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의 여름 휴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오유리 옮김 / 양철북 / 2006년 8월
품절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좀 다르게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후회막급입니다. 매년 유급 휴가가 나올 때마다 충분히 받아서 아들과 놀아줄걸 잔업 같은 건 절대 안 하겠다고 할걸, 적당히 일하고 시간이나 때우면 좋았을걸 하고 말이에요. 실실 비꼬면서 사람 성질 건드리는 과장이 있는데요, 그 동안 몇 번이나 올려붙이고 싶었는데..... 아니, 그러니까 그런 놈들도 시원하게 한 방 날려주었으면 좋았을걸. 간단한 일인데, 그걸 못하고 말이죠, 한나절 내내 참고 있다가 밤에는 진탕 술로 달래고, 다음날엔 부대껴서 다 토하고......-71쪽

슈지 아버지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뭔가 하고픈 말이 있는데 그게 소리로는 나오지 않고, 그저 입술만 움찔거릴 뿐이었다. 유스케도 잠자코 있었다. 슈지 아버지에게 말해 두고 싶은 게 있었지만, 그것은 지금의 이 침묵으로 이미 전달되었을 것이다.-74쪽

변기의 물에 떨어진 가발은 머리카락이 퍼져서 마치 바닷속 해초나 긴 촉수를 늘인 벌레처럼 너울거렸다. 허리와 무릎을 구부려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가발을 들어올린다. 무겁다. 물이 뚝뚝 떨어진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눈시울이 뜨거워질 뿐, 실제로 흘러나오질 않았다. 대신 웃었다. 어깨를 내려뜨리고 얼굴 어디에도 힘 하나 주지 않고 흐흐흐 흐무러지듯 웃었다.-88쪽

슈지 아버지는 오늘 하루 어디에 있었을까. 아무하고도 말 한마디 안 하고 갈 데도 없이 뭘 하면서 한나절을 보냈을까. 유스케도 오늘 하루, 마땅히 등 붙일 자리도, 발걸음 할 곳도 없었다. 슈지 아버지를 흉내내 보았다. 해가 질 때까지는 참으로 길었다. 앉아 있어도, 걷고 있어도, 제자리에 서 있어도, 자기가 어디서 와서 지금 어디에 있고 이제부터 어디로 갈지 도무지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명령이나 속박 없이 보낸 하루, 그것을 '자유'라고 부를 수도 있다. 자유를 부여받고도, 어찌 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매는, 이제는 젊지 않은 남자의 모습을 보고 젊은이들은 차가운 웃음을 흘릴까. 당신같이는 되고 싶지 않다며 냉정하게 말할까.-91쪽

우리들은 어디서 와서, 지금 어디에 있고, 또 어디로 가는 걸까. 낮동안 답을 찾지 못했던 이 물음은, 지금도 가슴속 어딘가에 덩그러니 물음표로 남아 있다. 아스팔트 도로 위에 피어오르는 신기루처럼, 그것은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손에 잡히지 않는 물음인지도 모른다.-100쪽

"부모와 선생님은 모범 답안이 아니지요. 그저, 어른일 뿐입니다.
노력과 인내가 사실은 보상받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들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러면서도 언젠가 보상받을 거라고 아이들보다 더 믿는 마음에...간절히, 믿고 싶은 거지요, 우리들은..."-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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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8-09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생각나요.. 코타키나발루에서도 허수아비를 보았어요. 우리 허수아비 보다 허술한 차림새던걸요^^ 배꽃님 오늘도 건강하게 지내시길...

치유 2006-08-10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저도 어릴적에만 허수아비를 보았네요..^^&
그곳에도 허수아비가 있었다니..네 님도 늘 건강하게 지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