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치의 부리 - 갈라파고스에서 보내온 '생명과 진화에 대한 보고서'
조너던 와이너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추천 / 이끌리오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솔직히 그 동안 진화생물학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가설 검증을 위한 측정과 분석은커녕 실험 자체도 불가능한 판에 과연 자연과학이라고 명함을 내밀 수 있을까 싶었다. 잘 봐주면 ‘논리학’, 좀 깎아 내리면 ‘추리 소설‘쯤으로 여겨지기 십상이었다. 다윈 자신도 진화는 너무 느려 관찰할 수 없다고 말했고, 다윈이 자연선택을 증명한 게 아니라 그 필연성을 말했을 뿐이라는 비판도 있어왔다. 그러니 문외한으로서는 이렇게 밖에 생각할 도리가 없었다고 변명을 해본다.

이런 문외한이나 비판가들에게 다윈의 영령英靈이 다시 깨어나 외친다. “태평양 한가운데 어느 무인도에 사는 참새들의 입모양을 자세히 그리고 꾸준히 살펴 볼 지어라.” 사실, 다윈 자신은 놓쳤지만 130 여년 뒤 그의 추종자들이 갈라파고스 핀치의 부리에서 진화의 메커니즘이 바로 자연선택임을 ‘생생히’ 밝혀냈다. 다윈이 미처 상상도 못한 순식간의 시간(20년) 만에 진화의 증거가 드러난 것이다. 왜 130 여년 동안 이 사실을 못 밝혔냐고? 그 차이가 너무 미미하고(1mm), 그 시간이 성과를 기다리는 학자들에겐 너무 길었기(20년) 때문이다.

고립된 서식지에서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환경 변화에 따라, 1mm 차이 뿐인 부리 길이가 핀치의 생사를 좌우하고, 따라서 살아 남는 그 후손의 형질이 결정된다. 이런 자연선택과 함께 성선택, 경쟁, 잡종교배 등이 작용하여 종의 분화와 융합마저도 결정된다. 이 책은 여느 진화생물학 책처럼 난삽한 여러 상상을 이리저리 나열해서 헷갈리게 하지 않고, 위와 같이 명백한 증거를 갖추고 일관된 논지로 책 전체를 관통한다. 그래서 ‘추리 소설’ 운운하는 누구 같은 문외한이 오해를 풀고 제대로 이해하기 딱 좋다. 종종 지나친 수사修辭가 논지를 흐려놓지만 큰 맥락에서는 문제없다.

읽다 보니 문외한은 또 궁금증이 생긴다. 살충제에 내성을 키워 더 이상 약발이 먹히지 않는 곤충이나, 의약분업을 시행하게 만들 정도로 점점 더 항생제에 끄떡없는 바이러스도 진화의 증거가 될 수 있지 않나? 아니나 다를까, 곧 이어 DDT와 피레드로이드에 저항성을 갖는 헬리오티스 나방, 페니실린 저항성을 지닌 네이세리아 균, 그리고 AIDS 바이러스와 독감 바이러스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굳이 구별하자면 자연선택이라기 보다는, 인간선택(?), 즉 인간이 자연과 마찬가지로 모든 생물 종에게 더 빠른 속도의 진화를 강요하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저자의 말대로, 아직까지 인플루엔자 특성과 AIDS 특성이 결합된 바이러스가 나타나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다. 언뜻 건방진 용어 G.O.D.가 원래 뜻대로 다양성의 생성(Generation of Diversity)이 될지 파괴의 생성(Generation of Destruction)이 될지는 심각히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이 책이 다윈에게 바치는 헌사獻詞 ; “라마르크주의를 뛰어넘고 우여곡절의 겪으며 신다윈주의, 종합진화론으로 변모해온 찰스 다윈 경이여. 이제는 편히 주무시길...” 흰 턱수염 속에서 씨익 미소 짓는 얼굴이 보이는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