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 - 묵점 기세춘 선생과 함께하는
기세춘 지음 / 바이북스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읽기의 즐거움을 다시 한번 알게 일깨워 준 책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다름 아닌 저자의 사상과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古典은 그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어 더욱더 소통의 의미를 배가 시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墨子>>는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묵자를 접하는 동안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기독교의 복음서와 불교의 법화경, 마르크스의 유토피아,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등 마치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주요한 사상이 어떻게 그 옛날 한개인에 의해서 설파되었을까 하는 생각과 인문사상사를 다시 집필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묵자의 내용이 친근감으로 와닿았던 것이다. 

묵자는 단지 중국사상의 르네상스시대였던 춘추전국시대에 유가, 도가, 법가등 수많은 사상가중 하나로서 그리고 좀 더 나아가서 '겸애사상' 정도를 주창했던 잊혀진 고대사상가로만 알고 있었던 일자무식의 필부인 나에게 그래서 기세춘선생의 <<묵자>>는 많은 충격을 던져 주었다. 

사실 동양사상은 그 다양성이나 깊이면에서 서양사상과는 비교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심원하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근대화라는 담론에서 서양의 영향을 받게 되어 그 의미가 퇴색한 부분도 있지만 그 근원을 고찰해보면 인류문명의 뿌리와도 같은 존재가 바로 동양사상인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이 한때 정치논리(한제국의 유교 공식화)에 의해 억압되었고 서양의 근대화담론에 의해 휘청거렸던 것이다. 심지어 고전사상은 사회발전의 걸림돌이나 병폐로 치부되기도 하였다. 그나마 몇몇 뜻있는 학자들에 의해 그 다양성을 재발견할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보면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정치상으로는 혼란시대라고 하지만 사상적인 면에서는 그야말로 서구의 르네상스시대를 능가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사상의 다양성이 공존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현대에 이르러 그 의미가 더 확대되고 연구되고 있지만 유독 묵가만이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주목받지 못한 이유가 여러가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가장 큰 이유는 두가지 정도라고 생각된다. 

첫째, 묵자의 출신성분이 불손하다. -한족의 입장에서-

공자, 노자, 한비자, 순자, 맹자등 이름만 들어도 장장한 이들은 한족의 후예들이다. 하지만 묵자의 경우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는 한족출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묵자는 어디에서 왔을까? 중국 사서의 기록으로 추론하면 묵자는 고죽국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바로 묵자가 동이족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추친된 중국의 상고사 발굴 프로젝트에 의하면 고죽국이 위치한 홍산문화, 하가점하층문화가 바로 동이족의 문화라는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보면 묵자는 동이족의 후예였고 그래서 한족의 시각에서 그의 사상을 부각시키는 것이 다소 부담스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둘째, 묵자는 아주 불손한 사상의 소유자이다.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공자를 비롯한 사상가들의 출신성분은 대체로 사(士)였다. 요즘으로 치면 식자층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묵자의 경우 비천한 노동자 출신으로 출신만 놓고 보면 이들과 비교대상이 되질 않는다. 특히 그가 내세운 겸애사상 즉 만민평등사상은 당시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왕조국가에서도 받아 들이기 힘든 사상임에 틀림 없었다는 것이다. 하물려 현대의 정치제도하에서도 상당히 진보적인 사상이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족이 아니고 하층민출신으로 위험천만한 사상을 펼친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진시황의 전국통일이후 진행된 집단의 망각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서서히 역사의 망각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묵자의 사상을 좀더 쉽게 그러면서도 그의 뜻이 제대로 살아있는 말로 함축하면 아마도 "天下無人"  "兼愛" 이 두마디로 대변될 수 있을 것이다. 글자그대로 풀이하면 천하무인은 천하에 남은 없다라는 뜻이고 겸애 두루평등하게 사랑하라는 뜻이 될 것이다. 묵자의 철학과 정치,경제, 외교,반전사상등을 한꺼번에 표현하는 말이 바로 천하무인과 겸애이다.
천하에 남이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나를 대하듯 남을 대해야 하는 것이고, 자기 가문을 대하듯 남의 가문을 대해야 하는 것이고, 자기 나라를 대하듯 남의 나라를 대한다면 그 어떠한 분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하늘아래의 그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가에서 말하는 사농공상의 그 어떤 신분적인 차별이 없는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입장이다.
겸애는 천하무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되는 말이다. 천하에 남이 없는데 어찌 두루두루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루 평등하게 사랑하는 세상이 묵자가 바라는 바로 유토피아였던 것이다. 현대인들은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공동?? 묵자가 주장했던 것이다. 

묵자는 천하무인/겸애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두가지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삼표론과 절용론을 통해서 천하무인, 兼相愛 交相利로 이르는 길을 설파하고 있다. 마치 예수가 그의 하나님을 찾아 가는 구도의 길을 제시하듯이 말이다. 묵자가 말하는 구도의 길은 삼표론과 절용론으로 대변된다. 

三標論
묵자는 천하무인/겸애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天志)만이 가치판단의 근원이면서 표준이라 주장했다. 묵자가 제시하는 세가지 표준을 이른바 삼표라고 한다.
: 하늘의 뜻을 실행한 바 있는 성왕의 역사적 경험을 표본으로 삼는 것이며(본받을 표본이라는 뜻으로 보편적인 선)
: 판단 주체인 인민의 이목에 따르는 것이며(근원으로 삼아야하는 공동의 선)
: 실제로 인민의 이용후생에 이로운 것을 따른다는 것(백성의 이익을 위한 구체적인 실용성)
묵자가 말하는 모든 가치의 근원은 유가에서 말하는 군사부(君師父)가 아니라 일반 백성의 뜻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봉건 지배 체제를 부정하는 혁명선언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맹자는 묵가들을 부모도 모르는 탕아들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묵자의 민의는 이러한 효나 충의 개념을 뛰어넘는 담론이다. 당시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를 반대하고 본받을 표준은 오직 인민의 뜻과 이익뿐이라고 주저없이 주장했고 이러한 삼표만이 천하무인를 이룩하는 기준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지금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보다 더 민본주의, 민주주의적인 사고인 것이다.

節用論
묵자가 말하는 절용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절약의 개념과는 사뭇다르다. 절용이란 절도 있는 소비를 지칭한다.
그럼 절도있는 소비란 어떤 의미인가? 백성들로 하여금 재화를 풍족하게 사용하토록 하되 이용후생에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은 결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첫째로 백성의 이용후생에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은 생산하지도 말고 할 필요성도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재화는 그 본래의 목적대로 소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백성의 노동과 자원을 지배계급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유가에서 강조하는 예악(禮樂)의 개념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묵자는 귀신에 대해선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도를 넘어서는 장례나 호화로운 음악으로 인한 재물낭비를 비판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절용의 도를 넘어서는 것이 요즘의 경제학 용어로 말하면 시장실패의 원인이 되고 또한 전쟁의 목적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자기 나라에서 나오는 물산을 주어진 목적대로 사용하게 되면 전쟁은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기막힌 발상인가 묵자가 아닌 그 어떠한 이가 이처럼 생각했겟는가. 이것은 묵자 자신이 노동계급출신이기 때문에 이런 폐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특히 고대의 경우 전쟁의 목적중 가장 큰 목적인 이러한 노동력의 확보였다는 점에서 묵자는 절용을 통한 자국의 경제안정과 반전사상을 동시에 설파했던 것이다.

이처럼 묵자는 천하무인과 겸애가 실현되기 위해서 삼표론과 정용론을 방법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방법론의 핵심은 다름아닌 백성의 뜻(民意)에 따라 백성의 이롭게(利)하는 것이 진정한 성인의 방침이라는 것이다. 국가가 지향하는 모든 정책은 결국 인민의 행복을 위해서만이 그 존재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백성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사상보다 묵자의 사상은 사람을 중요시 한다. 유가의 사(士)가 아닌 일반 백성을 중요시 한다. 백성의 뜻이 바로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묵자는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만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점은 민주화된 제도에서 정치를 펼치고 있는 지금의 정치인들에게 많은 점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러한 백성본위의 사상으로 인하여 묵자사상은 그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굳 없었던 것이다.

묵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토탈리스트라 할 정도로 철학,정치,외교,사회,종교,경제등 분야에서 그의 표현처럼 두루두루 걸쳐 확인되고 있다. 그 어떠한 사상가보다 확고한 신념과 자기정체성을 가졌던 사상가였던 것이다. 비록 묵자의 사상은 그 당시에 철저하게 외면 당했지만 예수의 하나님과 불교의 중생구제, 애덤스미스의 국부론, 마르크스의 유토피아를 통해서 그 면면을 전달했던 것이다.약 2500여년전 이러한 불세출의 사상가의 사상이 시대를 흘러 지금에 와서야 빛을 보게된 것은 어쩌면 역사라는 신의 시샘은 아니였는지 모르겠다.


忠實欲天下之富 而惡基貧    진실로 천하가 부유하기를 바라고 가난을 싫어한다면
欲天下之治 而惡基亂           또한 천하의 태평을 바라고 혼란을 싫어한다면
當兼相愛 交相利                  마땅히 두루 평등하게 서로 사랑하고 이롭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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