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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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의 남편을 어떻게 부를까?


홀로 되어 딸 카나와 함께 살고 있는 야이치에게 작고한 남동생의 남편 마이크가 캐나다에서 찾아왔다. 얼마 전 한국에 번역 출간된 <아우의 남편(弟の夫)>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기본 설정에만도 ‘흔히들 흔치 않다고 여기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한부모 가정에 국제결혼과 동성결혼까지, 일본과 한국의 주류 문화가 공유할 ‘정상성’의 규범을 꽤나 벗어나는 설정이다.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독특하고 풍성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 사려 깊고 모두에게 정중한, 그러면서도 따뜻한 웃음을 자아내는 만화가 독자에게 안겨주는 것은 또 하나의 ‘소수자’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는다. 외려 ‘정상성’에 익숙한 우리에게 되묻는 고민거리가 녹록지 않다. 무엇보다 나로서는 일본어로 탄생한 만화가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생겨난 문제들로 인해 ‘우리 언어문화’에 새겨져 있는 확고한 ‘정상성’을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대한 상세히 풀어보자.

카나에게 마이크는 삼촌(작은아버지, 숙부)의 남편이다. 그럼 카나는 마이크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한국어판에서는 마이크가 “저는 카나의 고모부입니다”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화들짝 놀라 원문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캐나다인 게이가 자신의 죽은 남편을 여성을 칭하는 말로 부른다니, 너무나 이상했다! 굳이 이렇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지조차 의심스럽지만, 여느 이성애자 남자와 마찬가지로 게이도 스스로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남자다. 무엇보다 게이가 여성스런 남성이라는 건 너무나 오래 묵은, 매우 잘못된 편견이 아닌가. 아무리 마이크나 이 만화가 일본의 주류 문화에 정중하게 접근하는 방식을 취한다고 해도, 설마 이런 편견까지 수용했을 리가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일본어판의 마이크는 스스로를 ‘고모부’가 아니라 ‘아저씨(オジサン·오지상)’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이 명칭은 찬찬히 짚어보아야 한다. 한국어의 ‘아저씨’에서는 그 의미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지만, 일본어에서 ‘오지상’은 부모의 방계 존속의 남성 배우자를 이르는 말로 여전히 쓰인다. 하지만 한자로는 ‘叔父さん’(숙부=고모부·이모부) 혹은 ‘伯父さん’(백부=고모부·이모부)와 같이 쓰도록 되어 있다. 혹 한자 표기를 하지 않으면 ‘おじさん’과 같이 히라가나로 쓰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마이크의 ‘오지상’은 굳이 외래어를 표기하거나 강조할 때 쓰는 가타카나 ‘オジサン’으로 표기되었다. 의도적으로 ‘이상’하게 표기한 것이다. 한국어판은 이 ‘이상’함을 무시하고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번역어를 채택했다. 결국 더 이상해졌지만.

한국어판의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이상함’은 이뿐만이 아니다. 야이치는 남동생의 남편을 무어라고 부를까? 한국어판에서는 ‘매부’라는 명칭을 차용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대로 “손위 누이나 손아래 누이의 남편을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다. 한국판은 일관되게 야이치마저 남동생을 여자로 칭하는 이로 그려버린 셈이다. 하지만 일본어판은 ‘義弟(의제)’라고 쓰고 ‘おとうと(오또-토·남동생)’라고 독음(요미가나)을 붙여 두었다. 이 역시 의도적으로 ‘이상’한 표기다. 일본어에서 손아래 동서나 처남·시동생·매제를 칭하는 ‘義弟’(의미상 영어의 brother-in-law와 거의 같다)는 ‘보통’은 ‘ぎてい’(기테이)라고 읽기 때문이다. 한편 ‘おとうと’는 남동생을 일컫는 말 ‘弟’의 발음이지만, 넓게는 발음이 다른 ‘義弟’와 이음동의어로도 쓰인다. 그러니 각기 발음과 표기가 서로 자연스럽게 잇닿지 않는 두 단어를 이어서, ‘이상’한 새로운 표현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과도하게 친절한 설명을 불편하게 늘어놓았다는 것을 나도 안다. 누군가에게는 다소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뭐라고 번역하는 것이 나으냐고 물으며 답답해하는 이도 있을 것 같다. 내게는 답이 없다. 나는 오히려 그 ‘답답함’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다.

일본 작가 타가메 겐고로의 만화 <아우의 남편>의 한 장면.


<아우의 남편>은 분명 훌륭한 작품이다. 설정이나 스토리 전개, 작화, 섬세한 접근법 등 여러모로 상찬할 것이 많다. 특히 지금껏 지겹도록 천착한 친인척 명칭의 문제와 관련해서 보더라도 그렇다. 일본어의 (착종된) ‘전통’과 가능성 안에서 찾아낸 ‘정답’이 무척이나 현명하다.

하지만 나는 기왕 한국어판으로 나온 <아우의 남편>의 ‘오답’이 일본어판이 주지 못했을 무언가를 주었다고도 생각한다. 만약 내가 일본어판으로 처음 읽었더라면, 가부장제의 명칭 체계 안에서 생경한 그 존재를 ‘이렇게 칭하면 되겠구나’ 하고 감탄하고 넘어갔을 것만 같다. 하지만 제목부터 이상한(왜 ‘아우’일까? 여기에 남동생이라는 의미값만이 있는가?) 한국어판으로 처음 본 덕에 이상함을 더 확실히 지각할 수 있었다. 그 이상함은 번역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성애자 남성 중심적으로 짜인 말만이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한국어 문화가 내게는 훨씬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번역자와 출판사 편집부가 승인한 그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이상함’은 나처럼 지나치게 민감한 독자에게 문제가 된다. 그 번역표현 속에서 정체성을 왜곡당한 게이와 여성에게는 더 실존적인 문제로서 타격을 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번역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그 문제는 한국어와 문화의 이상함에서 근본적으로 기인한다. 따라서 문제는 왜 우리말에서는 삼촌의 남편을, 동생의 남편을 칭할 말을 찾기가 어려운가,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그런 말이 없는 우리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정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여길 수 있었던 데 있다. ‘우리’를 둘러싼 ‘어떤 문화’의 한계를 이상하게 인식하지 않고, 되레 그 문화가 인식하지 못하는 타자를 이상하게 바라봤던 ‘나’와 ‘우리’의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시선이야말로 문제인 것이다.

<아우의 남편>의 어린 카나는 캐나다에서는 동성결혼이 가능하지만 일본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설명에 이렇게 말한다. “이상해. 여기선 되고 저기선 안 된다니, 그런 거 이상해.” 이처럼 탁월한, 미결정된 이상함으로 충만한 카나라면 이렇게도 말하지 않았을까. “이상해. 흔하다고 자연스럽고 흔치 않다고 이상하다니, 그런 거 이상해.” ‘우리’는 그런 이상한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매번 의식적으로 ‘작은따옴표’를 쳐가며 모든 ‘자연스러운’ 말과 세계를 ‘이상’하게 표시하는 연습부터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일들이 이상하고 답답하고 불편한가? 그것을 ‘소수자’는 늘 경험했다. ‘자연스러운 우리’와 함께 사느라.


2016.5.12 송고

2016.5.24 <주간경향> 1177호



(번역에 대해 꽤나 까칠하게 썼지만, 사실 정말 좋은 작품입니다. 

2권도 읽었는데 갈수록 더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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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2016-09-20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책을 읽으면서 의문을 느낀 부분에 대해 매우 명쾌하게 정리해주셨네요. 덕분에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toon_er 2016-09-21 18:22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받아보는 살가운 댓글이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