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자평] 연을 쫓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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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은 베스트셀러였다. 모르기는 몰라도 지금도 적지 않게 많은 이들이 읽고 있을거라 생각한다. 팟케스트에 등장한 이 책 이야기를 듣고 한 번 읽어보자고 생각했다. 베스트셀러야 고만고만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서였다. 이 책을 저녁 10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결국 새벽까지 계속 책을 다 읽고나서야 잠을 들 수 있었다. 분명 '좋은'책이라고 말할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알겠다 싶었다.
[연을 쫓는 아이]는 상투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 소설이다. 마치 헐리우드 영화같다랄까. 어린 시절 저지른 죄를 가진 소년이, 이제는 그 죄가 사라졌다고 아니 잊혀졌다고 믿고 싶은 어른이 된 후에 결국 그 죄를 혹은 상처를 씻고 치유하기 위해 처음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이고, 어쩌면 구원을 받을지도 모르는 그런 이야기이다. 이 얼마나 상투적인가.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의 말대로 상투적이라는건 가장 효과적인 이야기 전달 방법이 아닌가. 가장 효과적인 이야기 전달 방법을 그리고 이야기 구조를 작가는 찾았고 사용했다.
소설의 배경이 굉장히 독특하다. 이야기의 8할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의 배경이 아프가니스탄이라니. 미국과의 전쟁으로만 각인된 저 멀리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가 아닌가. 소설 속 배경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왕이 통치하던 시기, 군부의 쿠데라, 러시아의 침공, 탈레반의 점령으로 이어지지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의 근현대 역사 전체를 가로지른다. 다큐멘터리도 아니로 논픽션도 아닌데,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는 그 어느 기자의 르포보다도 힘이 있다. 어느 지도에도 있는지 모르는 그 나라의 근현대사가 그리고 그 속에 살아남은 이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이야기 속에 녹아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부유한 아버지, 바바의 아들로 태어난 아미르와 그 집의 하인으로 일하는 이의 아이인 하산이 주인공이다. 바바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다고 항상 자신을 자책하는 아미르와 그런 아미르를 충실하게 따르고 믿는 하산은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신분이 다른 두 아이들의 전형적인 이야기를 따른다. 하산의 맹목적인 충성, 그를 친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미르의 죄책감, 하산에 대한 아버지의 과도한 애정. 하산이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아미르는 목격하게 되지만 아미르는 바바의 인정을 받기 위해 그를 외면하고, 그 외면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다시 죄책감으로 돌아온다. 항상 그렇듯 아이들은 어른보다 잔인하다. 자신의 선택에서 받는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 그는 하산을 바바와 자신의 곁에서 내보내기로 결심하고 실행한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미르가 하산을 떠나보내기로 결심을 하는 장면까지 나는 아미르의 잔인함에 속을 부글거리며 책을 읽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름으로 혹은 그때는 어려서 잘 모른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그들의 행동에 추궁을 당하지 않지만, 그들은 필요하다면 때로 어른 보다도 잔인하다. 이언 맥큐언의 [속죄] 에서도 그러했고, [연을 쫓는 아이]도 그러했다. 모든걸 알았고 예상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이들은 명백하게 '의도'를 가지고 행동했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아무튼 내가 이 글을 왜 읽고 있어야 하는지 모를만큼 속을 부글거리며, 아미르의 비열함에 속을 부글거리며 책을 읽어야했다. 그 아이들이 하는 변명은 으래 하나이지 않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혹은 난 그 이후로 항상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이 어디 있는가. 죄책감에 시달려도, 그 일의 피해자보다 더 시달릴 것인가.
하지만 그 부글거림을 참고 책을 마지막 까지 읽은 보람은 분명 있었다 .아미르와 바바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자신처럼 비밀을 가진 여인과 아미르가 결혼을 하고, 시간이 적당히 흘러 생활이 안정이 되었을 즈음 다시 하산을 찾아나서게 되는 아미르의 모습은 그야말로 어린 시절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의미를 보게 된 것이다.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확실하지도 않은 그 어린 시절의 잘못을 되잡기 위해 그를 그리고 그의 아들을 찾아나서게 되는 모습은 한국의 감정으로 표현하자면 짠하게 다가온다.
아미르에 대한 내 안의 부글거림이 소설 어딘가에서 부터 사라졌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어느 순간, 아니 하산을 찾기 위해 자신의 과거와 화해를 위해 다시 아프가니스칸으로 돌아가는 아미르를 만나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고. 그 아프가니스탄에서 자신의 과거와 맞닥드렸던 그 순간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미르가 하산에게 한 행위가 사라지지도 않고 지워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게 아닐거다. 아직도 끝나지 않는 전쟁 - 공식적으로 미국은 종전을 선언했지만- 이 진행되는 나라, 그 전쟁이전에 이미 전쟁보다 더 오래된 아픔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 그 나라에서 살았던 사람들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쉽게 치유와 용서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그래도 어쩌면 서로에게 상처와 아픔으로 기억되는 인연이 어느 순간 용서와 치유의 인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과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소설은 말하는게 아닐까?
용서는 화려만 깨달음이 아니라 고통이 자기 물건들을 챙기고 한밤중에 예고없이 빠져나가는 것과 함께 시작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p.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