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만자」와 ''에 대하여
1. 죽음에 대한 이야기
죽음을 이야기의 중핵으로 끌어안고 있는 만화를 우리는 최근 들어 적잖이 만났다. 「죽음에 관하여」(시니, 혀노)와 「신과 함께」(주호민)라는 걸출한 두 작품이 사후 세계라는 가상을 통해 그것을 다루었다면, 꼬마비의 죽음 3부작(「살인자ㅇ난감」, 「S라인」(이상 완결), 「미결」(미완))은 작품 속 현실에 흥미로운 변주를 가미하여 죽음의 구석구석을 사유해 보도록 이끈다. 황준호의 사이코패스 스릴러(「인간의 숲」, 「악연」 등)나 구아바의 옴니버스 「연」처럼 죽고 죽이는 범죄 사건들을 통해 ‘사람이 만들어내는’ 죽음과 대면하게 하는 작품들도 있다. 여기에 윤태호의 「미생-사석 편」처럼 삶의 자리를 찾지 못한 상태의 직장인이 ‘죽임당한 직장인’을 만나는 에피소드가 담긴 작품을 떠올린다면,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의 리스트는 더 늘어난다.
이렇게 새삼 죽음을 다룬 작품들을 떠올려 보는 것은, 올 한 해 우리가 적잖은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데에 이유가 있지는 않다. 실은 가장 근래에 완결된 죽음에 관한 만화 「아만자」를 두고 이야기를 해 보려는 데 이유가 있다. 하지만 우리 곁을 떠나간 이들의 이름을, 그 죽음 하나하나의 개별성을 「아만자」를 이야기하며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도 이 작품의 의미를 짚어내는 한 방법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에도 해당되겠지만,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때로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단 걸 새삼 상기하며, 「아만자」의 주인공이 살아간 삶과 그의 죽음을 보며 떠올린 글자 ‘’과 함께, 이 에세이를 써내려 간다.
Ⓒ김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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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만자」 64화 ‘아가’(2014.5.5.)는 세월호 참사를 염두에 두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가는, 잃어버린 모든 분들께.” 보내는 작가 김보통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2. 죽음 앞에 선 ‘아만자’의 삶
제목이 지시하듯 「아만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앞서 암환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지배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까닭은 우선은 우리의 암에 대한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암은 죽음과 직결되어 있는 병이다. 이는 통계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매년 ‘사망원인통계’(통계청) 1위는 늘 압도적으로 암이다. 나도 주변의 많은 이들을 암으로 떠나보냈다. 이러니 ‘암에 걸리면 죽는다.’는 생각을 떨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이런 현실의 사정을 리얼하게 반영하듯, 「아만자」의 암환자 자신에게도 암 선고는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그는 4기 위암 환자다. 작품 속에서는 대화를 통해 짧게 분위기만을 제시하지만(3화), 위암은 4기일 때 사망률이 95%에 육박한다.(연세대학교 의료원 암센터) 그렇기에 암 선고를 받고 나오는 길에 그는 이렇게 읊조린다. ““당신은 곧 죽습니다.” 그렇게 얘기해 줬다면 좀 더 실감이 났을까.”(1화)
이제 작품 속의 ‘아만자’는 죽음을 직면한 채로 살아야만 한다. “짧으면 세 달, 길면 기~차” 하고 농담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저 농담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안다. 선고 이후로 그는 자신의 남은 생을 숫자로 환산하는 일이 낯설지 않은, 암환자다. 이렇게 죽음과 잇닿은 삶이란 이전의 삶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삶의 모든 요소들이 다르게 지각되고 죽음 앞의 삶에 적용된다. ‘제한된’ 시간에 대한 관념이 정신을 지배하고 병원이 일상의 공간이 되는 것과 같은 명백한 변화와 함께, 언어와 감각 그리고 감성 등 모든 인간적인 부분에서 격변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격변의 이모저모는 「아만자」 속에서 두 개의 세계를 통해 표현되고 의미를 만든다.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두 시공간, 곧 일상의 세계인 현실과 모험의 세계인 내면이다. 두 세계가 교차하면서, 「아만자」는 앞서 언급한 죽음을 다룬 만화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읽기와 이해를 만들어 낸다. 서사의 진행 속에서 두 세계는 번갈아 출현하는데,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각각의 세계에 머무는 시간과 방식 그리고 두 세계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두 세계 가운데 처음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현실 세계다. 암 선고를 받고 가족과 마지막 집밥을 먹고 항암을 하는 등 현실적인 암환자의 일상이 그 속에서 그려진다. 초반부에서 농담과 정보를 버무려 독자에게 재미를 느끼게 하고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곳도 이곳 현실 세계다. 암환자의 일상은 선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단적인 예를 그의 말하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 그가 미래 시제로 하는 말은 계획이나 약속이 될 수 없다. ‘못할 것이다’의 형태가 아닌 이상, 그것은 농담이거나 거짓말이거나 자조다. 여자친구에게 영국 여행을 들먹이는 순간이 그렇다. 하지만 미래 시제의 말뿐만이 아니다. 그의 갖가지 말이, 행동과 감정과 감각이, 장난이거나 자학이거나 위장이 되고 만다. 병문안 온 친지 앞에서 ‘어른의 위로’(71화 및 여러 화)를 주고받는 것도, 병자성사를 위해 방문한 신부 앞에서 부리는 패악질(89화)도 모두 그렇다. 유일하게 진실인 것은 고통의 감각을 표현하는 육체의 신음뿐이다. 이 표정과 비명이 그것만으로도 강력한 핍진성을 지니고 있다면, 현실의 다른 언행과 감각들 이면의 진실은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기’를 통해 드러난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이 바로 내면 세계, 즉 숲이다.
Ⓒ김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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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만자」는 때로 초점화자를 여자친구나 어머니와 아버지 등 가까운 사람으로 바꾸기도 하는데, 이는 굉장히 적절한 사족이다. 이렇게 초점화자가 변화되는 부분도 두 세계만큼이나 그마다의 효과를 산출해내는 개별성을 지닌다. 이에 대해서도 많은 흥미로운 것을 논할 수 있겠지만, 적절한 사족이 되기 어려우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려 한다. 김철규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아쉽지만 생략한다.
3. 숲의 알레고리
「아만자」가 초반부에 독자를 끌어들인 힘을 현실 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면, 중후반부터의 흡입력은 단연 숲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현실 세계의 ‘아만자’가 서늘한 농담과 핍진한 고통의 몸짓을 통해 독자에게 다가갔지만,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대부분 독자의 현실과는 판이한 투병의 기록이 그것만으로 계속해서 보편적으로 흥미롭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은 작품의 현실 속에서 가족이 겪는 (경제적) 고뇌의 일면을 드러내는 진실이기도 하지만, 그 현실을 가상으로 지켜보는 독자에게도 역시 (미학적으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보통 작가는 데뷔작이란 게 무색할 만큼, 상당히 사려 깊고도 정교한 방식으로 ‘길면서도 짧게 느껴지는 병’의 여정을 그려낸다. 그것을 이룩하는 시공간이 숲으로 불리는 ‘아만자’의 내면 세계다.
숲은 모험의 세계다. 병원이나 집에만 머물러야 하는 ‘아만자’에게 정신(무의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의 모험을 가능하게 하는 이 세계는 ‘아만자’의 분신에 해당하는 상징을 두고 있다. 불쑥 숲 속에 떨어져 모험을 이어가는 이 분신을 일단 ‘순례자’라 부르자. 숲 속에서 ‘순례자’는 마치 게임에서처럼 퀘스트를 실행해 간다. 그와 함께 독자도 나름의 퀘스트를 수행한다. 상징적 의미를 찾으려는 작업이 그것이다. 숲이 무엇인지 생경한 이름의 짐승들이 무엇인지 사막이 무엇인지 또 사막의 왕은 무엇인지를, 그것들이 현실 세계의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를 계속해서 물으며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하지만 이 퀘스트는 녹록치 않다. 작가도 작품도 거의 힌트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상징적 독법을 향해 열려 있으면서도 상징화를 거부하는 작품의 몸짓은 여러모로 이야기의 흡입력을 키워나간다. 풀릴 듯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어보려는 독자의 충동을 동력으로, 이야기는 이어지고 그와 함께 알레고리의 효과를 산출해 내는 것이다.
상징과 알레고리는 유사하지만 상반된 방식으로 작동하는 수사법이자 독법이다. 섬세하게 설명하고 적용할 필요가 있지만, 여기서는 벤야민의 논의를 빌려 둘의 도드라지는 차이를 총체/파편에서 착목하여 「아만자」를 읽어나가려 한다. 상징은 의미를 총체화하려는 충동과 관련 깊다. 십자가는 예수가 못박혀 죽은 로마제국의 사형대이지만, 기독교와 엮이면서부터는 기독교의 모든 것에 대한 관념과 지식을 환기하는, 즉 전체와 부분 모두를 지시하(려)는 기호로 쓰이고 있다. 반면 그리스어 allegoria(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기)를 어원으로 하는 알레고리는 전체를 상상할 수 없는 파편을 지시한다. 이미 깨어졌으며 그 전체상을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잔해가 알레고리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알레고리적 독법을 통해서 별자리처럼 의미가 발견되는 것이다. 폐허 속에서 주워 올린 이 파편의 알레고리는 특히 ‘순례자’의 ‘마음’을 읽어내는 데 유용하다.
‘순례자’는 사막에 있는 자신의 마음을 찾으라는 비커리의 말대로 사막으로 향한다. 달랑쇠에 따르면, 마음도 ‘순례자’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사막에서 ‘순례자’의 마음으로 보이는 것들과 만날 때마다, 작품은 동시에 아니라고 말한다. 작품 속에서 현실과 내면이 긴밀히 연관되는 장면이 그려지며, 마음 같은 것들은 두 세계에서 같은 대사를 하기에 그것을 모르지만 직관하는 ‘순례자’는 물론 그것을 보고 있는 독자들도 마음 같은 것들이 마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때마다 작품은 ‘까만콩’이라 불리는 캐릭터를 통해 “네 마음이 아니야”라고 이르는 것이다. 나중에서야 밝혀지지만, 이 마음 같은 것들은 ‘마음의 조각’들이다.
그렇다. 마음의 조각은 마음이 아니다. 사막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아마도 마음의 조각들일 테지만, 무엇도 선명하지 않다. 어쨌든 ‘마음’이 아닌 이 조각들은 ‘마음’을 만나는 과정, 즉 알레고리의 파편과 그 별자리를 발견하는 과정을 이룬다. 하지만 여정 마지막까지도 총체로서의 마음을 만났다는 확언은 ‘순례자’도 독자도 얻지 못한다. 마치 단일한 전체인 마음이란 게 존재하는지 묻는 물음처럼, 혹은 조각들을 만나며 그것이 ‘나’의 ‘마음’이 아님을 확인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듯이 침묵만이 크게 울린다. 「아만자」는 ‘순례자’와 독자에게 ‘아만자’의 이름만을 알려주고 모험을 마친다. 모험이 무엇이었고 숲이 무엇이었는지, 사막의 뜻과 사막의 왕이 무엇이었는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로. 그 알레고리를 해석할 권한은 모두 ‘순례자’의 길을 따라나선 독자에게 열려있다. 누군가 그 열림을 닫아버리지 않는 한, 독자들의 수만큼 각자의 별자리가 발견될 것이다.
Ⓒ김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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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커리는 ‘늙고 병들거나, 심한 고생살이로 살이 빠지고 쭈그러진 여자’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숲 세계의 가장 원로라 할 존재에게 이런 이름을 붙인 김보통의 작명센스는 확실히 보통은 아니다.
Ⓒ김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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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랑쇠는 필자가 「아만자」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다. ‘침착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몹시 담방거리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달랑쇠의 농담은 더없이 침착하다.
4. 「아만자」와 우리들의 사회상, 혹은 별자리
어느 작품이든 그 작품만의 사회‘상相’과 사회‘상想’을 담고 있다. 전자가 작품 전반을 통해 포착·표현되는 현실 사회의 모습이라면, 후자는 작품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혹은 조금이나마 나은) 사회에 대한 상상이다. 그런데 작품 속 사회상은 단일하지 않을 수 있다. 「아만자」 속에서도 ‘아만자’의 사회상과 김철규의 사회상은 다르다. 충분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그것도 여자친구의 그것도 마찬가지로 다르다. 작품의 사회상은 이런 인물들의 사회상과 서사가 표출하는 사회상들의 합 혹은 충돌로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는 무엇이지만, 작품의 그것이 최종적인 것이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복수의 개별 사회상들이 모두 독자가 지니고 있는 두 사회상과 만난다는 점에 있다. 이 만남이 바로 작품이 현실 사회에 작용하는 과정이다. 만남이 의미 있다면, 독자는 자신의 사회상들을 작품을 통해 수정하고 그가 다시 바라보게 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때의 삶은 작품 속의 사회상을 만나기 전과 다른 무엇이 될 것이다.
「아만자」와 그 아래 달린 댓글들(로 대표되는 독자 반응)은 그 만남의 과정을 조망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텍스트였다. 일단 작품 속에 담긴 사회상들이 개별적으로 또렷하고도 섬세하다. 또한 이 작품이 그 속의 사회상들과 독자의 사회상들이 잘 만나도록 이끄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흡입력과 핍진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독자들의 댓글에서 이는 방증된다.(특히 99화가 풍성하다.) 하지만 이 글은 그런 사회상들을 상세히 논하기보다는 그 만남을 이루는 과정을 일부나마 다룬 것으로 일단 끝을 맺는다. 노파심에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상징적 독해의 충동마저도 알레고리의 폐허로 가닿게 하는 동력으로 전환하는 힘이 이 작품에는 있다. 그렇기에 나의 이해와 독해가 작품과 독자의 만남에 외려 방해가 되지 않기를 새삼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는 글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려 한다. 나는 「아만자」에서 “죽음을 지배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까닭은 우선은 우리의 암에 대한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 썼다. 그리고 그 전에는 이렇게도 썼다. “우리 곁을 떠나간 이들의 이름을, 그 죽음 하나하나의 개별성을 「아만자」를 이야기하며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도 이 작품의 의미를 짚어내는 한 방법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문장들을 사회와 그 사회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며 썼다. 또한 죽음에 대한 만화뿐만 아니라, 암에 대한 만화를 최대한 접하고 그 각각의 개별성을 짚어보고서 이 글을 썼다. 썼듯이, 아마도 “우리” ‘사회’의 “암에 대한 인식”은 ‘죽음’과 직결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통계도 경험도 ‘진리’를 – 그런 것이 있다면 – 보증하지는 않는다. 암을 이야기한 이전의 만화들은 오히려 죽음보다는 삶에 더 큰 방점을 찍어왔던 것도 그런 사회상이 존재하고 상상 가능함을 증명한다. 암환자의 자전적 만화인 「오방떡소녀」(조수진, 「암은 암, 청춘은 청춘」으로 출간)나 「암이란다. 이런 젠장」(미리엄 엥겔버그)이 보여준 긍정성과 삶에 집중한 사색은 드물고도 소중한 사례다.
또한 그런 맥락에서 「아만자」가 암환자의 이야기에서 죽음을 이야기한 것은, 이전의 만화들에서 보려던 지점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한다는 데 다시금 의미가 있다. 그것은 지배적인 사회상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차원을 달리 하는 새로운 시선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일이었다. 「아만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살아간 젊은 말기 암환자를 ‘순례자’ 삼아 그린 죽음으로의 모험은, 삶의 개별성만큼이나 소중한 죽음의 개별성을 충분히 이해 가능하도록 그려냈다. 특히 하나의 사막이지만 누구도 대신 걸을 수 없는 나만의 사막으로 제시된 알레고리는, 사막이 곧바로 죽음을 상징한다는 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값진 답을 우리에게 떠올리게 한다. 죽음은 모두에게 단 한 번은 꼭 찾아온다. 또한 죽음은 각자의 것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오랜 전언은, 모두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자의 죽음을 생각하게 하며 또 그 죽음을 공통적인 속성으로 껴안고 있는 우리네 삶을, ‘’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읽은 사막의 뜻은, 이렇게밖에 말해질 수 없는 지난한 생각들이다.
올 한해 떠나간 이들의 개별적 죽음을, 나와 연결되어 있는 그 죽음을, 파편으로 그러모아 들여다본다. 기억의 부피와 무게만큼 빛나는 그 별자리는 어떤 뜻을 들려주고 있는가. 나에게 우리에게, 또한 이 사회에.
조익상
문er라는 필명으로 <인문교양만화잡지 SYNC>에서 만화 비평을 썼다. <빅이슈>와 <에이코믹스>, <BOGO>에 이런저런 만화 관련 글을 기고하면서부터는 실명을 썼다. 이렇듯 뭘 써야 할지 잘 모르는 채로 꾸역꾸역 공부하며 쓴다. 작품과 독자의 만남에 누를 끼치지 않기만을 소망하며.
이 글에서 언급한 작품들(가운데 출판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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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저찌 하다보니 서재에 너무 오랜만에 글을 올리네요.
그간 쓴 글들 앞으로 간간이 업데이트할게요.
이 글은 잡지 <BOGO> 5호에 실렸습니다.
인쇄매체에서만 볼 수 있는지라 서재 재개와 함께 가장 먼저 올려둡니다.
마감일과 분량 제한을 맞추느라 허술한 부분이 적잖습니다만, 언젠가 고칠 기회가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