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따금씩 가장 처음 실었던 원고부터 올릴게요.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방법


아직 영화 <국제시장>을 보지 않았다. 연말연초에 볼 겨를이 없었는데, 이런저런 말들이 많이 들린다. 그저 영화의 만듦새 문제가 아니라 공동의 ‘기억하기’와 ‘역사 쓰기’의 문제가 얽혀 있는 것 같다. 듣자 하니 생각나는 만화가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란 점에서 닮아 있는 만화들이 여럿 떠올랐지만, 그 중에서도 한 작품의 아버지가 가슴에 박혔다. 어쩌면 내가 만난 가장 특별한 아버지일 ‘안토니오’가 바로 그다.


안토니오는 90세에 요양원에서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했다. 만화는 바로 그 장면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아버지의 일생을 어린 시절부터 다시 훑어간다. 이런 구성은 그의 삶 곳곳에 그의 자살의 이유가 박혀있음을 넌지시 일러주는 듯하다. 안토니오는 스페인의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자랐다. 농사일을 거들기 위해 8세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던 그는 20세에 도시로 탈출하다시피 떠난다. 바로 이듬해 전쟁이 터졌다. 우리가 스페인내전으로 알고 있는 그 전쟁이다. 그 후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이어졌다. 이 전쟁통의 연속을 그린 분량이 이 작품,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지금까지 숨겨온) 한글판 제목이 보여주듯 안토니오는 아나키스트였다. 하지만 전쟁 중에 친구와 동료들의 영향 속에서 뿌리내린 그 사상이 그의 인생 모두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나도 이것을 실감나게 깨달은 건 이 작품을 추천하고 다닌 지 얼마 지나서, 제목 때문에 읽는 사람과 그 탓에 오히려 읽지 않는 사람을 모두 접하고서였다. 작품의 선택에 어떤 정치적 선이 그어져 있는 셈이다. 그 선 앞에 설 때마다 나는 원제(“비행의 기술” 혹은 “비행의 예술”/ El Arte de Volar)를 이야기해 주며 달리 읽힐 여지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낼 일은 아니었다. 평론가로서 그 선을 넘어서 대화하기 위해서는 나도 작품을 다시 읽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새삼 주목하게 된 부분이 있다. 안토니오가 전쟁 후 스페인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하던 시기이다. 예전에는 아나키즘에서 변절하는 과정으로 읽혔던 부분이, 이제는 완전히 새롭게 읽혔다.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나눴던 납탄으로 만든 반지를 도저히 낄 수 없게 된 그가 이렇게 고백하는 대목부터다. “납탄 반지 이후 내가 갖게 된 새로운 반지는 바로 혈육이었다…” 아들을 안고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아이의 탄생으로 내 존재의 이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사상이나 독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아이의 밝은 미래만을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새로운 사명이었다. / 이 애만은 내가 걸어온 길을 피하게 하고 싶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랬다. 그는 아나키즘이라는 사상을 단순히 버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새로운 사상가가 된 것이었다. “신도, 주인도, 국가도 없다!”가 아나키스트의 근본 강령이라면, “오직 자식이 있다!”가 아버지의 근본 강령일 것이다. 그 강령과 함께 안토니오는 전혀 일관되어 보이지 않는, 모순된 삶을 산다. 윗사람을 배신해서 그의 회사를 빼앗고, 빼앗은 회사 일이 너무 많아서 가정에 소홀해지고, 소홀해진 틈을 타 바람을 피게 되고, 그러면서도 아들의 교육이 걱정되어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고, 결국에는 자신이 그랬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동료에게 회사를 빼앗기는 일이 ‘아버지’ 안토니오의 삶을 채운다.


그런데 나는 이 막장 드라마 같은 대목이 너무나 뭉클했다. 물론 묘사와 연출·대사와 내레이션 등 모든 만화의 요소가 탁월하지만, 줄거리로만 놓고 보자면 크게 의미가 와 닿을 것이 없는 삶인데,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밝혀둘 것이 있다.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안토니오’의 아들이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회고를 바탕으로 직접 스토리를 썼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의 온갖 치부를 샅샅이 그려낸 이 시기 이 대목은 너무나 뭉클하다. 그렇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었던 그 진정성도 물론 값지지만, 정작 나의 뭉클함은 아들에게서 온 것이었다.


대상에 대한 서술은 대상 못지않게 서술자에 대해서도 보여주는 법이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작자는 직접 아버지가 되어 1인칭으로 발화한다. (이 의미는 작품을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그렇게 ‘나’로서 고백하는 온갖 이야기들을 보면, 아들과 아버지가 온전히 겹쳐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겹쳐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이 막장스러운 부분이다. 미화하거나 감추는 것이 아니라 아들은 아버지의 치욕스러운 부분을 모두 그렸다. 아들은 아버지가 되어 그가 던적스럽게 살았던 세계를 경험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모순적으로 살아내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직접 앓았다. 그것은 곧바로 아버지의 삶에 대한 긍정은 아니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긍정’한 것은, 당신 스스로의 삶에 대한 후회였다. 그러면서 가장 ‘부정’한 것은, 아버지를 후회하도록 만든 세계 그 자체였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의 자살을 비행(飛行)으로 받아들인다. 아버지를 너무나 잘 이해했기에 아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형식으로 나타난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부정을 긍정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진정으로 자랑스러워한 것이다. 아버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안토니오는 그렇게 해방을 경험했다. 그 해방은 아들에 의해 더 명확해졌다. 불편할 수 있는 이 작품을 깊이 껴안고 인정한 스페인과 유럽 독자들(그리고 어쩌면 한국도!) 덕에, 작가는 이런 말까지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정의와 평등, 그리고 사랑과 번영이라는 날개를 가지고 정직하게 날고 싶어 했지만 그 날개는 처참하게 찢겨졌다. 그러나 마침내 오늘날, 그분은 삶의 무게를 벗어버리고, 픽션이라는 창공에서 긴 실루엣을 남겼다.” 이처럼 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 윤리에 기반한 아버지에 대한 ‘위로’와 ‘긍정’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기와 역사 쓰기라는 공동의 과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직시’를 통한 ‘해방’은 흔치 않다.


<국제시장>이 ‘아버지 세대를 위한 영화’라는 감독의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개인적인 이야기도 섞여있다고 했던 것 같다. 아버지와 그 세대를 위로하는 감독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대한민국식 ‘아버지 사상’을 몸으로 살아냈던 ‘아버지 세대’에 대한 우리 아들딸들의 기억과 역사가 영화의 역량과 한계를 넘어 어떻게 이야기 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새삼 궁금하다. 우리가 윤리를 외면하지 않고서 아버지 세대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2015.1.1 송고

2015.1.13 <주간경향> 1109호



(안토니오 알타리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길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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