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편지
마르셀 소바죠 지음, 백윤미 그림, 김문영 옮김 / 샘터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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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려거나, 혹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을 때면, 어떤 확실한 기호 체계도 수중에 갖지 못한다. - 롤랑 바르트

사랑처럼 ‘기호의 불확실성’이 암울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또 있을까? 언어의 범람 속에 살면서도 정작 내면의 소요를 적확하게 인화할 수 있는 언어를 찾기란 요원한 일이다. ‘내 사랑을 믿지? 그렇지?’로 시작되는 『마지막 편지』는 주인 찾지 못했던 저자의 슬픈 시니피에들로 가득차 있다. 사랑의 순간에 갖게 되는 조심스러움은, 고백이 야기할 감정의 왜곡과 무반응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변질된 시니피앙으로 표출된다. 하여 마르셀 소바조라는 여인은 사랑의 관계에 있어서마저,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회적으로 돌려 말하는 방법에 익숙해있다. 그것이 상대에게 긍정으로 작용할지, 부정으로 작용할지 모르는 모험 속에 스스로를 방기하는 것이다.

이렇듯 어눌한 사랑이 정작 사랑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에야, 생이 종착지에 다다른 순간에야 비로소 명징한 언어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책장을 열고 얼마간은 실연한 여성들의 공통적인 징징거림으로 읽혀 거북하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반추하며 담담하고 단정하게 써내려간 그녀의 편지를 읽다보면 배신으로 인해 눈물 쥐어짜는 순간들이 얼마나 하릴없고 부끄러운 짓인지 짐짓 송연해지는 것이다. 마르셀 소바조는 시간의 비가역성을 직시하며 사랑 뿐만이 아니라 관계를, 자아를, 나아가 삶을 냉철하게 조망한다. ‘강하고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생각의 풍부함’에 매료되었던 남성들은 결혼의 제도에 합류하게 되면서부터 남성의 태생적 지배 본능에 굴복하여, 고분고분하고 범상하며 온순한 여성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하지만 연인을 위해 순종적인 역할을 전담하는 것은 존재감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 존재감을 상실한 채 이어가는 사랑은 불구의 사랑이다. 하여 마르셀 소바조는 ‘사랑하는 남자를 향해 어린애처럼 열광하면서 자신의 성숙을 포기하고 남자에게만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으로 나 자신을 파괴하고 싶지 않았다.’라고, ‘자신의 행복에 증인이 될 수 없다면 그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이 경험했던 감각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아주 사소한 부분들까지 기억하려 했던 일이, 그가 없을 때 자신이 가장 아름답게 꽃피게 될까봐 조바심치던 일이, 그가 느끼는 것을 자신도 느끼기 위해 빠르게 걷던 걸음을 늦추고 파리의 구석구석을 냄새 맡고 바라보고 소리 듣던 일들이, 이제와 사랑을 버리고 우정의 이름으로 명명되어진다면 어느 누가 고통스럽지 않겠는가. 『마지막 편지』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내면의 파괴로 이어지지 않고 폭우에 맞서듯 당당하게 일어서기 때문이다. 마르셀 소바조는 사랑이 갖는 물리적 작용과 관계의 부적절함, 모호함 등을 탐구하면서 인간에게 내재된 이기심과 자기합리화, 취약한 자존감, 감정의 그릇된 전도, 실존, 가치있는 삶 등을 성찰한다. 그녀가 ‘종교적 행복감’이라 일컬었던 마지막 춤이 닫히는 순간, 정체 알 수 없는 희열과 슬픔을 동시에 느껴야 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그녀가 누린 마지막 행복이었기 때문이리라.

이미 70년 전에, 이렇듯 앞선 사고로 외롭게 저항하던 마르셀 소바조는 모든 선구자들이 그러하듯 33살의 나이에 신의 부름을 받는다. 무정형의 사랑과 자신을 밀쳐낸 변심, 비가시적인 죽음을 각혈로 토해내면서 묵묵히 자신의 생각을 살다간 한 여인의 비극적 생, 그 앞에서 평화를 감지했다면 야박하단 핀잔 면치 못할까? 책을 덮고 느꼈던 평화가 오롯이 그녀의 것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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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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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르한 파묵(52)의 집필실은 언덕 위에 있었다. 베란다 문을 열면 아래로는 작은 모스크(이슬람 사원)가 보였고, ‘골든 혼’으로 불리는 만(灣)의 푸른 물길이 눈에 들어왔다. 만의 저 건너편으로는 옛 오스만제국의 톱카프 궁전과 블루 모스크가 서 있는 고도(古都)가 아스라하게 펼쳐졌다.

지난 4월 동아일보에 게재된 오르한 파묵 인터뷰 기사 중 일부다. 오르한 파묵은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로 종종 보르헤스와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탈로 칼비노와 비견된다. 『하얀성』을 읽기 바로 전 그의 가장 성공작이라는 『내 이름은 빨강』을 읽었지만, 전 세계가 열광하고 간혹 측근이 전해주는 칭송의 소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소심한 인간인지라 독서 후 세인들의 평가와 상치되는 느낌을 갖게 되면 심히 불안하다. 무언가 놓친 게 있으리라는 조급증은 결국 내 지식의 얄팍함과 남독의 습관이 야기한 난독증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귀착한다. 나는 오르한 파묵을 이해하고 싶었고 진실로 함께 경배하고 싶었으므로 웹사이트를 뒤지며 그에 대한 소문의 진상을 캤다. 하지만 역시나, (그의 소설이 나쁘진 않았으나) 그를 향해 열광하는 소리들이 난 참 낯설다. 서두에 적었던 기사를 읽으며 근사한 서재를 가졌구나, 부럽다, 했던 것이 전부.

‘하얀성’은 ‘기독교’를 의미한단다. 그렇다면 결국 호자와 내가 청춘을 바쳐 설계하고 제작한 무기가 하얀성 앞에서 주저앉아버리고 만 것은, 서구 문명에 잠식된 동양적 전통을 상징하는 것이란 말인가? 난 외려 개인의 빙의현상으로 읽었는데? 호자와 내가 책상에 마주앉아 과거의 기억이며 죄에 대한 고백을 늘어놓는 것은 감금되어 있던 무의식을 끌어내 외부적 힘으로 사용하려는 의지이고, 기꺼이 그것에 지배되기를 허하여 극단적 행동을 가능케 한 것이라 읽었는데? 보태어 난, 호자와 내가 쌍둥이처럼 닮은 각각의 인물이 아니고 분열된 하나의 자아라고 읽었는데? 허나 이 또한, 무언가 있을 게야 분명, 하는 의구심이 촉발한 짜맞추기식 감상이었는데 말이다.

 ‘여러 가지 정황들이 서로 모순 양립’ 하여 독자에게 착시 현상을 일으키게 만든다는, 그래서 이 책은 정교한 미스터리이고 해답없는 수수께끼, 모종의 두뇌 게임이라는데 난 너무 단순하게 읽었다. 보르헤스가 파묵보다 훨씬 지적이고 환상적이며, 마르케스의 사랑이 더 본질적이고 칼비노의 허구가 보다 더 자유롭고 우화적이고 모험으로 가득하다. 세간의 환상적인 평이 아니었다면 그래도 퍽 매력적이었을 소설을 의문부호 가득한 채로 읽은 듯하여 파묵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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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6-21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막 주문했답니다...

마녀물고기 2004-06-21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꼭 참조하겠나이다. 덮었는데도 자꾸만 뒤가 켕겨서 말이지요.
 
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이성적 행위라 보고, 모든 인간은 알기 원하고 인간의 모든 지식은 감각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고등학교 미술 시간, 수염 텁수룩한 선생님은 ‘원근법’을 설명하기 위해 자주 아리스토텔레스를 들먹였다. 검정 일색이었던 옷차림과, 표현주의파의 시를 읽는 것 같은 감흥 운운하며 엘비스 프레슬리에 열광하는 것을 보며 나는, ‘전혜린 광신도’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눈치챈 것은 반에서 몇몇 아이들 뿐이었으므로, 그 몇몇이 은밀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밀회를 나누는 일은 자연스러웠다. 이른 바 ‘문학소녀’들의 얼치기 자긍심이었던 셈이다.

선생님은, 원근법은 신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로의 변환을 의미하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르네상스의 이념을 예술의 분야에 적용한 가장 뚜렷한 실례라고 하였다. 그러고선 평면적인 중세의 그림과 초기원근법이 사용된 그림 몇 점을 걸어놓으시고는 득의만연한 미소를 지으셨다. 봐라, 새로운 화법을 대면하고 중세인이 겪었을 가치관의 혼란이 느껴지느냐. 1분단에서부터 5분단까지를 느린 화면으로 흐르는 시선이 귀엽기는 하였으나, 아메리카 대륙이라도 발견한 듯 들떠있는 선생님의 홍조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가치관의 혼란이라니, 내겐 그저 화풍의 변화나 기껏해야 무지의 타파 정도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내 이름은 빨강』은 당시 선생의 소년스러운 자부심을 환기시킨다.

오르한 파묵은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서, 시대와 시대의 틈새에서, 새로움에 대한 매혹과 죄의식 사이에서 번민하는 터키인들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세밀화가는 언어의 기록을 그림의 기록으로 전환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신의 말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인물과 사물을 완전하게 묘사하는 것이 온당했고, 때문에 그들이 묘사하는 것들은 같은 공간에 같은 크기로 놓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공간에 여러 가지를 함께 놓다보니 어쩔 수 없이 공간의 협소함으로 인한 갑갑증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그들에게 신의 음성, 신의 눈이 아닌 인간의 감각적 경험을 통해 얻어진 상징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원근법)은 두려움을 일으켰다.

원근법은 신이 구축한 평면의 화면에 잃어버린 3차원을 재현하려는 인간의 욕구이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이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본 외적인 실체를 그리는 것은, 인간의 개인적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교회의 시녀가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으며 신의 불완전함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신에게 속한 만물을 인간의 영토에 끌어들이는 일, 그것은 신의 신성함을 인간의 시간으로 지우는 일이고 인간성마저 종교의 한 속성이라 여기던 그들에게 신으로부터 인간의 분리를 외치는, 우상 숭배의 표징이었으니 그들이 느꼈을 두려움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문명의 충돌은 가치관의 충돌을 야기한다.

이러한, 세계관과 이념에 고정적 법칙은 없다는 것에서 출발한 오르한 파묵은 진중함과 엄숙함 사이에 살인사건과 로맨스를 배치해 둠으로써 지루함의 혐의에서 벗어난다. 또 챕터마다 각기 다른 화자가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각각의 언어로 자분대게 함으로써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내 이름은 빨강』에 속독은 어울리지 않는다. 가장 좋은 독법은 연상법이다. 화가의 눈으로 보고 화가의 손으로 그려갈 때라야 독서는 완성된다. 그만큼 오르한 파묵의 묘사는 세밀하다. 책을 읽으며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 느리게 걸으며 파묵의 풍광을 음미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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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물고기 2004-06-19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연장의 로얄박스는 원근법이 가장 이상적으로 나타나는 위치에 둔댄다.

galapagos55 2004-06-24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챕터마다 다른 화자가 등장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각각의 언어로 자분댄다"..적극 동감하는 이 소설의 장점이에요.^^/ 더불어 다른 화자들의 언어를 작가는 명료하게 구분하고 그 특징을 곧게 살려 표현하고 있지요. 재능이 많은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녀물고기 2004-06-24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심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같은 범인으로서는 흉내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재능이 많은 작가인 건 분명한 듯 싶습니다. 그런데 갈라파고스라니.. 생태학에 관심이 많으신가요?
 
10대를 위한 재미있는 경제 동화
톰 브라운 지음, 조영희 옮김, 팽성일 각색, 손영기 감수 / 명진출판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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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는 시간을 멈추는 능력을 가졌다. 그가 손가락을 딱 튕기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소리, 움직임, 냄새까지도 죽어버린다. ‘희소성의 원칙’ 때문에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는 그의 제의가 달갑지 않다. 그와 밥을 먹음으로써 치러야 하는 시간의 비용이 아깝기 때문이다. 내일이 시험인데! 하지만 그는 시간을 멈추는 능력을 가졌고 세상이 멈춘 동안 그들은 여유있는 점심을 즐긴 후 음식점을 빠져 나온다. 그야말로 공짜 점심이었던 셈,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가방을 음식점에 두고 나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벌써 버스를 타고 사라져버린 뒤였고, 그녀는 음식값 떼먹고 뺑소니 친 부도덕한 시민이 되어 주인 아저씨에게 일장 훈계를 들으며 음식값을 치룬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경우에든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라고.

‘대한상공회의소 하이경제’에는 키득거림이 살고 있다. 딱딱한 경제 용어와 개념을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문장으로 말랑하게 녹여놓는 사람이 있다. 그는 경제에 ‘경’자만 들어도 머리에 쥐들이 오락가락하는 나 같은 사람조차 ‘헤이, 경제 그거 별 거 아닌데?’라며 건방지게 다리를 떨 수 있게 만든다. 그런 그가 10대를 위한 <재미있는 경제동화>를 내놓았다. 톰 브라운이라는 경제 전문 칼럼니스트의 글을 각색한 것이기는 하지만 읽다보면 팽성일이란 남자의 능글맞은 유머와 딱딱 마주친다. 재미있고 유익하다.

그는 백설공주, 신데렐라, 잭, 럼플십스킨 등 모르면 외계인일 동화 속 주인공들을 데려다 현재를 살게 한다. 그들의 구차한 삶에 구원이 되는 것은 당연히 백마 탄 왕자도, 유리구두도, 하늘에서 떨어진 우연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시장 경제 원리의 장점과 단점을 이해하고, 그것에 입각한 균형 잡힌 시각과 현실에 응용하는 부단한 노력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용돈이라는 것을 받아보지 못했다. 준비물을 사야 한다거나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말하면 손바닥에 동전이나 지폐가 떨어졌다. 땅거미가 가무룩해질 때까지 골목을 누비다 보면 언제나 손바닥이 텅 비곤 했다. 부모님이 어떻게 돈을 벌고 그것을 어떻게 운용하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현실 경제에서 탄력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거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에서 발생하는 기회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게 수입은 곧 지출을 의미했다. 그래서 결과가 어떻느냐고? 말해 뭐해, 생각하기도 싫다.

기존의 경제 관련 서적들이 돈 버는 것이나 자산 관리, 금융 지식에 치우쳐 있는 반면 이 책은 청소년들이 경제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할 가치관 입장에서 접근한다. 앞서도 말했듯 시장을 지배하는 경제 원리와 그것의 장단점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정도 시장경제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을 갖출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너무 재미있다. 백설공주와 반지원정대가 만나고 럼플십스킨과 치타가 만나고 돼지 세 자매와 지킬하이드씨가 만난다. 게다가 그 깜찍한 문장들이라니! 7편의 동화와 각각의 동화에서 ‘배우는 경제 지식’을 팁으로 하나의 챕터가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10대를 위해 정말 좋은 책이 나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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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06-16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경제라면 꽝인 저에게도 꽤나 솔깃한 리뷰군요.

마녀물고기 2004-06-16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대를 위한, 이라고 해놨는데 제가 봐도 좋더군요. 제가 워낙 덜 돼서.. -.-
 
촛불의 미학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이가림 옮김 / 문예출판사 / 197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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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태우는 걸 즐긴 지 십 년이 넘은 것 같다. 무신론자이기는 하나 사찰의 고즈넉함과 절밥의 정갈함에 끌려 간혹 엄마님을 따라 산에 오르곤 한다. 솔가지 사이로 산새 드나드는 모습, 인적 드문 산길을 멋지게 활보하는 다람쥐의 경쾌함, 황토흙의 짓궂은 장난, 서늘하고 새하얀 대기, 바람이 굴러 만들어내는 풍경소리, 그리고 짙푸른 향 냄새, 이들은 소란스러운 마음을 은은하게 어루만져 잠들게 하는 태초의 어머니다. 석가모니불과 협시불, 무시무시한 탱화에 잔뜩 움츠러든 마음을 하늘하늘 나비잠 자게 만드는 것, 바람을 안고 포르르 대기로 사라지는 푸른 연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육체는 공기보다 가벼워져 내 거처하는 곳의 누른 때가 참으로 하찮게 여겨진다.

요즘 태우는 것은 일찍이 미당 선생께서 ‘실파와 생강과 미나리와 새빨간 동백꽃, 거기에 바다 복 지느러미 냄새를 합친 듯한 미묘한 향내’라 일컬었던 침향이다. 침향은 향 중에서도 으뜸으로, 바다와 개펄이 만나는 땅 속에서 천년 세월을 자고 일어난 참나무나 향나무로 만드는 것이라 한다. 깊디 깊은 바다 내음이 천년의 세월을 흘러 내 앞에 와 머무는데 어찌 황홀타 말하지 않을까. 황병기 선생의 ‘침향무’를 듣다 보면 이렇듯 곰삭은 침향이 가야금 자락을 타고 굼신굼신 피어오르는 내음을 맡을 수 있다. 바람의 강약에 따라 느리게 재게 휘도는 춤사위가 눈앞에 선연히 펼쳐진다. 여인의 몸처럼 가녀리고 남정네의 의기처럼 강직하다.

불꽃이 수직의 운명을 타고났듯 향불도 상승과 하강의 이마주를 현현한다. 향은 스스로의 몸을 살라 푸른 연기를 증기시키고 사명을 다한 재는 땅으로 환속한다. 그것은 결연하게 뚝, 떨어진다. 그것의 조직이 강밀한 것일수록 흐트러지고 바스라지는 일 없이 나무의 모습 그대로 서 있다가 한순간 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미련이나 후회 따위는 없다. 향은 연기와 향내의 도약을 구현함으로써 제 소명을 다했다고 믿는다. 촛불의 순수한 빛을 구현하기 위해 불순물을 내재하고 있듯, 그것을 소멸시켜야하듯, 향내의 그윽함을 풍미하기 위해서는 몇 겁의 세월 속에서 농익은 삶의 질곡, 그것의 소멸이 뒤따라야 한다. 따라서 촛불이 몽상(바슐라르와는 관계없이 사전적 의미로 해석하자면)의 명백한 증거라면 향불은 명상의 명백한 증거이다. 향의 이마주는 범속한 살이에 대한 반성과 고요한 내면을 암시한다. 값싼 감동과 자지러질듯 숨찬 이별이 얼마나 무질서한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하여, 박라연은 고백한다.

잠시 잊은 것이다 / 生(생)에 대한 감동을 너무 헐값에 산 죄 / 너무 헐값에 팔아버린 죄, / 황홀한 순간은 언제나 마약이라는 거 / 잠시 잊은 것이다 / 저 깊고 깊은 바다 속에도 가을이 있어 / 가을 조기의 달디단 맛이 유별나듯 / 오래 견딘다는 것은 얼마나 달디단 맛인가 / 불면의 香(향)인가 / 잠시 잊을 뻔했다 / 白檀香(백단향)이, / 지상의 모든 이별이 그러하다는 것을 / 깊고 깊은 곳에 숨어 사는 / 沈香(침향)을, - 박라연, 沈香

『촛불의 미학』은 야금야금 읽어야 마땅하다. 또한 이것은 낮의 책이 아니라 밤의 책이다. 노인의 깊게 패인 골에 움틀거리는 검버섯의 손등과, 물거품같은 머리카락이며 수염이며, 자신에게 할당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한 노쇠한 미소를 떠올리는 일은 얼마나 쓸쓸한가. 깔끔하게 정돈된 그의 정신과 단정한 어조, 아득한 심연의 울림, 천진한 상상력의 틈새를 유영하는 일은 얼마나 애틋한가. 밤의 이윽한 순간에 나는 촛불의 시를 밝히고 책장을 넘긴다. 불꽃의 예민함 때문에 작은 방이 이지러지고 음영이 마찰하는 소리를 들으며 이 작은 책에 가득한, 시의 언어를 탐미한다.

- 램프에 의해 비춰진 책상 위에서 백지의 페이지의 고독이 펼쳐질 때, 고독도 한층 커진다. 백지의 페이지! 건너가야 할, 결코 건너 보지 못한 이 광대한 사막. 매일의 밤샘에서 하얀 그대로 머물러 있는 백지의 페이지는 끝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고독의 거대한 표시가 아닌가? 단지 배우기만을 바라거나 생각하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쓰기를 바라는」사람의 것일 때, 그 고독한 사람에게 달라붙는 것은 도대체 무슨 고독이겠는가. 그때 백지의 페이지는 하나의 허무, 고통스러운 허무, 기술의 허무이다. 그렇다. 아무튼 쓸 수 있기만 한다면!

에필로그는 램프의 기름이 다했음을 알리는 타종 소리다. ‘꿈꾸는 존재’이자 ‘일하는 존재’로서의 한 위대한 몽상가가 자신의 생을 숙려하며 잔잔히 써내려간 글 속에서, 나는 그의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실존이 안식을 찾아가는 길과 만난다. 하지만 완전한 안식이란 없는 것일까? 그가 생에 던지는 한점 미련으로 인해 촛불이 흔들리고 촛농이 울먹인다.

기실 이 책의 감상을 적는 일처럼 부질없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독서할 때마다 나는 개인적인 몽상의 일들, 추억의 일들을 만나고는 한다. 하나의 말, 하나의 몸짓이 나의 독서를 멈추게 한다.’ 바슐라르가 앙리 보스코의 『히아신스』를 읽으며 느끼던 감명이 고스란히 내 것이었거늘. 그의 농밀한 몽상에 ‘향’을 끌어들여 얄팍함으로 덧칠한 나의 가비야움이 살짝 부끄럽기까지 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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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4-06-10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년전인가,
코딱지만한 원룸에 항상 가득차있는 담배 냄새 때문에 진저리를 내다가,
향을 피워보자 하고 인사동 거리에서 누가 사주었는데,
그 향 내음이 담배 냄새보다 더 머리가 아파서 딱 한번 쓰고 말아버렸어요.
음 좋은 걸 다시 사면 달라질까요? ^^;;

마녀물고기 2004-06-10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수퍼에서 파는 오백 원짜리 향에도 좋아라 하는 축이기 때문에... 하지만 확실히 좋은 향의 운치는 남다르더군요. 체질적으로 향내를 못 참아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좋은 걸로 다시 시작해 보시라고... 했다가 눈흘김 당할 소지 다분하니 이만. 씨익-

hanicare 2004-06-10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슐라르 할아버지,수염이 만만치 않아요.한 가닥 한 가닥 향의 연기같은.
침향무도 비오는 날 자주 듣곤 했었지요.한때 스님생활이 우아해보여서 엄마한테 말했더니 엄마가 피식 비웃더군요.잠은 4시간도 못자고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얼마나 힘든데? 그 말씀에 게름뱅이에다 잠꾸러기인 나는 얼른 포기해버렸지요.향을 거느리고 비오는 날, 빗줄기를 주렴처럼 걸어놓고 황병기의 침향무를 틀어놓고 차나 한잔 하는 스님은 그냥 내가 꾸며낸 이미지였나 봅니다.아직도 가끔 매혹당하는.그리고 이렇게 좋은 글은 추천필수겠죠 ㅋㅋㅋ

마녀물고기 2004-06-10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에 법주사에서 일주일 살다 왔는데 정말 장난 아니더군요. 밤 잠 없는데 열 시(아홉 시였나)만 되면 소등하고, 아침 잠 많은데 새벽 네 시(세 시였나)에 일어나 아침 예불 드려야 하고.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법명까지 얻게 되었지만 산사에서의 생활이란 생각만 해도 아드윽해집니다. 우리, 포기 잘 한 거지요? 흐.. 앗, 그리고 추천! 너무 좋아요. 방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