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만 이번엔 예외적으로 데스크에서 잡은 제목으로 둡니다. 잘 붙였거든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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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에 대한 ‘규제’는 답이 아니다 - <시티헌터>
요즘 만화 세미나를 즐겁게 진행하고 있다. 함께 다양한 만화를 읽고 각 작품의 의미를 새기며 이야기 나누는 자리다. <말과활>을 펴내고 있는 협동조합 가장자리에서 시간과 장소를 내준 덕에 좋은 분들을 만나기도 했거니와, 이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로 글감까지 얻고 있으니 나로서는 이런 호사가 없다.
지난주에는 쉬어갈 겸해서 추억의 만화를 읽는 시간을 가졌는데, 내 나름의 의도는 만화를 통해 우리 각자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해 왔는지를 되새겨 보자는 거였다. 조금 과장하자면 대중문화를 통한 주체화(subjectivation) 과정을 검토해본 셈이다. 나는 이번 기회에 <슬램덩크>와 <시티헌터>를 다시 읽었다. 사실 <슬램덩크>가 너무 재미있어서 <시티헌터>는 첫 두 권밖에는 읽지 못했지만, 고백하자면 그 두 권을 읽는 것마저도 상당히 비위가 거슬렸다. 첫 만남의 강렬한 기억에 기대어 다시 펴들었음에도 이내 눈살을 찌푸렸던 것은 그간 나의 ‘눈’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시티헌터>(호조 츠카사 작, 1990년 완결)를 처음 만난 건 1990년대 초반, 내가 초등학교 3~4학년이던 무렵이었다. 당시 우리집은 작은 연쇄점을 운영했는데, 실상은 ‘아무거나 상점’에 가까워서 오뎅과 호두과자도 있었고 라면도 조리해서 내놓곤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500원짜리 해적판 만화를 진열해 두고 판매했다는 거다. 손바닥 크기 장정의 해적판 일본 만화 신간이 배달되면 스포츠신문 매대 옆에 비치된 서너 칸짜리 작은 책장에 채워졌다. 단, 내 손에서 하루를 거친 후에. 나는 이 작은 만화방의 첫 독자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집어들던 만화가 바로 <시티헌터>였다. 당시만 해도 이름이 ‘우수한’이던 주인공 사에바 료의 매력에 나는 푹 빠져 있었다. 료는 사립탐정이자 악한에 한해 청부살인도 하는 프로 헌터인데, 사실 내게는 그의 뛰어난 실력보다 다른 면이 더 흥미로웠다. 열 살을 갓 넘긴 남자아이가 이해하기엔 낯설었던 료의 ‘밝힘증’이 그것이다. 성에 대한 지식은 고사하고 아예 개념마저도 없던 어린 나에게 료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시각성/접촉성 발기 현상’과 여성을 대하는 ‘거침없는 태도’는 너무나 새로웠다. 당시 우리 또래가 쓰던 말로는 ‘변태’요 지금 말로는 ‘마초’이자 ‘성추행범’에 해당할 료는 어린 내게 만화적 과장을 통해 (왜곡된) ‘남자 어른의 세계’를 가르쳐준 교사였던 셈이다. ‘성’을 부끄럽고 감춰야 할 것으로 배우기 전에 달리 이해할 기회를 <시티헌터> 덕에 얻었다는 점만큼은 쾌거라 하겠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남성성을 과시하는 장면들을 보는 일이 썩 불쾌했다. 하물며 여성이 대부분인 세미나 자리에서 그 얘기를 추억이랍시고 내놓을 요량으로 다시 읽었으니, 생각과 말을 고르고 다듬는 노력이 필요하기도 했다. 허나 그 덕에 다시 짚어볼 만한 기억의 조각을 몇 점 건질 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물론 매우 부족한 것이지만) 성적 차이(gender difference)에 대한 배움이다. 성추행이 분명한 료의 행동에 당황하고 화내면서 ‘10t’이라고 적힌 망치로 그를 내리치는 여성 파트너 카미무라 카오리(당시 이름은 ‘사우리’)의 반응을 다시 보자니, 어린 나였다곤 해도 성차를 이해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지상태의 내가 여전히 성을 터부시하는 시각이 일반적이던 90년대 초 일반 사회의 인식을 접하기에 앞서, 자연스러운 것이면서도 여성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남성성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료의 행동이 만화 속에서는 아무리 유쾌해도 여성에게 해서는 안 될 행동이라는 것 역시 눈치챘을 테고 말이다. 보다 명확한 기억도 있다. <시티헌터>는 여성 인물을 성적 대상으로뿐만 아니라 보호해야 할 존재이자 남성의 불완전한 파트너로도 그렸는데, 이것이 어린 시절의 내가 여성을 대하는 시선과 행동에 선명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참 나이 어린 여동생을 윽박지르기 일쑤에 심지어는 손찌검을 하기도 했던 내가 동생을 ‘보호하고 아끼기’ 시작했던 것이. 엄청 나쁜 놈에서 일반적인 나쁜 놈으로 조금은 성장했다고나 할까.
결이 조금 다른 하나는 료에게서 받은 윤리적 영향이다. 료와 카오리가 버스에서 강도를 퇴치하는 에피소드에서 오래된 기억을 되새길 수 있었다. 그 버스에는 유치원생 아이들도 타고 있었는데, 료와 카오리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남자 둘이 버스에 오른다. ‘프로’답게 료는 그들이 위험하다는 걸 직감하고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친다. 결국 강도로 돌변해 승객들을 겁박하고 금품을 갈취하려는 그들을 료와 카오리가 퇴치한다. 후에 카오리가 왜 그냥 내리지 않았냐고 묻자 료가 답한다. “그 귀여운 개구쟁이들을 두고 어떻게 내리냐?” 이 장면은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 내게 정의감이 끓어올랐던 건 전혀 아니다. 그보다는 ‘누군가를 돕기 위해 자신의 일을 잠시 접어두는’ 료의 모습이 ‘멋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멋있으니’ 따라 하고 싶었고 그 후로 그런 식의 이타적 태도를 꽤 오래 견지하며 살았다는 건 자랑은 아니지만 사실이다.
다소 개인적인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건 사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 때문이다. 2012년에 일부 웹툰을 ‘폭력성’을 빌미로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하려다 철회한 해프닝을 그사이 잊었는지, 이번에는 온라인 웹툰사이트 레진코믹스의 ‘음란성 콘텐츠’를 규제하겠다고 나섰다. ‘(강압적) 자율규제’로 일단락이 난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규제적 접근’이 보지 못하는 지점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방심위의 부적절한 처사에 대해서 여러 방향의 비판이 있어 왔고 대체로 다 적절하지만, 그간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논점 하나가 있다. 그걸 짚기 위해 지금껏 재미있는 <슬램덩크> 대신 굳이 ‘폭력적이고 음란한’ <시티헌터>를 놓고 이야기한 거다.
(2012년 독자와 작가가 함께 참여한 노컷툰 릴레이)
요컨대 방심위는 ‘폭력적인/음란한’ 만화의 영향을 과대평가하면서 동시에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폭력성’과 ‘음란성’이 설령 다소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그렇게 절대적으로 부정적이지 않다. 작품의 부분적 영향력에 대한 과대평가다. 매체보다 더 실질적인 영향력을 지닌 것은 가족이나 또래집단, 직장 등의 주변 환경이라는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폭력성’과 ‘음란성’의 긍정적 영향도 따질 수 있다. 폭력과 외설을 상상 속에서 경유할 때에야 더 적실하게 얻게 되는 성찰이 있다는 것을 방심위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또한 폭력과 외설로 점철된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다른 영향을 줄 수 있는 장면들이 존재한다. 이렇게 작품의 전체적 영향력에 대한 과소평가를 통해 작품의 다양한 독해 가능성이 몰각된다. 이는 곧 독자에 대한 과소평가이기도 하다.
성인만화 <시티헌터>를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이가 성인이 되어 그 만화를 다시 읽으며 느낀 양가적 감상을 솔직하게 늘어놓은 것은 방심위의 과대평가와 과소평가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어서다. 이런 감상을 나누는 것이 가능하려면 그 만화를 본 경험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니 ‘타율 규제’든 ‘자율 규제’든 문화에 대한 규제는 답이 아니다. 기실 그간 규제가 침해해온 것은 만화가와 사업자의 ‘표현의 자유’만이 아니다. 독자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토론하며 넘어설 부정성을 규제로 막고, 경험을 바탕으로 토론하며 발견할 긍정성을 규제로 막은 것이 방심위와 같은 기관이 여태껏 해온 일이다. 오랫동안, 그리고 크게는 97년에 그들이 만화를 마녀사냥하면서 독자들의 ‘눈’을 뽑아버렸던 것이 토론 없고 성찰 없는 만화 읽기 문화를 지금까지 이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규제’가 전면에 나설 때 침해되는 것은 독자와 시민사회의 자유다. 독자의 ‘표현물에 대한 감상의 자유’와 시민사회의 ‘표현물에 대한 토론의 자유’, 이 두 자유를 침해하는 규제는 답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자유로운 감상과 토론을 통해 작품과 그 영향을 바라볼 만큼 성장한 ‘눈’을 가진 독자들이 방심위보다 큰 힘을 발휘할 때에 만화가와 사업자의 ‘표현의 자유’도 더 책임 있는 형태가 될 수 있다. 다른 답을 찾고 기대할 권리가 우리들 독자에게 있다.
2015.5.1 송고
2015.5.12 <주간경향> 1125호
P.S. 1년 전 글이지만 서재에선 발행도 안했었고 안타깝게도 YES-CUT(25일 현재는 NO-SHIELD)을 외치는 독자들이 등장한 마당이라, 다시 짚어봤습니다. 최근의 맥락과 관련해서는 새 글을 준비 중입니다. <주간경향> 출간 일정상 상황이 어느정도 조용해진 후에나 글이 나오긴 하겠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