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었다. 미셸이 이기든 지든, 그 문제는 계속 존재할 것이며 작가는 승리도 패배도 기정사실로 제시하지는 않는다...후략 <앙드레 지드>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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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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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허세와 과장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의미를 떠올리기 쉬운데, 그 실속 없는 기세가 처연하게 느껴져 애달픔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마 누구나 주인공 윌리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세일즈맨으로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해온 윌리는 직장의 외곽으로 밀려나 보험금도 제대로 납부하지 못하며 허탕을 치는 날이 많아지면서 점점 현실과 괴리되기 시작한다. 알래스카로 모험을 떠날 정도로 자립심이 강하셨던 아버지를 동경하는가 하면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지금은 죽은 형 벤과 대화를 하는 등 비현실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아내인 린다를 제외하고는 점차 두 아들, 친구, 직장 등에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윌리의 자긍심이었던 큰 아들 비프가 미식축구 선수로 승승장구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낙제를 한 후 집에서 나가 멀리 떠나 있을 때도, 그는 큰 아들 비프가 어떻게든 잘 나가리라 생각했지만, 뾰족한 수 없이 빌빌대는 모습은 그의 화를 더욱 돋우는 기폭제가 된다.


아내인 린다는 휼륭하지도 않고, 큰 성공을 거둔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한 인간인 그를 늙은 개처럼 무덤 속으로 굴러떨어뜨릴 수는 없다고 단언하면서 그에게 관심이 필요하다고 두 아들을 설득한다. 그녀는 두 아들에게 아버지의 비위를 맞출 것을 요청하고, 비프와 해피는 의기투합하여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겠다고 허황된 결심을 감행한다. 


그리고 동시에 윌리는 자신이 직접 이름을 지어준 하워드 사장에게 찾아가 자리를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이 와중에 친구 찰리가 제공하려는 일자리는 자존심에 거절한다. 한편 아버지와 동생의 격려로 고양되어 옛 직장을 찾아가 투자금을 받으려했던 비프는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한 채 돌아온다. 세 부자의 화합과 정진을 위해 해피가 예약해둔 식당에서 그들의 회합은 결국 제대로 끝맺지 못한다. 


이야기가 절정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비프는 낙제 점수를 받은 직후, 아버지가 계신 보스턴에 찾아갔다가 윌리의 불륜을 목격하게 되었고, 가출 후 오랫동안 집에 연락하지 못했던 이유가 가족에 대한 관심의 결여가 아니라 절도로 감옥에 갇혀있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난다. 또 이들의 대화 속에서 윌리와 비프, 해피는 그동안 자신들의 위치와 삶을 부풀리고 존대스럽게 살아왔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드러내게 된다.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윌리는, 자신이 죽어 보험금만 받을 수 있다면, 친구 찰리의 잘나가는 아들 버나드보다 비프가 앞서갈 수 있다며 자동차로 질주한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윌리의 장례식은 평소 그가 누누히 말해왔던 사람들이 찾지 않아 휑뎅그렁하게 마칠 수 밖에 없었고, 린다는 이제야 주택할부금을 다 갚아 자유를 얻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면서 절규한다. 


단순히 허장성세하는 한 가족의 비극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애잔함이 깊은 잔상으로 남는 이유는, 객기와 허세를 내세워서라도 버텨야 하는 생의 날카로움을 우리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질고 냉정한 삶의 바탕 속에서 언제든 쉽게 바스러질 수 있는 현대인이 선택할 수 있는 버팀목이 얼마나 있던가, 되짚어 헤아릴수록 의미심장하다. 

그럼 찰리 아저씨를 너의 아버지로 삼으렴. 그렇게 할 수 있니? 있냐고!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윌리 로먼은 엄청나게 돈을 번 적도 없어. 신문에 이름이 실린 적도 없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그이는 한 인간이야. 그리고 무언가 무서운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해. 늙은 개처럼 무덤 속으로 굴러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이런 사람에게도 관심이, 관심이 필요하다고.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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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문현미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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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방식으로 관조하는 방법을 터득할 때의 충격을 가히 상상할 수 있을까.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소회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세밀한 붓 터치를 문자로 더듬듯이 따라가며 인상파 작품을 읽은 것 같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시간과 공간, 기승전결의 단계를 따르며 흘러가는 스토리를 훑는 것이 소설 읽기의 일반이라면, <말테의 수기>는 빛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되는 순간을 묘사하려는 인상파 화가들의 일념을, 인간의 존재 방식에 투영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면, 인간 그 자체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얽힌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존재는 이야기를 엮어갈 수 있지만, 순간의 의식들이 관통되는 일련의 흐름 속에 선 인간은 결코 물갈 수 없다. 항상 현재에 있으며 과거와 미래는 얼마든지 오늘에 맞닿아 재구성된다. 더구나, 인상의 조각들은 맞물려 새로운 의식을 만들어 내고 합쳐지다 다시 갈래를 만들어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언제나 동일하게 변하지 않는 "존재"로 인간은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 의식의 흐름 속에서 표류하는 것이 인간의 본체라면 동일한 인간들의 조우는 신기루일 뿐이며, 한 인간의 사라짐은 한 의식의 세계가 사라지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이 겪는 인생은 과연 무엇인가. 죽음을 감추고 있다가 마침내 죽음에 몰수당하는 미미한 존재의 의미없는 사투, 그것 뿐인까. 주인공의 질문은 끊임없는 사유로 이어진다. 


질문에 답하듯이 주인공은 답을 찾는 방식을 소설의 서두에서 분명하게 드러내는데, 보는 법을 새롭게 배우고 있다고 고백한다. 모든 것에 더 깊숙이 파고들어 과거에 끝났던 곳에서 머물러 있지 않고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고 있다면서 사람들의 얼굴이 많다는 점을 새롭게 인식한다. 얼굴을 바꾸는 사람들을 생각하다 마침에 얼굴이 비어버린 여자를 보고 공포에 휩싸이기도 한다. 


시종관이었던 할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가지고 감추고 있다가 마침내 스스로 알아서 지금껏 살아온 것과 앞으로 있게 될 것을 합쳐서 죽어간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죽어가는 것들의 숱한 부딪힘 속에서 불안을 더 깊이 체감한 주인공은, 인간이 많은 발명과 진보, 문화, 종교, 세계에 대한 예지력을 지녔음에도 인생의 표면에 머물러 있고, 사람이 죽어가는 데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둘러선 대중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며, 모든 현실의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이 어떤 것과도 연관 없이 흘러가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데 체념하듯 긍정한다.


정형화된 인간, 무엇이든 다 정확히 인식하고 예측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더욱이 함께하면서도 개별적인 인간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피상적 인식에 대해 넌더리를 내기도 한다. 더욱이 죽음을 배태한 생의 순간들은 서로에 대한 무관심과 진부함으로 뒤섞여 불안과 공포로 표출된다고 진단한다. 


깊은 내면을 뒤솟구며 주인공은 외할아버지 댁에서의 기억을 더듬기도 한다, 오래전 죽은 크리스티네 브라에의 등장과 정적 속에서의 그녀의 표표한 궤적은 어른들의 긴장과 대비되는데, 그의 의식은 더욱 확장되면서, 존재하지만 간과되고 있는, 거리의 허물어가는 집과 사람들을 응시하기도 한다.인식되지 않는 그들은 존재하는 것인가. 


그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타이르면서도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차단하는 그 무언가가 자신의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면서,죽음과 연관지어 과거에 알고 있던 것을 찾고, 언젠가 한 번 보았던 것을 찾지만 아무것도 거기 없음을 알게 되는 고독한 얼굴을 상상한다 


그의 방황과 초조, 걱정은 문학과 연극을 거치면서 마침내 신에 대한 인식까지 이르게 되고, 성서 속 탕자의 이야기를 반추하면서 사랑에 대한 주제로 승화한다. 죽음을 마주한 인간이 황폐할 수록 신의 은택과 사랑에서 치유될 수 있다는 데 그의 궁리가 다다른다.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면서 방대한 생각의 조각들을 대어 꿰맞추어야 해 결코 쉽지 않은 독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표현처럼 인생이란 서로 싸우며 발버둥치다가 끝판에는 한 삼태기의 흙을 뒤집어 쓰는 것으로 끝나게 마련이라는 상투적 완결이 아니라, 불안한 존재로서의 개별적인 인간이 하묘할 인식의 종착점은 신이라는 데 공감하게 된다. 

운명은 여러 무늬와 형상을 고안해 내기를 좋아한다. 그 어려움은 복잡한 데에 있다. 하지만 인생 그 자체는 단순함으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생명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 크기를 지닌 몇 가지밖에 우리에게서 얻지 못한다. 성자는 운명을 거부하면서 신을 대하여 이 위대한 것을 선택한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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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령사회 일본이 사는 법 - 10년 앞선 고령사회 리포트
김웅철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고령화 및 초고령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뉴스는 종종 들리지만, 의료나 부동산 측면에서 피상적인 내용만 다루어져, 사회 전반적으로 어떻게 변해야 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감이 서지 않는 느낌이었다. 


미래 사회 변화의 가장 강력한 변수가 되는 인구 변화를 먼저 겪고 있는 일본은 어떤 모습일까, 단순한 호기심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삽시간에 둑이 무너져 물바다가 되는 것처럼 어느 순간 사회 변환이 극치에 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독서에의 의지를 거들었다. 


조바심을 수용하면서도 꼼꼼하게 손가르치는 것처럼 사려 깊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무래도 목차의 구성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초고령 사회의 풍경을 열거하면서 제시하는 대신 초고령 사회의 신풍경, 유쾌한 시니어의 등장, 간병의 품격, 시니어 비즈니스의 막오름 등으로 구성되어 체계적인 훑어보기가 가능하다고 할까. 


가장 뚜렷한 장면은 아무래도 노인의 개념에 액티브 시니어가 추가된 부분이다. 평균 연령 62세의 대학 개설, 폐교 위에 세워진 어른들의 학교, 스마트 시니어 네트워크, 시니어들이 즐길 수 있는 고급 카페, 매장, 여행 등 앙트러 살롱 문화, 웰 다잉을 추구하는 종활 문화 등은 초고령 사회의 어두운 면만 강조하는 우리의 시선이 일부 수정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일본 사회의 문제나 특유의 문화 등이 초고령사회와 맞닿으면서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도 소개하는데, 치매 머니의 보호, 중장년 히키코모리의 부모 사후 플랜, 유산의 기부, 정년제 및 연금 문제는 우리도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은 노인의 신체적, 정신적 특성에 기인하여 사회를 재편하고 있다는 점이다. 슬로 계산대라든지, 반려견의 고령화 대비, 주문형 교통의 등장 등은 흥미롭다. 간병 문화에서는 입주자 모두 자신의 힘으로 배변이나 배뇨 활동을 하도록 신체적 강건함 유지에 주안점을 두어 기저귀 없는 요양원을 지향한다거나, 비데형 기저귀를 적용하여 배설 케어의 진화를 도모하는 부분은 놀라움을 넘어설 정도다. 수동적인 보건의료 중심의 케어가 아니라 한 마을이 나서거나 스타벅스 같은 굴지의 기업과 연계하는 등 사회 전반의 시스템 변화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점이다. 


시니어 비즈니스로 빈집 문제, 도시락 배달 서비스, M 세대와의 동거, 디지털 헬스 벤처 사업, 시니어를 위한 편의점의 변신, 성인 기저귀 재처리 회사의 등장 등 새로운 시장의 도래 역시 흥미롭다. 


피해갈 수 없는 초고령 사회를 맞이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막막한 부분이 있는데, 사회 전체의 시스템 변화나 노인에 대한 새로운 정의, 보건의료 체제의 개선, 새로운 시장의 창출 등 후발 주자로 나선 우리에게 전략적 시사점을 준다. 


40세가 되면 모두 회사를 떠나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20년을 기본 계약 기간으로 하고 각자 사정에 따라 연장하면 된다...중략..20-40세, 41-60세, 61-75세로 20년씩 3구간으로 나누어 인생에서 두세 번 정도의 전직이 일반화되는 사회를 만들자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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