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는 시민에게 정치적 자유는 없다!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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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 안에 격변을 겪은 요 몇년 사이, 우리 사회를 새롭게 진단하고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주목한 정치철학자가 한나 아렌트라는 소식을 설핏 듣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치 철학에 문외한인 내가 어디서부터 읽어야할지 엄두를 못냈던 것이 첫번째 이유였고, 내가 지금 마주한 현장에서 아렌트를 읽는다는 의미에 대해서 통렬한 의지를 갖기 힘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코로나 19 팬데믹을 매개로 읽었언 책에서 아렌트의 언급을 보았고, 이진우 교수님이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간결하게 요약, 비판적으로 고찰하여 출간했다는 서평을 보자, 더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내 선택은 결과적으로 매우 옳았다.

 

저자는 전체주의를 이해하고자 했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새롭게 이해하는 틀을 새롭게 제공하고 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아렌트의 철학적 지평을 10가지의 주제로 나누어 설명한다.

 

 역사적으로 전체주의 정권이 무너졌다고 해서, 전체주의가 끝났는가, 무엇이 우리를 쓸모없는 존재로 만드는가, 괴물 같은 악을 저지른 자가 왜 괴물이 아닌가, 왜 완전히 사적인 사람은 자유가 없는가, 왜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져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자유로운가, 정치권력은 꼭 폭력적이어야 하는가, 정치는 왜 가짜 뉴스를 만들어야 하는가, 지배 관계를 넘어서는 평등의 정치는 가능한가, 어떻게 정치의 규칙을 만들 수 있는가.

 

10가지 질문을 제시하고, 아렌트의 저작들을 교차 시켜 해답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아렌트의 수많은 저작들이 어떤 좌표에서 쓰여졌는지 가늠하도록 안내하는 동시에, 사상의 핵심을 정리하는 데 효과를 발휘한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속살을 진단하면서, 특정한 정권의 형태가 아니라 정치적 운동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일갈한다. 전체주의는 이념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현실보다는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예측을 지향한다는 데 주목한다. 특히 더 공포스러운 것은 이념 자체에 관심이 없다보니, 이념에 대한 공적인 논의를 허용하지 않고, 경험을 통해 수정할 수 있는 기회마저 차단한다는 것이고, 거기에 현실을 바꿀 힘이 없으므로 논리적 일관성만 강조하면서 끊임없이 세뇌를 가한다는 것이다.

 

또 반복적인 선전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는데, 이 선전 자체가 과학성을 근거로 내세우며, 예언의 형태로 제시하면서 행동의 예측 불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가 하면, 결코 오류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과 단절되어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행위의 능력마저 파괴된다는 점을 간파한다. 즉 다양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만드는 총체적 지배하에 가둔다는 점에 주목하는데, 총체적 지배는 법적 인격을 죽이고, 개인으로서 죽을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도덕적 인격을 살해하며, 개성을 파괴함으로써 자발성을 박탈하는 단계를 거친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빅브라더에 맞서는 방법으로 일기쓰기를 채택한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에서의 잔학성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집요하게 탐색하면서, 전체주의는 인간을 무용지물로 만들기 때문에 더 공포스럽다고 진단한다. 대중은 외부의 자극에 쉽게 무너지는데, 계급과 계급의식의 보호막마저 무너지면, 배제되었다는 사실이 분노하는 대중으로 변모시킨다고 주장한다. 대중은 수적으로는 거대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원자화되어 있는 고립된 개인들이 그 중심에 서 있고,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심리적 기제 속에서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관찰을 서술한다. 게다가 인간의 자발성이나 예측불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전체주의의 전지전능함은 인간의 잉여화를 추구하면서 인간의 다원성을 무자비하게 파괴한다는 점도 밝혀낸다. 히틀러가 왜 언제나 동원할 수 있는 다수의 집단보다 생각하는 소수의 개인을 주목해서 압제해야한다고 주장했는지, 아렌트는 일종의 주해서처럼 설명해주고 있다.

 

악의 평범성과 함께 아렌트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부분은 단연 공적 영역과 자유에 대한 사유일 것 같다. 그녀는 공과 사를 구별하는 핵심으로 "행위" 가능성을 들고 있는데, 다른 것들은 혼자서도 할 수있는 것이지만, 행위는 타인의 존재를 전제조건으로 하는 배태적인 특권이라고 정의한 후, 폴리스를 예로 들어 폴리스야말로 공적 영역이자 자유의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공론의 영역에서는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여야 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비로소 자신이 누군가가 된다는 것인데, 이렇게 하려면 먼저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밝히고 타인과 내가 공동의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원성이야말로 자유의 토대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다원성이 내뿜는 갈등과 경쟁을 견디지 못한다면 자유는 성립되지 못하며, 다원성은 개인의 다양한 입장과 관점이 발현되는 의견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점도 강조한다.

 

아렌트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의 능력으로 규정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답하기 위해서는 말과 행위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정치적 탄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또 진정으로 정치적인 공론의 장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폭력의 반대는 비폭력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명명한다.

 

또 정치적 의견은 다양한 이해와 관점에 따라 형성되므로 순수한 사실을 지향하는 대신 다양한 해석, 논쟁, 논의를 통해 사실적 진리를 정당화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점도 지적한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을 비교하면서 자유와 체제의 이행 과정을 분석한 대목이나, 미학과 정치적 판단을 비교하면서 정치를 위해 자유를 지향하는 인간들이 가져야할 것은 판단력이라고 분석한 대목도 인상깊다.

 

한 번의 독서로 아렌트의 사상을 완전히 섭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툰 시도라도 해야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이 책이 그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사적 공간을 넘어서서 공적 영역으로 넘어가 치열하게 새로운 세계를 여는 행위가 없다면, 전체주의의 공포는 언제 어디서나 되살아날 수 있다는 그녀의 확고하고도, 일관된 주장은, 왜 이 시점에, 아렌트에  주목해야하는지 충분한 답변이 되지 않을까.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시잘할 미래가 없다면, 무엇인가 시작할 수조차 없다면, 우리는 인간성을 완전히 빼앗긴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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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HOW TO READ 데리다 How To Read 시리즈
페넬로페 도이처 지음, 변성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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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이해하겠다는 소망보다는 한 장이라도 세세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독서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으리란 소박한 욕심으로 시작한 까닭인지, 저자의 섬세한 설명과 역자의 명확한 번역은 오히려 예상보다 많은 부분을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일조했다.

 

데리다의 저작들을 소개하면서 그의 문제 의식을 설명하고 사례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전개했기에, 데리다에 관한 밀도 높은 강의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데리다는 플라톤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순수성에 대한 집착을 고발하면서, 절대적 이상성, 자연성을 가진 순수성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순수성이 진짜 존재해서 갈망하는 것이 아니고, 순수하다고 하는 그 이데아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를 숨기기 위해 순수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독법을 가져야 하는데, 그 숨겨진 채 작동하는 구조와 장치를 탐색하기 위해 해체하고,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살펴봐야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약물에 의해 훼손되는 이상화된 자연적 신체는 존재하는가, 대리모 임신 등 기술에 의해 혼란이 온다고 믿어지는 모성은 정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인지 면밀한 검토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말과 글에 대한 생각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데, 플라톤은 '진정으로 아는' 환상적인 이상을 설정하고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앎이 아니라고 하지만, 데리다는 오히려 우리의 생각 자체가 어디서 들은 생각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반문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언어의 불멸성, 명확성 대신 혼돈 가능성, 애매성, 의미의 연기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

 

데리다의 이러한 해체하기는 단일성, 통일성, 일반성 등을 표방하는 전체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에도 날카로운 흠집을 내기 시작한다. 그는 관념상 한꺼번으로 추상화되고 일반화되는 그러한 말하기와 생각하기가 얼마나 폭력적인 구별짓기, 배제하기로 작동하게 되는지 설명하면서, 가령 사회가 다양한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라는 생각은, 개인을 아주 단순한 존재로 함축시키면서, 개인들간에도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상충하는 믿음, 이해관계, 그 밖의 것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게 일순간에 사유의 영역 밖으로 몰아댄다는 통찰을 제공한다.

 

그의 독창성은 명료하게 전달되고 소통되는 언어가 가능한지 파고드는 데서 더 돋보인다. 예를 들어 개라고 읽는다고 해서, 모두에게 같은 '개'일 수 없다는 것이다. '개'라는 기호는 명확하게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종류의 연합, 치환, 결합 등에 의해서 다양한 '개'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의미화된 개념이라는 것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무수한 관계와 네트워크 속에서 미분화되면서 발생한다는 것. 데리다의 방식으로 보고 읽으면, 각자가 바라보는 무한히 미분화되는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며, 동시에 미분화된 그 세상들이 만나고 다독여져 적분화된 세상의 외연이 존재하는 것지만, 결코 그 외연은 동일하고 고정된 것으로 굳혀질 수 없다. 시시각각으로 변화되고, 각자만의 의미가 연합되고, 결합하며 발현되는 세계의 다양성과 충만성은 가히 상상이 안될 정도다.

 

데리다는 루소의 저작을 분석하면서, 그가 위계적이고 이항적인 대립에 천착하고 있는데, 자연에 대한 결여를 대리보충하는 방식으로 관념이 만들어진다는 의견에 반대하고 오히려 자연 안에 이미 타락과 오염이 포함되어 있으며, 각 항을 뒤바꾸는 국면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항들이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게 아니라, 선과 악, 높음과 낮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데까지 이르른다.

 

또 의사소통의 법칙으로 오해의 법칙을 채택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현대 의사소통의 수많은 효과들을 걷어내야한다고 주장한다. 의사소통이 실패하고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기술 발달에 따라 보여지는 효과, 즉 의사소통의 즉각성, 현존성의 환상을 벗어내고, 의사소통에 있어서 비이해, 비소통 등을 직접 마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SNS, 인터넷 등으로 끊임없이 소통하고 공동체가 확장되며 동일한 생각으로 이상을 꿈꾸고 있다는 착각이, 의사소통의 방해자라는 생각이 참신하다.

 

순수한 애도, 환대, 선물과 용서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것들은 무조건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므로 오히려 불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타자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개방적이지 않은 우리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야만, 오히려 그렇다면 최대한 애도하고, 환대하며 선물하고, 용서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탐색하면서, 현실적으로는 최선의 방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성을 갖기에 애도하고, 환대하며, 선물을 주고, 용서한다고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면, 선물은 선물로, 애도는 애도로, 환대는 환대로, 용서는 용서로 간주되지 않으면서도,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는 것이다.  

 

풍부한 배경 지식 없이, 혼자서 제 수준대로 고군분투하느라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의문이 드는 대목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또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방법은 없는지,  적극적으로 찾아보도록 독려하는 마중물 같은 책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데리다는 진보의 가치에 대해 믿지 않고, 진보를 희망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지속적인 이상들을 위해 무엇이 또는 누가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또한 생각해야만 한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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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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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알려주는  방식 중에서 답을 직접 말해주는 방식과 답을 알아차리도록 인도하는 방식 중 어느 것이 더 깊은 여운과 깨달음을 줄까. 답이 신이라면, 답을 말해주는 종교와 답으로 안내하는 삶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엔도 슈사쿠는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하는 방식으로 <깊은 강>을 집필한 것같은 생각이 든다.

 

신은 존재할까, 신의 존재가 인간에게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서야 그가 왜 자신이 죽거든 <침묵>과 <깊은 강>을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했는지, 감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설은 인도를 찾은 사연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주가 된다. 아내를 잃은 후 다시 태어나겠다는 아내의 유언을 기억하고 마뜩지 않으면서도 떠나온 이소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주목받기를 원하면서 젊은 날 오쓰를 유혹했지만, 이제는 다른 남자와의 결혼 후 이혼녀가 된 미쓰코, 늑막 유착에 폐렴까지 앓다가 죽음의 사선을 넘으면서 자신 대신 코뿔소새가 죽었다고 믿는 동화작가 누마다, 미얀마의 전장에서 살기 위해 동료의 살을 먹고 죄책감에 시달리다 마지막 위안을 받은 후 죽은 쓰카다의 동료 기구치, 어렸을 때부터 카톨릭 집안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신앙을 가졌지만,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에 의문을 품고 파문당한 후 겐지스강에서 힌두교인들을 위한 장례식에 참여하다가 화난 민중들에 의해 죽어가는 오쓰. 여기에 다른 이들이 찾지 않는 인도의, 특히 죽은 자들의 생의 마지막 도착지 겐지스의 모습을 사진을 남겨 이목을 끌려는 철부지 신혼부부가 대비된다.

 

오쓰를 제외한 네 명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작가의 대변인 격인 주인공은 미쓰코라고 할 수 있다. 미쓰코는 대학시절 바보같다 싶을 정도로 신앙을 지키는 오쓰를 유혹해 불장난같은 사랑에 빠져들게 한 후 이별을 선언함으로써, 그를 타락시키고, 신에게서-삐쩍마른 십자가의 젊은 남자, 양파-로부터 그를 빼앗았다고 자부한다. 신 따위에 매달리는 고루한 그를 아무렇지 않게 내친 후에는 영민하게 적당히 계산적이고 전략적인 결혼에 성공한다. 프랑스로 떠난 신혼여행에서 그녀는 남편과 각자 여행을 즐기자고 제안하고, 평범하고 무료한 일상 속에서 권태와 위선적인 결혼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남편을 독살하려한 <테레즈 데케루>를 떠올리며 신부가 되려고 유학 온 오쓰를 만나러 간다. 자신이 신을 버렸지만, 신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묘한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교리에 완전히 수긍하지 못하고 있는 어정쩡한 그를 만난 후 미쓰코는 신이 그를 다시 되찾아갔다고 느낀다.  이혼 후 인도에서 만난 오쓰는, 더러운 사창가 여자들의 장례까지도 도와줄 정도로 순전한 마음으로, 약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신부가 되지 못했지만, 오쓰는, 예수님이었다면 외롭고 처연한 이들의 처지를 도와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자신을 투신해서 그들을 돕다가 사소한 오해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한다.

 

인도 현지 무속인에게 속아 환생했다는 아내를 찾아가지만 도리어 실망하고 돌아오는 이소베,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말하면서 겪은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어도 도무지 소통할 수 없는, 변해버린 세상에 마주선 기구치,  인도 현지에서 보답이라도 하듯 새를 사서 놓아주는 누마다의 모습은,  각자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답변처럼 그려진다. 각자에게 다른 이유로 필요한 신이지만, 겐지스에서 목도한 수많은 죽음 앞에 이르자, 그 너머의 시작을 위해서라도 신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는 데 다다른다.

 

신이 아니라면 도무지 위로할 수 없고, 새롭게 시작할 수 없도록 하는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서, 작가는 희미해져가는 영성을 되살리려 마지막 혼을 불태우는 것만 같다. 신은 존재라기보다는 손길이라고 표현하는 오쓰의 고백은, 박제화되어 저 멀리 있는 신이 아니라, 순간순간 함께 하는 따스한 그 무언가라는 작가의 생각을 대변한다. 명료하게 선언하고 당당하게 부르짖는 종교심에서 탈피해, 침묵하며 삶의 중심으로 들어가 묵묵히 신의 손길 아래 그의 도구가 되고, 그의 부활이자 환생이 되는 신앙이어야 하는 이유.  죽음의 끝에서 어쩌면 작가가 찾은 마지막 정답이었기에, 그는 잠잠한 기쁨으로 신 앞에 가져갈 최후의 선물로 이 작품을 택했으리라.  

다양한 종교가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지점에 모이고 통하는 다양한 길이다. 똑같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한, 우리가 제각기 상이한 길을 더듬어 간들 상관없지 않은가....중략, 그렇다면 자넨 어째서 우리들 세계에 머물러 있나? 선배한테 이렇게 타박을 받은 적도 있다. 그토록 유럽이 싫거든 냉큼 교회에서 나가면 되잖은가. 우리가 지키는 건 기독교 세계이며 기독교 교회이니까. 나갈 수 없습니다, 하고 오쓰는 울먹이듯 말했다. 저는 예수에게 붙잡혀 있습니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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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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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예전보다 힘을 잃었다고 해도 어느 순간 다시 문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찾다보면, 그 중 하나는 소설가의 역할도 하나의 답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대를 위로하고 비극을 껴안게 하며 그 와중에도 인간성의 구현을 통해 다시 일어서고 출발할 수 있도록 돕는 제사장이면서 치유자이자 철학자 같은 동시다발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누가 있을까 싶을 때, 답안의 모서리에 희미하지만 확고한 모습으로 서 있을 이. 그는 소설가라고 자신있게 답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 밀란 쿤데라의 섬세하고 대답한 필치는 상상의 나래를 확고하게 뒷받침한다.


<농담>의 줄거리는 간단한다. 네 명의 화자가 각각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이들의 이야기가 맞닿아 마침내 퍼즐처럼 마추어지면서 서사로 모아지는 구조다.

 

주인공 루드빅은 대학에서 공산주의에 앞장서는 학생 연맹의 임원으로써 활동하다가 농담처럼 여자친구 마르케타에게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라는 편지를 보냈고, 이것이 발각되어 학교에서 쫒겨난다. 이 짧은 엽서로 그는 길 밖으로 추방되었고, 군대 생활이 시작된다. 탄광에서의 노동, 강압적인 병영 생활이 교차되는 일상에서 그는 한줄기 빛 같은 루치에를 만나 사랑을 시작하는데, 루치에는 결정적인 순간에 성관계를 거부하고는 자취를 감춘다. 루드빅은 시대가 바뀌면서 나름 안정을 찾아가고, 우연한 기회에 복수를 위해 자신의 농담을 지렛대 삼아 곁길로 가도록 밀어버린 제마넥의 아내 헬레나를 유혹지만, 새로운 애인과 즐거운 제마넥을 마주치면서 복수마저 실패한다.

 

헬레나는 제마넥의 아내로 우연히 루비딕을 인터뷰하면서, 루비딕과 일탈을 감행하고, 그가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목적을 위해 접근한 것을 깨닫고 죽기로 결심하고 약을 털어넣지만, 그 약이 변비약인 바람에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루비딕에게 발견된다.

 

야로슬로브는 체코의 민속 악단을 이끌면서 이 민속 음악이 재즈처럼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릴 뿐만 아니라 여러 의식들의 통합을 통해서, 구별이 아니라 연합을 구현하게 된다는 루비딕의 설득에 넘어가 민중 예술이 어느 곳에서든지 자리잡을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공산주의 정부의 지원을 받아 승승장구한다. 그리고 공산주의 시대의 퇴색과 함께 빛바랜 낡은 환영처럼 퇴조하는 악단의 운명을 기마 행렬 의식의 날 똑똑히 목도한다. 의식의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도망친 아들의 행방을 알고 쓸쓸해하던 그는 복수에 실패한 루비딕과 함께 연주를 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킨다.

 

코스트카는 기독교 신앙 때문에 공산당 총회에서 위험에 처했는데, 신앙에 대한 입장은 달랐지만 루드빅의 옹호를 받게 된다. 신앙을 지킨 그는 교화가 필요하다는 당국의 판단에 따라 국영농장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루치에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루치에가 특유의 순진함과 순결함에 대한 집착 때문에 성관계를 거부한 것이 아니고 집단 성폭행의 피해를 입은 후 트라우마가 생긴 사실을 알게 된다.

 

작가는 네명의 화자를 통해서 공산주의 시대의 암울했던 시대상 뿐만 아니라 농담처럼 일어난 일상의 무수한,  파편화된 삶의 조각들을 생생하게 맞추어냈다. 시대의 조류 속에서 여러 개의 얼굴을 하면서 분열적 모습으로 살아낸 이들의 모습은, 스스로를 속이고 기만하면서 시대에 걸맞는 모습으로 사는 것처럼 연기할 수 밖에 없는, 부조리로 내몰린 인간의 운명도  날카롭게 포착한다.

 

게다가 끊임없는 쉼표로 이어지므로, 뒤따르다보면 독자들의 숨까지 차도록 내모는 유려한 문장은, 각각의 주인공들이 처한 복잡미묘한 심경을 정확하게 묘사하는가 하면, 음울하고 음산하며 도무지 출구가 없는 것 같은 시대상의 냄새와 촉감까지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누구든지 <농담>을 읽고 나면, 밀란 쿤데라가 도무지 읽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드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데 모두가 공감할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이해되지 않는, 역사 저편의 낡은 이야기를, 꾸역꾸역 꺼내어 담담하지만 눈 치켜 뜨고 직면할 수 밖에 없도록 스멀스멀 포획하는 뛰어난 역량 때문에,  마지막 책장을 덮는 게 내내 아쉽게 느껴질 정도다.

 

나는 먼지 이는 보도를 따라 걸으며, 내 삶을 짓누르는 공허, 그 공허의 무거운 가벼움을 느꼈다. 루치에, 그 안개의 여신은 처음에 내 손에서 빠져 달아나 버리더니, 이제는 정확하게 미리 계획된 나의 복수를 허망하게 만들어버렸고, 이제는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에 대한 나의 회상조차도 어떤 비통한 조롱거리로, 무언가 알 수 없는 기괴한 올가미로 만들어버린 것이다...나는 그녀의 존재를 나에게로 곧바로 향해 있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였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내가 체험한 상황의 기능에 불과했다. 내 삶의 이 구체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모든 것, 그 자체로서의 그녀의 모습은 모두 간과되었던 것이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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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철학 - 이진우 교수의 공대생을 위한 철학 강의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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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자가 아닌 다음에야 철학의 계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어쩌면 철학자의 핵심 사상일텐데,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인 주제를 다루는 책을 찾기는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은 포스텍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철학 강의와 네이버캐스트에 연재하면서 얻은 자극들을 토대로 구성되어 동기유발면에서나 내용적인 면에서도 현장성을 갖춘 베스트 강의록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저자는 의심을 키워드로 역사를 의심했던 마르크스, 신을 의심한 니체, 의식을 의심한 프로이트, 존재를 의심한 하이데거, 언어를 의심한 비트겐슈타인, 계몽을 의심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타인을 의심한 샤르트르, 예술을 의심한 베냐민, 과학을 의심한 포퍼, 정치를 의심한 아렌트의 사상과 의미를 탐색한다. 각 철학자의 사상을 이해하고 관통하는 공통의 핵심 키워드가 의심이라면, 각각의 철학자의 사상을 대변하는 주제를 철학자마다 2가지의 질문과 연계하여 구성했는데, 제목만 보아도 철학자의 관심사와 사상의 영역을 가늠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실제 강의를 기본으로 재구성한 책의 기획력이 가지는 이 책만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에 대해서는 단순한 개인의 의식뿐만 아니라 사회적 의식과 연계될 수 있다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 프로이드는 자아가 리비도의 욕망과 대결을 통해 형성되듯 문명도 공격 본능과 대적함으로써 발전한다고 보았는데, 자아가 리비도를 억제하기 위해 초자아가 존재하는 것처럼 문명도 문명적 초자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요소로 폭력과 감정적 유대 두 가지를 꼽으면서 문명이 발전해도 행복해지지 않은 인류의 문제를 세 가지 대원칙으로 설명한다. 인생의 목적을 결정하는 것은 쾌락의 원칙이며, 이 원칙에 의한 프로그램들은 완수될 수 없으며 성 본능을 목적달성이 금지된 충동으로 바꾸어야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쾌락의 원칙이 결코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한다는 것. 삶이 쾌락의 원칙으로 지배받지만 현실 속에서 좌절할 수 밖에 없다면 지속적인 행복을 위해 성 본능을 목적달성이 금지된 충동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성 욕구로 결합된 가족을 넘어서서 대상의 범위를 넓혀가는 동시에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쪽으로 바꾸어야 지속가능한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성과 의지가 아니라 쾌락이라는 본능으로부터 출발하는 문명의 발전에 대한 통찰은 프로이트의 천재성을 돋보이게 하는 장면.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의 사상도 이성과 과학에 절대 권력을 부여하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그들은 계몽을 통해 자연의 다양성이 축출되어 추상화되고 단순화되는 것에 대해 염려한다. 과학과 기술은 측량의 무기를 가지고 철저하게 자연을 대상화하고 모든 현상을 기호언어로 전환하다보니 철저하게 물화한다는 것이다. 죽은 것과 산 것을 동일시하던 신화는 철저히 부서지고 계산하고 통제할 수 있는 구조와 패턴으로 대치시키는 무지에 대해 일갈한다. 이와 더불어 수학화되지 않은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전락한다. 더 많은 것들을 해석하고 알아내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더 많은 것들을 잃어가고 알지 못하게 되는 역설을 직면할 수 밖에 없다.  또 문화산업은 대중을 기만하는 계몽의 일종이라고 판단하는데, 다양한 욕구와 가치를 충족시켜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상품과 시장을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게 하면서 지배 관계를 서서히 구축해나가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우리에게 다양한 선택의 기회가 있는 것처럼 포장되지만, 문화산업이 제시하는 문화의 척도를 받아들이도록 내면화하면서 은연중에 대중을 기만한다는 것. 미세화된, 너무 부드럽고 달콤해서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지배 관계의 내면화는 철학이 왜 필요한가, 올곧은 답변처럼 들리기도 한다.

 

 

베냐민은 예술의 본질적 변화에 주목한다. 제의적 목적에서 전시의 목적으로, 손의 예술에서 눈의 예술로 바뀌는 예술의 기능과 본질에 집중하는 한편 예술과 정치화, 정치의 심미화를 통해 파시즘의 선동과 선전의 이면을 파고든다.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배우를 현실과 분리시키고, 현실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침잠하고 명상하는 대신 정신을 분산하고 오락으로써 기능하는 데 수많은 대중들이 동시에 수용하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대중을 동원한다는 통찰을 제공한다.그러므로 그는  전체주의가 어떻게 현실을 이미지화하고, 동시에 대중들을 오락하듯 아무 생각 없이 몰입하게 하면서 자유자재로 자신의 의지인양 스스로 동원가능한 존재로 변신시키는지 그 전략적 핵심을, 영화를 통해 기가막힌 독법으로 읽어낸다.

 

이 책은 서두에서 공대생을 위한 철학 강의라고 명명하고 있지만, 철학적 사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편안하게 몰입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친절한 길잡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철학은 동일한 문제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의 목소리가 지배하면 전체주의가 되고 다양한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면 민주주의가 된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경험한 역사적 순간에 이 책을 내게 되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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