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폭력, 사랑.
1.
이 글을 쓰는 시점에 대해 먼저 밝히는 것이 필요하리라. 2012년 3월 15일 오늘은 한미 FTA가 발효된 날이며, 제주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구럼비 바위가 발파된 지 9일째 되는 날이다. 또 일부 웹툰에 대한 ‘청소년유해매체물 결정 관련 사전 통지 및 의견제출 안내’라는 긴 이름의 공문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의해 공지된 지 38일째다. 재능교육 해고 노동자들이 투쟁을 시작한 지는 1547일째, 4대강 사업이 첫 삽을 뜬지는 857일째. 이명박 대통령 가카의 임기 종료까지 345일이 남은 현재 굵직굵직한 갈등 중 극히 일부만 모아도 이 정도다. FTA 발효를 맞아 강정을 염려하며 방심위의 웹툰 유해물 지정에 대해 고찰하는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사는 건가 싶다. 문제 뒤에 또 문제.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득달같이 추가되는 새로운 문제. 아아하아아...”
이처럼 너무 많은 사안 가운데 살며 쓰다 보니 갈피를 잡기 어렵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 이 모든 사안의 핵심은 ‘폭력’이다. 이 핵심 단어에 수식어를 붙여보면 다음과 같다. 공적 폭력, 국가적 폭력, 자본의 폭력, 제도적 폭력, 제국주의적 폭력. 조금 더 자세히 대상관계를 밝히면 이렇게도 쓸 수 있다. 비정규직에 대한 폭력, 문화예술에 대한 폭력, 인권에 대한 폭력, 자연에 대한 폭력, 지역에 대한 폭력, 전 국민에 대한 폭력.
그런데 이 글의 가장 주요한 사안인 ‘방심위의 유해 웹툰 지정’은 무려 폭력 예방을 위한 조치였다. 그들이 말하는 예방되어야 할 폭력은 ‘학교폭력’이다. 이 합성어를 마주하며 선생님의 학생에 대한 체벌과 구타가 떠오르는 이도 있을 것이나, 방심위의 이목은 그것을 향해 있지 않다. 그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이다. 그리고 23편의 웹툰이, 그 폭력의 ‘유발자’로 지적되었다. 졸지에 잠재적 폭력 유발자가 되어버린 웹툰 작가들은 이를 ‘웹툰에 대한 폭력’으로 보고 집단적으로 반발했다.
<작가 노컷툰 릴레이 중 억수씨>
웹툰 작가들만이 아니라 다양한 논자들과 독자들이 그 반발에 함께하고 있다. 노컷툰 블로그를 중심으로 작가들의 설득력 있는 메시지가 담긴 만화가 연이어 게시되었으며, 또한 만화를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방심위의 조치에 반박하는 글을 기고하여 만화계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러한 그림과 글을 살펴보면 만화계가 상당히 논리정연하고 체계적으로 이 사태에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만화계는 1997년에 ‘청소년 보호법’에 크게 당했던 뼈아픈 과거에서 배운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젊은 웹툰 작가들을 포함한 만화계는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을 역량과 힘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로 방심위는 이렇다 할 액션을 취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억눌린 자들의 목소리가 훨씬 큰 판이다.
<독자 노컷툰>
방심위를 난감하게 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학생들의 심성을 보호하여 부모님 마음을 안심시켜보려던 방심위의 행동에 부모님이 안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학생들이 제대로 뿔이 난 것만은 확실하다. 오호 통재라, 방심위가 학교폭력으로부터 보호하려 한 청소년, 초‧중‧고교 학생들이 노컷툰 블로그에 방심위의 결정에 반대하는 배너를 달고 있는 것이다.(<독자 노컷툰>) 이처럼 방심위가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나까지 말을 보태려니 어르신들이 약간은 불쌍하기까지 하다. 이 분들은 사실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폭력에서 보호하려는 마음으로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하여, 이미 많은 작가와 논자들이 지적한 바 있는 조치 자체의 문제점은 생략하도록 하자. (노컷툰 블로그에 가보면 잘 정리되어 있다.) 나는 되려 그 그러한 조치를 취했던 그 분들의 사랑스러운 마음을 곡해하지 않고 직시하려 한다. 나는 방심위의 결정이 많은 이들이 지적한 것과 같이 정권 말기나 선거철에 으레 등장하는 어떠한 정치적 술수나 사회적 문제에 대한 희생양 만들기라고 보지 않으려 한다. 조선일보가 웹툰을 학교 폭력 유발매체로 지목한 데다 동급생들에게 폭력을 당하다 못해 자살한 청소년의 사연이 언론에 회자되어 여론이 들끓는 마당에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언 발에 오줌을 누셨던’ 게 아니라고 보려 한다. (만약 그런 거였다 해도 이거 웬걸 발이 녹기는커녕 오줌줄기가 그대로 고드름이 되어 언 발 위에 떨어져버린 모양새니 측은하지 않은가.)
방심위는, 정말로 학생들을 보호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킨 그들의 조치는 사랑에서 출발한 행위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사랑의 표현인 이 조치가 그들의 사랑을 완성시키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조치가 가져올 결과를 상상해 볼 수 있다. 혹은, 조치가 없을 때 얻어질 결과를 상상하여 조치로 인해 막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도 있다. 사실상 이 두 가지 방법은 초점만 명확히 한다면 동일한 것으로, 하나를 생각하면 다른 하나가 따라오게 되어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초점은 ‘만화 속의 폭력’이다. 더 명확하게는, ‘만화 속의 폭력’이 독자에게 미치는 효과이다. 바로 이것이 청소년들을 심히 사랑하는 방심위가 만화계에 폭력을 휘두르면서까지 막으려 했던 것이므로.
2.
‘폭력을 유발하는 웹툰’을 금하려는 방심위의 사랑은 웹툰을 포함한 대중매체에 그려진 가상적인 폭력을 접한 청소년 독자가 현실 속에서 폭력을 저지를 공산이 높다는 가설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실 이 가설은 꽤나 많은 연구를 통해 검토되었으나 정설로 확정되지는 않은, 그야말로 가설에 불과하다. 이와 함께 논의되는 다른 가설이 두 가지 더 있다. 하나는 대중매체 속의 폭력과 향유자의 폭력성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오히려 가상적 폭력이 향유자의 잠재된 폭력성을 대리 충족하여 현실 속에서는 덜 폭력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살펴본 바, 국내에서 좀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대중매체의 폭력이 청소년의 폭력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는 가설이다. 아마도 방심위 분들도 그 연구들을 근거로 하고 있을 듯싶다.
그런데 설문을 통한 통계학적 연구가 주종을 이루는 폭력적 매체와 폭력적 행동의 연관성에 관한 논문들을 살펴보면 의문이 가는 점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설문 문항이 유도심문처럼 구성되어 폭력적 영향을 시인하는 답변을 이끌어낸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필자가 확인한 논문들은 주로 TV나 게임의 영향에 관한 것이었는데, 질문 문항은 대개 다음과 같다. ‘게임을 하면서 게임에서처럼 누군가를 때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적이 있다.’ 답변자는 이에 ‘전혀 아니다’에서부터 ‘매우 그렇다’까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심지어 ‘아니다’는 하나만 주고 ‘그렇다’ 앞에 ‘조금’, ‘매우’ 등을 붙여 구성된 선택지도 있었다.) 답변을 하는 입장에서는 질문에 매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렇게 통계를 내 보면 당연하게도 게임을 많이 한 집단의 답이 ‘그렇다’ 쪽에 더 많이 분포될 수밖에 없다. 게임 경험이 많은 만큼 더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며, 그러다보면 여러 생각 중 하나로 폭력적인 생각도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만약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다면 어땠을까? 이 역시도 게임 경험이 많은 향유자에게서 더 많이 발견되지 않을까? ‘게임을 하면서 게임에서 미션을 수행하듯이 실제로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혹은 ‘게임에서처럼 내 삶의 레벨을 높이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둘 다 ‘매우 그렇다’인데 말이다.
위와 같은 연구가 설문조사였던 데 반해, 실제 범죄 행위 통계를 통해 폭력적 TV 애니메이션 간의 영향관계를 조사한 예가 있어 소개할까 한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난 후, 이 군사정권은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적인 연출이 포함된 TV 애니메이션의 방영을 금지했다. 80년 9월을 기준점으로 그 이전까지 방영되었던 TV 애니메이션 중 ‘요술공주 새리’와 같은 작품만 남고 ‘마징가’, ‘그랜다이저’, ‘독수리 오형제’ 등은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정책은 1985년 어간까지 시행되었으며, 한국에서 TV 애니메이션이 방영된 것은 1970년부터이니 이 시기들에 일어난 청소년 범죄를 대조해보면 그 정책의 유효성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에는 DVD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비디오(VCR)로 시청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으니, TV 애니메이션이란 단일 변인의 효과를 검토하기에 상당히 변별력 있는 분석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논문의 결론은 방심위 어른들께는 상당히 의외가 아닐 수 없다. 경찰청 통계자료를 통해 확인한 바, 청소년 범죄는 폭력적 애니메이션 금지기에 오히려 증가했다. 금지 이전 시기의 청소년 범죄 증가추세가 금지 이후의 증가추세와 거의 동일하므로, 폭력적 애니메이션의 금지가 더 많은 범죄를 불러왔다고 볼 수는 없으나 정책의 효과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결론은 충분히 타당하다. 세부적으로 볼 때, 단순 폭행보다 죄질이 높은 상해죄의 비율이 높아진 것도 특기할 만하다.(최성락 외, 「폭력성 애니메이션 금지 정책의 효과에 관한 연구」, 『만화애니메이션연구』,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2008.)
물론 학술적 연구 결과는 제한된 데이터에 의존해 도출된 것이므로,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폭력적 TV 애니메이션 금지 정책의 효과에 대한 이러한 분석 결과를 통해 이번 방심위의 조치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에 대해 회의적인 마음을 품을 수 있음도 물론이다. 사랑의 마음으로 ‘폭력유발자’ 웹툰을 금지하려 하셨던 방심위에게는 안타깝지만, 웹툰의 가상적 폭력과 청소년의 실제 폭력 사이에는 뚜렷한 연결고리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와 관련한 우리의 탐구는 끝나지 않는다. 웹툰 속의 폭력은 폭력적 영향만을 주거나 주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폭력을 그린 웹툰을 통해 폭력성만을 고찰하는 것이야말로 방심위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한 생각의 소산일 것이다. 방심위가 폭력을 그리는 웹툰으로부터 청소년들을 보호하게 될 때 벌어질 수 있는 결과는, 그려진 폭력에 청소년들이 얻게 될 모든 것들로부터의 보호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어야 할 질문은, “만화의 폭력은 어떻게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가”이다. 폭력적 웹툰이 검열당하고 1997년과 같은 자체검열의 역사가 반복되게 되면 바로 그 의미가 사라질 것이므로. 우리는 그 의미를 확인해야 한다. 물론 이 질문은 쉽게 대답될 수 있는 성격의 질문이 아니다. 허나, 구체적인 작품을 경유할 때에 그 작품에 해당하는 답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답은 만화 전체에 던진 동일한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은 될 수 있을 테니, 한 작품을 통해 물어보자. 이를 위해 이 글은 (산 말고) 우주로 간다. 그리고 방심위의 사랑으로 인해 청소년들이 잃어야 할 어떤 가치가, 웹툰의 폭력에 있는지 확인해 볼 것이다.
3.
방심위가 지정 예고한 유해 웹툰 중 하나인 김성민 작가의 ‘나이트런’은 확실히 폭력적이다. 적어도 방심위의 ‘폭력’이 피가 낭자하는 잔인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나이트런’이야말로 딱 들어맞는 작품이다. 게다가 포털사이트와 작가의 협의에 의해 18세 이상 구독 가능하게 설정된 다른 작품들과 달리 ‘나이트런’은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되어있으니, 청소년의 폭력성을 고심하는 방심위에게는 안성맞춤의 타겟이었을 것이다. (18세 이상 구독 가능한 웹툰까지도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 예고한 코미디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성토하고 있으므로 넘어가겠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수만 년 후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괴수의 전쟁을 그린 SF 대서사극 ‘나이트런’은 폭력적이므로 유해한가? 우리는 ‘나이트런’에서 폭력적이라는 것과 유해하다는 것 사이에 인과관계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역시나 이런 질문도 답이 안 나오긴 매한가지이므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나이트런’의 폭력은 어떻게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가?” 그리고 이를 조금 더 연장해서, “‘나이트런’이 폭력을 통해 만들어내는 의미는 독자들에게 읽힐 가치가 있는가?”까지도 물어보자.
지금까지 연재된 ‘나이트런’의 분량은 상당한 편이다. 아마도 이 만화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나 1986년부터 시작해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만화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나가노 마모루) 정도로 길어질 듯하다. 내용과 설정도 이런 걸작들에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나다. 헌데, 이런 작품들보다 ‘나이트런’은 확실히 잔인하다. 유명한 미드(미국 드라마) ‘스파르타쿠스’ 정도의 피가 튀는데다 죽어나가고 잘려나가는 신체의 수는 그보다 훨씬 많다. 괴수의 공격에 의해 수억 명의 인간이 몰살당하고 행성 하나가 통째로 죽음의 별이 되고 말았다는 우주 속 인류의 역사가 만화 속에서 그려진다.
<그림 1> ⓒ김성민
<그림 2-1> ⓒ김성민
그러나 한 도시가 파괴당하는 익명의 죽음들을 담은 컷(<그림 1>)보다 독자에게 더 잔인하게 느껴질 것은 구체적인 전투와 죽음의 순간이 묘사된 컷들이다. 누나를 구하러 달려오던 동생의 팔이 괴수에 의해 잘리는 장면(<그림2-1>)은 생생하게 잔인하다. 누군가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잔인할 수도 있다. 또 방심위처럼 우려하시는 어른의 눈에는 유해하게까지 보일지 모른다. 칼로 신체를 베는 모방범죄를 걱정하실런지도 모르겠다. 내 눈에는 전혀 그럴 리 없어 보이지만. 이보다 더 잔인한 장면도 널렸다. <그림 3>의 잘려나간 수족들을 보라. 이는 괴수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싸움을 그린 장면이다. 이 도륙을 몸소 행한 ‘반’은 되도록 생명을 앗아가지 않으려 관대하게도 수족만을 벤 것이지만, 잘려 날아다니는 신체를 보는 것은 여전히 처절하게 잔인하며 불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잔인함에 압도되어 앞서 우리가 물으려 했던 것을 잊지 말자. 아니, 그 압도가 주는 감각에서부터 출발해 물어보자. 이러한 장면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런 폭력을 통해서만 얻게 되는 어떤 의미가 과연 여기에 있는가? <그림 1>과 <그림 2, 3>들의 대비를 통해 이에 답할 수 있다. 도심의 폭파를 그린 <그림 1>은 분명 다른 그림들보다 더 많은 인명의 살상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이를 수이 상상할 수 있으나, 그림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의 순간이 조명되지 않은 까닭에 그것을 살갗에 소름이 돋을 만큼 지각할 수는 없다. 폭파되는 것은 건물이지 죽어나가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여겨질 지도 모른다. 미국과는 물리적 거리가 먼 우리에게, 9.11의 이미지가 테러 당한 무역센터와 솟아오르는 연기로 기억될 뿐, 사람의 눈물과 절규와 참혹한 주검의 장면으로 기억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면,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묘사된 폭력 앞에서 우리는 그만큼 가깝게 폭력을 느낀다. 폭력의 힘을, 폭력의 인과를 더 실감나게 깨닫는다. 동생의 팔이 잘리는 비극을 눈앞에서 본 누나의 감정 상태에 공명하게 된다.(<그림 2-2>) 이는 폭력에 대한 분노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스펙터클이며 생생한 폭력의 이미지다.
<그림 2-2> ⓒ김성민
그림 <2-3> ⓒ김성민
이런 점에서 <그림 2, 3>에 동일하게 채택된 검이라는 무기가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더 상세히 설명되어야 한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대량 살상이 가능한 시대에, 방아쇠만 당기면 한 목숨을 빼앗는 것이 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이 웹툰을 통해 손가락이 아닌 온 몸으로 행하는 폭력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원거리의 여러 사람들을 버튼으로 살상하는 것보다, 주먹으로 칼로 상하게 하는 것이 더 선택하기 어려운 일이다. 폭력을 가하는 그 순간의 표정이, 튀는 피가, 단말마의 비명이, 빠져나가는 생명이 지각된다. 온 몸으로 행할 때 폭력은 힘겹다. 가까운 대상과 주고받는 폭력은 어렵다. ‘반’이 인간에게 칼을 휘두르며 속으로 하는 생각들은 이를 명백히 드러낸다. 지키고픈 대상을 구하기 위한 길에서 다른 대상을 해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 ‘반’을 짓누른다. 보통 아버지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베트남전에서, 5.18에 방아쇠를 당겼던 기억과 닿아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 이 폭력적 묘사이다. (물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이 기억을 ‘반’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을 테지만.) 더 큰 폭력은 더 큰 사랑이라는 듯이 그려지는 비극이 이 장면에 새겨져 있다. 덜 잔인하게 묘사되었더라면, 덜 생생하게 느꼈을 고통의 감각이 여기 칼로 그려진 것이다.
<그림 3> ⓒ김성민
따라서, ‘나이트런’의 폭력적 장면들은 오히려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폭력으로 잃게 될 것과 폭력이 낳는 잔혹한 경과를 눈으로 확인하며 그 폭력적 상황 자체에 대한 반감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온 인류에 대한, 핵을 맞아 죽어간 히로시마 사람들에 대한, 고문당한 민주 열사에 대한, 내가 지키지 않으면 폭력 상황 속에 놓일지도 모를 내 친구에 대한 사랑의 작용이다. ‘잔인하다’는 즉물적 감상을 느끼는 것에서 그치는 독자도 있을 것이나, 이는 오히려 잔인한 것을 잔인하다는 이유 하나로 배격하는 어르신들의 빗나간 사랑의 교육 때문이다. 서사와 그림 속에서 잘 표현된 폭력이라면 독자는 그 가상의 폭력에서 의미를 충분히 포착해 낼 수 있다. 특히 ‘나이트런’은 폭력을 통해 비폭력을 꿈꾸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만한 작품이다. 이렇게 볼 때 모방하기에 너무 잔혹한, 도저히 모방할 수도 없으며 모방하고 싶지도 않은 폭력은 방심위의 우려와 달리 폭력적으로 무해하며, 폭력적으로 유의미하다.
방심위의 조치가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라 해도,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앗아가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청소년들에게 폭력이다. 이 의미를 그릴 수 없게 될지 모르는 웹툰 작가들에게도 그것은 폭력이다. 그런 사랑을 거부함으로써만 만날 수 있는 의미가 있으므로, 그들은 지금, 싸우고 있는 것이다.
4.
처음 나열했던 여러 폭력들과 ‘나이트런’의 생생한 폭력은 명확한 차이를 지닌다. ‘나이트런’이 폭력 상황 속에 있는 자들과 폭력을 가하는 자의 고뇌와 갈등을 표현하고 있는데 반해, 한미 FTA와 해군기지의 폭력에서는 폭력을 당한 자들의 아픔만이 표현된다. 여기에 가해자는 은폐되어 있다. 방심위 역시도 폭력을 가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했고 웹툰 작가들은 그 가해자 없는 폭력에 아프다. 그러나 ‘나이트런’의 인물들, 특히 ‘반’은 폭력 상황에서 해방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저지르면서 자신의 폭력이 가져오는 결과들을 깊이 자각하고 스스로를 정의와는 거리가 먼 ‘나쁜 놈’으로 인식한다. 그것이 사랑과 닿아있는 것일지라도, 스스로의 폭력을 정당화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지금 사회의 많은 폭력들, 특히 국가적 폭력은 국익을 위한다는 사랑의 이름으로, 자녀들을 보호한다는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 때리는 자는 스스로 때린다고 생각하지 않고 맞는 자들만 울부짖고 있다. 이런 문제적 상황 속에서 나는, 웹툰을 통해 청소년들이 접하게 될 폭력은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 걱정되는 것은 사랑을 내세운 어른들의 폭력이다. 우리 청소년들이 배울까봐 두려운 그들의 허울 좋은 사랑에, 나는 지금도 괴롭다.
- 제주도 강정에서
싱크 8호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