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따금씩 가장 처음 실었던 원고부터 올릴게요.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완생의 길을 걷다
드라마 <미생>의 처음과 마지막은 만화 <미생>과 사뭇 다르다. 요르단 에피소드가 수미상관으로 배치된 점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내 눈길을 끈 것은 한결 증폭되어 표현된 미생들의 고생이다. 초반부에서는 인턴 동료 사이에서 고생하는 장그래의 모습이 드라마만의 오리지널 씬들을 통해 다소 과장되지만 그만큼 더 와 닿게 표현되었다. 후반부는 오 차장이 사표를 내기까지의 과정이 눈에 띈다. 만화에서는 갈 회사가 정해지고 퇴사하지만, 드라마 판에선 달라진 사내 분위기에 마음 고생하다 결국 떠나는 것으로 그려진다.[19국] 만화에서는 타부서 서류 열람을 방해받으며[141수] 불안감을 살짝 느끼는 정도였다면, 드라마의 묘사 속에서 오 차장이 받는 압박은 훨씬 무겁다. 그 압박 속 오 차장은 회사를 그만두는 단 하나의 선택에 내몰린,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절대 살아날 희망 없는’ 미생의 모습이었다.
오 차장이라는 미생은, 구체적으로는 내부 고발자의 상황에 처해 있다. 온전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대 중국 무역에서 행해지던 과도한 콴시 관행을 적출한 오 차장과 영업3팀은, 그 이전 박 과장의 리베이트 건을 적발한 일의 연속선상에서 내부 고발자로 완전히 찍히고 만다. 적폐라 할 만한 관행이건만 그로 인해 유지될 수 있었던 대 중국 무역에서의 ‘편안함’이 사라지면서, 다른 팀들은 ‘불편함’을 초래한 오 차장들을 불편해 한다. 따라서 오 차장이 ‘우리’ 회사의 일원인 한은 중국 무역은 어렵다는 것은 회사의 입장일 뿐만 아니라 타 팀원들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오 차장은 회사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회사라는 사회 안에서 죽어나가야만 하는 희생양이 된다. 중국이라는 실리의 신 앞에서 희생양을 바치고서야 원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와 그 안의 사회는 유지될 수 있다.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가 지적했던 희생양 제의로 유지되는 사회의 매커니즘이 <미생>에 담겨 있다.
그런데 이런 매커니즘이 내부 고발자만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계약직 사원 장그래도 마찬가지로 희생양이다. 내부 고발자가 우발적인 희생양의 형상이라면, 계약직은 제도적으로 구현된 희생양이다. 2년마다 한 번씩 죽어나감으로써 그 회사의 안정을 도모하고 정규직 사원의 상대적 안정감을 확인하게 하는 희생양, 그것이 계약직이다. 그런 점에서 <미생>은 영업 3팀을 중심으로 한 희생양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희생양들의 삶을 향한 희망을 그린 것으로 이해되는 이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그런 희생양들을 만들어내는 회사-사회는 무엇인가를 또한 그 희생양 곁에서 살아가며 나의 완생을 욕망하는 ‘우리’의 모습을 날카롭게 묻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먼저 회사-사회를 묻자. 지금까지 나는 회사(會社)와 사회(社會)를 의도적으로 섞어서 사용했다. 같은 한자로 구성된 이 둘은 개념적으로 분명 다르지만 묘하게 닮았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언어생활을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사회생활의 공간으로 말하며 은연중에 사회를 회사로 대체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며 입단에 실패하고 사회로 나서게 된”[단행본 인물 소개] 장그래는 회사에 입사하면서 비로소 사회에 속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바둑에선 하수가 고수와 마주할 때, 급을 맞춰줍니다. / 그런데... 사회에선, 고수를 상대로 신입사원이 접바둑을 둡니다.”[47수] 이렇듯 사회의 경계는 회사를 중심으로 그어진다. 바둑을 두던 시절에는 사회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언어생활에서 흔히 발견되는 혼동이다.
사회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런 혼동은 언어생활로만 제한될 것도 아니다. “회사 안은 전쟁터, 밖은 지옥”이라는 <미생>의 명대사는 “해고는 살인이다”의 완곡어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죽은 자만이 이를 수 있는 곳이 지옥이다. 회사 밖으로 내쫒긴 이는 사회적으로 죽은 자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가운데 26명은 정말로 죽었다.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 죽었다.) 회사-사회의 포개짐은 그저 언어적인 착각만은 아니며, 실재를 반영하고 있는 삶의 잔혹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회를 향한 고민은 회사에 대한 고민과 뗄 수 없는 문제다. ‘작은 사회’로서의 회사가 ‘큰 사회’를 가리는 이 착시는 오히려 현실적일뿐만 아니라 큰 사회를 제대로 보는 매개가 될 수도 있다. 무너진 사회를 ‘작은 사회’와 ‘큰 사회’ 모두의 측면에서 또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 희생양을 만드는 것으로 유지되는 회사-사회가 드러내는 진실에 대한 고민이 그것이다. 이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고민해 볼 차례다. ‘사회’라는 말로 가려지는 개별 행위자로서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가장 최근의 이슈를 떠올리는 것이 답을 찾는 과정으로 적절하겠다. ‘땅콩 회항’ 사건 후 박창진 사무장이 일부 동료들에게서 외면당하는 상황에서, 내부 고발자가 되어버린 그의 모습은 오 차장과 겹쳐진다. 대한항공이라는 작은 사회의 구성원 일부는 박 사무장을 희생하여 자기를 보존하려 한다. 그것이 수직적인 위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구성원들은 ‘우리’의 거울이다. 내 주변의 누군가를 희생하여 나의 완생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욕망은 지금껏 사회를 유지해 왔던 뒤틀린 사회의 욕망을 잔뜩 끌어안고 있다.
때로 멀리서 보면 보인다. 오 차장을 지켜본 독자/시청자들이 그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듯이, 실제 인물 박 사무장이 실명과 얼굴과 자리를 내놓고 싸우는 이 싸움에 대해서도 사람들 대부분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 작은 사회는 외면하지만 큰 사회에서 응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박 사무장은 싸울 힘을 얻는다. 가깝든 멀든, 사회적 지지 없이 그의 싸움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를 우리의 작은 사회 안으로 옮겨 놓는다면 어떨까? 우리는 그를 지지할 수 있는가? 그를 희생하지 않기 위해 내가 희생당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수 있는가? 회사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희생양을 요구하는지는 않을런가?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 앞에서 초점을 달리해 생각해 보자. 드라마 <미생> 마지막 화에서 오 차장은 루쉰의 말을 인용한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 같다. 지상에는 원래 길이 없었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그저 하나의 새 회사를 세우는 희망으로 읽히지 않는 말이다. 오히려 희망적인 사회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완생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의 돌로는 완생을 이룰 수 없다. 작은 바둑판에서조차 완생의 요건인 두 집을 이루려면 적어도 여섯 개의 돌이 필요하다. 완생은, 외롭지 않게 서로를 위로하며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사회적 공유물이다. 개인의 완생이란 없다. 희생양을 만들어 나를 살리려는 생각으로는 완생의 길을 걸을 수 없다. 우리의 완생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 길이 완생의 길이다.
그것은 고생길이기도 하다. 희생양의 고생을 함께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미생이 ‘절대 살아날 희망 없는’ 사회에서는 사회를 고민해야 하며, 그 고민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개개인의 몫이다. 내 옆의 미생과 함께 고생길을 스스로 여는 것, 그것이 완생의 길이다. 그러니 완생의 길을 열고 있는 미생에게 고마워할 일이다. 굴뚝 위의 미생과, 박 사무장이라는 미생에게, 내 옆의 누군가에게 고마워하며 걷는다. 완생의 고생길, 지금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그 길을.
2015.1.22 송고
2015.2.3 <주간경향> 11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