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따뜻해지면 좀 걸어다녀야겠다고 마음을 먹은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손을 호호불며 장갑을 꼭 끼고 다니던 어느 겨울이 아니었을까. 조금만 날이 따뜻해져서 이렇게 손이 시립지도 않고, 발이 시리지도 않은 계절이 되면 반드시 걸어다니니라, 계절의 위대함을 마음껏 누리리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벌써 달력은 4월 12일. 이럴수가 이러다가 봄이 다 가겠어 싶은 그런 요즘.
오늘은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운동화를 신고 바지를 갈아입고 나섰다. 버스르 타고 집앞 두 정거장 전에서 내려 슬슬 걸어본다. 어 항상 문을 열었던 가전제품 대리점은 문을 닫았다. 내가 오늘 퇴근이 늦기는 늦는 모양이다. 어, 오늘은 헌책방 가게가 문을 열었다. 평일은 조금 더 늦게까지 하는가보다. 들어가서 책을 좀 들고 나오고 싶지만 오늘은 평일이니 자제하자. 또 계속해서 걷는데 예전보다 몰라보게 동네에 카페가 늘었다는걸 깨닫는다. 주말에는 저 카페에 꼭 가봐야지.
집에 올라오는 길에 있는 시장에 들른다. 과일에 눈이 가서 요리죠리 살펴보니 딸기를 사람들이 많이 사간다. 사실 포도를 사가고 싶었는데 가족들은 딸기를 좋아하니 어쩔 수 없다. 내일은 포도를 사야지. 문득, 혼자 사는 사람들은 과일을 잘 못 먹는다는 말이 생각난다. 혼자사니 다 못먹게 되다보니 잘 사지 않아서 더 못먹게 된다는데, 가족이 함꼐 산다는건 이럴 때는 좀 좋군 이라고 혼자 주억거린다. 음 좋은거 같아 이럴 땐.
시장을 벗어나 본격적인 오르막에 진입하는데 - 우리집에 올라오기 위해서는 절대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겨울에는 눈이 오면 집에 갖힐 수도 있다 ㅜㅜ - 이런, 세상에 목련이 피었다. 피었다라는건 조금 어패가 있고 이제막 몽우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일도 낮기온이 오늘만큼만 따뜻하면 내일은 꽃이 활짝 피겠다. 이럴수가 뭔가 배신당한 기분이다. 난 아직 개나리도 제대로 못보고, 벚꽃도 제대로 못봤는데, 목련이 혼자 피고 있다니. 내일은 점심을 거르는 한이 있더라도 꼭 회사 근처로 꽃을 보러 가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집에 다 올라왔는데, 생각보다 빨리 올라왔다. 내일은 한 정거장 더 먼저 내려서 걸어도 되겠다. 한겨울에 손가락을 호호불며 버스 기다리던 생각을 하니, 이렇게 걸어다니는 일이 꽤나 호사스럽다. 거기에 꽃까지 보고 정말 호사스러운 봄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