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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북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피터 탤랙 엮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과학 백과 사전? 꼭 그렇지는 않다. 역사 순으로 배열된 구성에 각 주제마다 딱 2 page씩 할당되어 있다. 왼쪽 page에는 1000자 이내의 설명이, 오른쪽 page에는 그림이나 사진이 한면을 가득 채운다. 처음 책을 받아 보고는 기대했던 것과는 달라 일순 당황했지만 차근히 읽다 보니 나름의 맛이 있다. 한 눈으로 그 맛을 지레 알아챌 수는 없고 꼭꼭 씹다 보면 숨어 있던 깊은 맛이 느껴지는 식이다.
우선, 본문 설명도 백과 사전 식은 아니다. 백과 사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내용 중에 나온 새로운 용어를 다시 찾아 다녀야 하고 그러다가는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인데, 이 책에서는 그 자리에서 결론이 난다. 전체 맥락을 잡아 주면서도 간결하고 함축적인 설명 덕이다 (필자들의 면면을 보라). 그러나 행간에 숨겨져 있는 뜻은 만만치가 않다. 아쉽다면, 각주를 따라 책 전체를 넘나들며 퍼즐을 풀 듯 읽어 보자. 또 다른 맥락이 보일 것이다. 그래도 부족하면 이 책에서 얻은 키워드로 인터넷을 뒤져도 좋겠다. 한편, 그림이나 사진도 본문 설명을 보충하거나 깊은 정보를 주기보다는 그 자체로서 어떤 분위기를 느끼게끔 해주는 식이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예를 들면, 식물의 유성 생식 편(p.84)에서는 큐피드가 식물에 화살을 쏘는 1804년 어느 화가의 그림이, 비타민 편(p.248)에서는 1890년의 대구 간유 광고 포스터가 실려 있는 식이다. 좀 엉뚱하다 싶기도 하지만 독자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남겨 주는 듯 하다.
책 전체로 보면, 고대의 천문학, 수학, 생물학, 의학에서부터 20세기 물리학과 생물학의 도약까지 인류 과학사가 총 망라되어 있다. 주제 선정 기준은, 오랜 숙제를 해결했거나 새로운 탐구 영역을 개척했거나 우리의 세계관을 바꿔 놓은 것들이다. 비록 나중에 틀렸다고 밝혀졌지만, 그 분야에 심대한 영향을 준 것도 포함되어 있다. 과학이 직선적으로 발전하는 게 아니기에 이런 실패(?)담도 의미가 있겠다. 어차피 과학도 인간이 하는 일이고 보면, 그 안에 창조성과 상상력 외에도 경쟁과 혼란, 천재적 직관과 실수가 이리저리 얽히는 게 당연하고, 우리는 그 내막을 들여 다 보는 재미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씹을수록 그윽한 맛만 나는 게 아니다. 떫은 맛도 있다. 이 책에서 글만 추려서 작은 활자로 재편집한다면 한 ₩5,000 짜리 얇은 소책자가 될 듯 한데, 그렇다면 비쥬얼 디자인 편집 값만 ₩50,000 이었다는 말이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소장용 책을 원한 게 아니라면 꽤나 비싼 값을 치른 셈이다. 가끔 돌도 씹힌다. 이렇게 디자인으로 승부를 거는 책에서 오자, 오류는 다 된 밥에 돌 가루 뿌린 격이다. 다음 판에서는 수정되리라는 기대로 하나하나 읊어보자. p.96 본문 중의 ‘명왕성’(Uranus) → ’천왕성(Uranus)’, p.162 본문 중 ‘샐리스는 천왕성을’ → ‘해왕성을’, p.172 본문 중 ‘1865년’ → ‘1856년’, p.198 기체의 밀도가 ‘높을’ 때 → ‘낮을’, p.247 광속은 초속 30km → 30만km, p.286 두껑 → 뚜껑, p.310 온다 → 온도, p.350 트랜지스터를 설명하면서 ‘구멍’은 심했다. → ‘Hole’이나 ‘정공’, p.406 19780년 → 1970년, p.452 조개의 크기가 150m → 150mm. 더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자, 이제 결론. 역자가 말한 것처럼, 좋은 책이란 지식 수준에 관계없이 누구나 읽으면서 독자의 관점과 수준에 따라 저마다 다른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면, 이 책은 그 기준에 부합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칼 하게도 그토록 비싼 값을 치른 디자인이 이 책에 맛을 더하기도 했고 깎아 먹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