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에 훤해지는 역사 - 남경태의 48가지 역사 프리즘
남경태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수많은 책이 출간되고 있지만, 저자의 이름만으로도 독자에게 신뢰를 제공하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므로 다소 딱딱한 인문학의 껍질을 손수 벗겨내어 속살을 먹기 좋게 잘라 융숭하게 대접하는, 근사한 기술을 지닌 저자의 소중함은, 떠나간 자리를 더욱 짙은 그리움으로 물들게 한다. 둔탁한 책상에서 거대한 암기 덩어리들로 다가왔던 학창 시절의 역사를,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문화, 교양의 분야에 걸맞게 배치하고 의미화한 저자의 치열함 덕분에, 몸 편히 기대고 누워 평안한 독서로 역사의 가르침을 탐독할 수 있었다. 새삼 감사하다.

 

역사 시간에 우리의 혁명-항거는 왜 이렇게 족족 실패했는지, 관군 대신 백성들이 직접 나서 싸운 전쟁이 왜 이렇게 많았는지 답답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정치 분야부터 가려웠던 곳을 막힘 없이 긁어주는 시원함이 느껴졌다. 지배이념을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에게 내면화함으로써 통치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지배자의 권위를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적 의미로까지 확장시켰던 절대성의 철옹성이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고 할까. 삼권분립을 외치면서도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기보다는 행정부에 기대어 대통령을 왕처럼 인식하는 우리의 정치 의식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혈통 정치가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참화를 통해 북한의 세습정치, 재벌의 경영 세습 등이 갖는 불안정성, 중앙집권체제의 단일 소유권 독점이 갖는 강고함의 취약점, 불법 쿠테타 정권의 권력욕과 레임덕에 대한 분석도 신랄해서 기억에 남는다.

 

신항로 개척과  금융제도의 발달, 세금을 의무가 아니라 권리의 통로로 인식한 서양과,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한 동양 사회의 차이점, 계약과 신용에 대한 동서양 인식의 비교, 수탈을 당하면서도 충성을 다하게 한 이념의 배태가 낳은 권력지상 사회의 면모, 분열을 기반으로 성장하는 자본주의의 본질 등은 경제의 역사가 시사하는 바를 성실히 다루었다.

 

사회를 다루는 장에서는, 상식을 위해 싸운 미국 독립의 혁명 정신, 좌파와 우파의 기원과 공식화의 필요성, 대동단결의 위험성과 파시즘, 중화세계에서 꽃피우는 서열주의,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를 대하는 섬세한 전환에서 시작되는 강국의 면모, 상하 개념과 역할 배분 개념의 차이가 낳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제도가 아닌 문화를 개선해야 하는 이유 등을 거론하면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탐색한다.

 

국제 상황의 변모도 세심하게 다루고 있는데, 서양 문명이 외부로 진출한 방식, 역사 자체의 흐름 속에서 그 경로를 따르는 역사의 전개 방식, UN과 교황의 유사점, 중세 발명품의 운명, 새로운 프레임의 등장과 변혁, 기후변동과 역사, 국경에 대한 인식과 통일 문제, 미국이 강국이 된 이유, 사회주의 등장의 이론과 현실의 괴리 등도 흥미롭다.

 

융합 방식 및 충돌과 정복 방식의 동서양 문명 비교, 노마디즘과 정착민의 정신, 해외 진출의 상반된 방식과 그 결과, 달력과 주권, 중화주의에서 비껴난 일본의 독자적인 역사, 진리와 천리의 철학 비교, 고전의 해체와 독해, 심층을 바로보는 안목과 구조주의 인식, 사용가치-교환가치-기호가치의 개념, 신학과 과학의 분리, 종교의 첨단성, 예술과 상업성, 호모루덴스의 중요성은 문화를 형성한 역사의 근간을 또렷이 보여준다.

 

교육을 관통하는 역사의 프리즘은 대학입시와 과거제, 대학 등록금 문제, 아비투스와 교육, 소비자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 국사가 아닌 지역사여야 하는 이유 등을 살펴본다.

 

현재의 좌표로 밀어온 역사의 파도는 눈에 쉽게 보이지 않으므로 더더욱  인식하기 어려운데, 저자 덕분에 쉽게 파도 위를 올라타고 파고를 넘나든 느낌이 든다. 언제 또 어디서 저자처럼 쉽고 풍성한 이야기로 채근질하는 글들을 만날 수 있을까.

어느 나라나 사회에 관해 가장 절약적으로 알게 해주는 방법은 뭘까? 다시 말해 최소의 비용과 시간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게 해주는 지식은 뭘까? 바로 역사다...역사에는 생략이나 비약은 없어도 지름길은 있다. 단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어도 전체 과정에 소요되는 기간과 노력을 줄일 수는 있다. 우리에게 부족한 역사적 두께를 채우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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