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거니는 마음으로

  시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단순히 짧기 때문이고, 가끔 아주아주 쉬운 시만 즐기는데다, 게다가 시의 정반대편에 있다할 산문을 전공하고 있는 내가 종합시험(논문자격시험)은 시론을 덜컥 신청했다. 세 과목 중 두 과목을 골라야 하는데, 소설론은 그나마 해볼 만하지만 비평론은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기 때문. 게다가 시론은, 문제를 1주일 정도 전에 미리 가르쳐 주신다! 

  두둥, 시험 문제는 "시의 예술성(미적 효과)에 대해 논하시오." 

  시 전공 친구한테 자문을 구하고, 황지우의 시론을 참고하고, "시론"이라는 제목을 한 책이 나도 모르는 새 울집에 있길래 좍 읽어보고, 내 주변에서 시와 가장 가까운 독자인 조웬디와 통화까지 한 결과 다음과 같은 컨닝페이퍼를 작성할 수 있었다. 물론 셤 때 실제로 컨닝을 하기 위해 만든 건 아니고, 셤 전에 정리해 보려고 써본 거다. 시험 때는 몇가지 내용을 빠트린 듯하다만, 그리고 아직 합불 판결도 떨어지지 않았다만, 한 번 올려본다. 참고로 이런 식의 문예론을 수용미학 혹은 독자반응이론이라고 한다. 이건 그런 수용미학을 시와 연결지어 본 것으로써, 나름 여러가지를 짬뽕한 내 버전이다. 그러므로 엉망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렌지색은 여기 올리면서 독자를 위해 추가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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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에게 시 읽기가 주는 미적 효과의 가장 시적인 측면은 독자가 시를 - 시인과 시적 화자, 시 속의 세계 등 개별 시가 담고 있다고 독자에 의해 기대되는 모든 것 -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 그 자체와 그 끝에 오는 ‘시적인 것’(황지우의 표현)과의 만남이다. *‘시적인 것’에 대한 설명 필요- 황지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참조.(봐도 정의 같은 건 없음ㅋ)

  황지우의 글에서 제목과 아이디어를 빌린다면, 시인에 의해 발신되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로서 간주관성을 지닌 시를 독자가 수신하면서 시인과 독자 사이에 시 작품을 통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신호와 소통은, 시인에게도 독자에게도 작품에도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 내의 ‘시적인 것’이 시인과 독자와 작품이라는 그릇을 매개로 하여 신호화 되고 소통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신호는 시인과 작품이, 소통은 독자가 그 주요한 주체이다. 시인이 ‘시적인 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직조한 신호는, 언어적 작품에 담기면서 시인의 의도와 전적으로 닿아있지는 않은 독립된 신호로 행위한다. 반면 소통은 기본적으로 독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으로서, 환언한다면 ‘이해했다’는 감각으로 다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해했다’는 감각은, 독자에게 있어 ‘시인의 의도를 이해했다’고 착각되는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관계없는 ‘독자적인 시의 이해’를 의미한다. 그것은 도리어, 독자 자신이 시라는 매개를 통해 창조한 그만의 ‘시적인 것’과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 창조과정 자체와 그 결과물인 이해했다는 감각이 시가 독자에게 주는 미적 효과의 가장 시다운 측면이다.

  ‘시 답다’고 할 때, 이 말은 소설, 수필 등 다른 문학의 갈래들과는 달리 시가 현저히 지니고 있는 속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이 속성은 한 편으로 시라는 갈래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세계에 편만한 ‘시적인 것’의 시적인 발화 방식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시에만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전자는 독자에게 (소설, 수필이 아닌) ‘시를 만났다’, ‘시를 읽고 있다’는 인식을 주는 시의 제도적 효과이다. 이는 ‘시’라는 제도적 갈래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반면 후자는 시를 시 되게 하는 질료이지만, 세계 전체에 존재하는 ‘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상의 무수한 사건에서, 혹 문학으로 그 장을 좁힌다면 소설이나 수필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는 그 ‘시적인 것’을 시적인 발화 방식으로 신호 보낸다는 점에 있다. 결과적으로는, 이 시적 발화 방식이 독자의 창조에 틈을 부여하여, 시가 독자에게 주는 미적 효과를 유발한다.

  시적 발화 방식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시’가 도무지 정의되지 않는다는 점만큼이나 시적 발화 방식을 규정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따라서 시라는 갈래 전체보다, 시라는 갈래에 속한 개별 작품들 하나하나가 말하는 방식을 일반화하여 접근하는 것이 그 불가능성을 우회하여 나름의 답을 도출하는 길이 될 수 있다. (물론 이 일은 다시금 이것이 시만의 발화 방식인가 - 따라서 이렇게 말한다면 시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회귀하게 될 여지를 처음부터 안고 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시 작품에서 많이 발견되는 발화 방식을 몇 가지만 들어보자. (이 방식들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며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 맺어 독자의 이해 과정에 작용한다는 점을 부기한다.) 첫째는 전체적인 의미 해석의 모호성과 난해성이다. 둘째는 조탁되고 선별된 언어의 사용이다. (야콥슨식의 수직적 언어 선택) 셋째는 시적인 문장구성이다.(야콥슨식의 수평적 언어 선택) 그 외에 운율, 이미지의 환기 등이 있다. 이 모든 방식의 개별적 효과는 각기 다르지만, 독자는 이렇게 발화된 시와 그것이 담고 있는 ‘시적인 것’을 통해 그의 창조에 뛰어들 수 있게 된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독자에게 창조의 틈을 열어보여 준다. 시인에 의해 꽉 짜여져 농축된 시적 발화는, 역설적으로 그 농축된 발화 방식 때문에 독자의 틈입을 유도한다. 독자는 짧은 시적 문장을 독자 나름의 문장으로, 조탁되고 선별된 시어를 그것이 독자에게 환기하는 대상으로, 언어가 그려내는 이미지를 독자의 경험 속에 각인된 이미지로, 활자로 박혀있는 운율을 낭송되는 소리로 혹은 독자의 마음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로 재창조하게 된다. 또는 시인에 의해 고안되거나, 작품이 말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별개의 창조물이 계시처럼 독자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것 역시도 시가 매개한 것이다. 또한 독자의 창조과정은 작품에 대한 갈등, 부정, 연결, 보완, 분류, 확대, 종합 등 다양한 여정을 담고 있다.) 이렇게 시 앞에 머무르며 재창조하는 과정과, 그 결과물인 세계 속의 ‘시적인 것’과의 조우가 시가 독자에게 안겨주는 미적 효과이다. 이 미적 효과는 세계가 본래 가지고 있는 ‘시적인 것’이 시인과 시와 독자의 소통을 통해, 결과적으로 독자의 시 향유 안에서 돋아나게 하는 시의 독자적 예술성이다.




* 독자의 시적 향유 능력(문학이라는 제도의 교육에 의거한)과 세계 경험의 차이, 독자의 외적 상황과 내적 태도에 따른 차이, 텍스트 재창조의 구체적 과정, 작가=독자, 개별 작품이 아닌 시집, 시선집, 개별작가전집 등의 읽기 경험의 문제, 독자의 머무름이라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문제 등이 더불어 논의될 수 있으나 논점을 집중하기 위해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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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流男兒 2010-07-08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거 하나 없긴, 있구만.

toon_er 2010-07-09 00:01   좋아요 0 | URL
볼거 하나 없단 말 내가 했나? ㅡ,.ㅡa
스스로 볼거 하나 없는 글을 왜 보고 있냐고 생각하고 본 거 아녀유?ㅋ

風流男兒 2010-07-09 09:26   좋아요 0 | URL
본인의 알라딘 소개글을 보시요 ㅋ

toon_er 2010-07-09 18:30   좋아요 0 | URL
소개글이 왜요?큐큐

웽스북스 2010-07-10 14:11   좋아요 0 | URL
볼것 딱하나 있는 서재
라고 바꿔야겠네. ㅎㅎ

웽스북스 2010-07-09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보면 내가 꽤 굉장한 말을 해준 줄 알겠어. 그나저나 문어군 알라딘 입성

toon_er 2010-07-09 18:30   좋아요 0 | URL
언제 또 쓰게 될진 모르겠다만 일단 알라딘 초등학교 입학을 신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