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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지하로부터의 수기>

 

 

 

 

 

 

 

 

 

보통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주인공을, 또 그가 주변 인물들과 함께 만들어내는 사건을 추적한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이런 관성을 철저히 배반하는 소설이다. 특히 1지하는 마흔 살의 한 남자가 밑도 끝도 없이 늘어있는 말들의 향연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그는 한 시절 외톨이 관리였고 사벨을 절거덕거리는 한 장교 때문에 화를 내기도 했을 만큼 관직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그러던 중 한 친척으로부터 거액의 유산을 받게 되자 오롯이 지하에 틀어박혔다. 그 이후 그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화자의 물리적 정황이 최소화됐고 사회와의 접촉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소설적 사건도 있을 수 없다. 진눈깨비를 매개로 한 회상, 2진눈깨비에 관하여는 좀 수월한 편이다. 이른바 줄거리는 이 부분을 토대로 정리될 수 있겠다.

 

(중략)

 

2부만 놓고 보자면 소설적 인물로서 화자의 형상은 낭만적 주인공-영웅과, 다분히 고골풍, 즉 초기 도스토예프스키적인 희극적 얼뜨기 사이에서 진동한다. 우선, 가히 낭만주의가 창조한 주인공의 후예답게(바이런, 푸시킨, 레르몬토프 등 낭만주의자의 작품이 직접 언급되기도 한다) 그는 아름답고 숭고한 것에 목말라 한다. 이것이 곧 그의 이념이자 이상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화자는 비극적 갈등, 긴장 어린 결투, 거국적 화해, 매춘부와의 교감 및 구원 등 책을 통해 학습한 것을 현실에 그대로 이식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숭고한 몽상은 페테르부르크의 비루한 현실과 부딪치면서 기괴한 불협화음을 낸다. 그의 열변은 좌중의 무관심에 묻히거나 기껏해야 비웃음만 사고, 그가 내민 화해의 손짓은 때와 장소에 전혀 맞지 않는 광대놀음에 가까워진다. 대체로 지하에서는 낭만주의와 이상주의를 양식으로 한껏 고양되었던 화자였지만 지상에서는 볼품없는 외모와 사회적, 경제적 지위로 인한 콤플렉스, 괴상한 피해의식과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우스꽝스러운 낙오자로 전락한다.

 

 

 

 

 

 

 

 

이 희비극의 핵심은, 리자가 간파한바, ‘책을 따라한다’(책에 따라 말한다/산다)라는 것에 있다. 달리 말해, ‘살아 있는 삶’(지상)이념’(지하)의 대립 구도가 문제이다. 둘 사이의 충돌로 인해 철저히 망가진 젊은 날의 지하 인간(2)으로부터 모종의 진화 작용을 거쳐 마흔 살의 지하 인간(1)이 나온다. 이는 또한 1840년대 러시아를 풍미했던 이상주의와 낭만주의로부터 1860년대의 허무주의로의 이동이기도 하다. 어떻든 이제 그는 살아 있는 삶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채 오직 이념(관념), 만으로 존재한다. 그 자신의 정의에 따르면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아닌 종이 인간’, 자연의 품이 아니라 증류기에서 태어난 인간이다. 지하의 달콤한 몽상은 악몽으로 변하고, 그 악몽은 중년의 역설가’, 차라리 요설가의 말로 가득 차 있다. 1, 나아가 이 소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1864년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형과 발행한 잡지 <<세기>>에 발표되었을 때, 평단은 이 작품을 급진세력(‘60년대 세대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풍자이자 패러디로 받아들였다. 도스토예프스키 형제의 잡지는 보수를 표방했기도 했거니와, 체르니셰프스키의 장편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피력된 급진적 이데올로기, 즉 맹목적인 합리주의와 공리주의, 그에 기초한 낙관적이지만 동시에 기만적인 역사관이 여러 모로 도스토예프스키를 불편하게, 심지어 불안하게 했던 같다. 그는 체르니셰프스키가 사용한 몇몇 모티브를 그대로 가져와 직접적인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가령, 지하 인간의 입을 빌어, 1851년 영국 런던의 무역박람회에서 선보인 수정궁은 이성과 과학이 창조한 지상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산술적 계산에 종속시켜 인위적으로 축조한 개미집’, 가짜 유토피아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활동가라면 수학 공식(‘2x2=4’)과 자연 법칙(‘돌 벽’)에 무조건 복종하지만, 대체로 인간이란 ‘2x2=4’가 어찌할 수 없는 불변의 원칙을 알면서도 ‘2x2=5’에 탐닉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오로지 자신이 피아노 건반이나 오르간 스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성적으로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행동을 하고 또 그런 욕망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 공리주의자들이 말하는 이익이란 완전히 무의미하다. 왜냐면 인간은 실용적 관점에서는 무슨 이익은커녕 오히려 해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하고 파탄적인 쪽으로 치닫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급진파 이데올로기에 대한 중년 보수 작가의 비판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 그 목적이 우선적이었다면 분명히 보다 더 직설적이고 논리적인 화법을 택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이 작품의 문체는 작가가 의도했든, 아니면 그와 무관하게 말이 그 자체로 생명력을 얻은 것이든 어쨌거나 혼돈의 미학을 구현하는 것 같다. 지하 인간은 의식의 흐름이라는 모더니즘적 기법이 무색할 정도로 과잉된 의식과 조장된 분열을 뽐내며 일견 무의미하고 서로 모순되는 말을 마구 뒤엉킨 상태로 고스란히 기록해 나간다. 심지어 루소의 <고백>과 그에 대한 하이네의 평가를 예로 들어가며 그 기록의 목적을 또렷이 명시하기도 한다. 글쓰기를 통한 도덕적 징벌과 교화, 글쓰기가 갖는 미학적 효과, 끝으로, 무위와 권태를 달래는 수단으로서의 글쓰기 등.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독특한 쾌감이다. 그것은 정치 이데올로기나 철학 사상, 도덕적 교훈의 설파는 물론이거니와 촘촘히 짜인 이야기-서사의 축조조차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는, 전적으로 무목적적이고 무관심적인 쾌감, 오직 지하에서만 가능한 쾌감이다.

 

 

 

 

 

 

 

 

실제로 지하란 개연성과 인과성에 기초한 모든 논리와 맥락에 반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무중력의 시공간이다. 여기서 지하 인간은 사회와 개인, 전체성과 개별성, 몽상과 환멸, 꿈과 현실, 이성과 욕망, 합리와 부조리, 상식과 광기의 경계를 오가며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성의 요소를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본질적으로 무정형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욕망과 자유의지를, 나아가 자연 법칙에 대한 부조리한 반항(치통!)을 찬미한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어떤 이익도 주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억지로 지어낸 가짜일 수도 있지만, 세계로부터 나에게 폭력적으로 주어진 ‘2x2=4’와는 달리, 내가 의식하고 내가 창조한 세계이다. 그것이 또한, 우리 내부의 깃들어 있는 침침하고 눅눅한 지하이기도 하다. 지하 인간은 지하가 비참하다는 것을 또렷이 의식할수록 더더욱 지하에 침몰한다. 지하는 책에 따라 말하는(사는) 과 마찬가지로 그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그러고 싶지도 않은 그의 실존이기 때문이다(“지하 만세!”).

 

하지만 <지하로부터의 수기>에는 지하 찬미와 더불어, 병적으로 비대해진 자의식의 전횡, ‘그들(모두) () (홀로)’라는 공격적이고 자폐적인 대립구도, 세계를 향한 허무주의적 냉소 등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물음이 동시에 들어 있다. , 작품 바깥에서 작가는 주석을 통해 이런 인물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다분히 부정적인 현상임을 암시한다. 실상 건전한 상식과 윤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실존의 한 양상으로서의 지하 인간의 반항과 부정(否定)은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낙관적 전망도 담보하지 못하며, 이런 병적인 실존을 작가는 절대 옹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편의 소설로서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이 괴상한 주인공은 어쩌면 작가가 의도했을 법한 여러 가능성을 넘어선다.

 

지하 인간은 끊임없이 이성에 반기를 들지만 정작 그가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이성이 만들어낸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집요한 욕망과 의지, 이른바 이성의 광기’(쿤데라)이다. 이후,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은 모두 내부에 지하를 담은 채 지상으로 올라간다. 그들은 자기만의 이념에 사로잡혀 노파를 죽이고 또 자기 자신을 죽이며, 현실 속에서 정치 혁명을 꿈꾸는가 하면 몽상 속에서 천년왕국의 도래를 꿈꾸며, 나아가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를 죽이면서까지 돌 벽에 저항한다. 말하자면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지하-지상의 내적 메커니즘을 최초로, 더욱이 응축적인 형태로 보여준 기념비적인 작품인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이 그 자체로 갖는 놀라운 매력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지하 인간은 나는 실상 여러분이 감히 절반도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을 내 삶에서 극단까지 밀고 나갔을 뿐이라고 말한다. 8년의 공백기를 거친 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동안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혹은 시도는 했으나 분별의 논리에 복종하느라 끝까지 관철하지 못한 새로운 형식의 소설을 선보인다. 미학적, 시학적 실험은 그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을 수 있지만 그의 소설가적 직관과 본능은 기존의 소설 문법과 세계 인식의 틀을 배반하면서 소설 장르의 극단으로 치닫는다. 이 작품이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표 장편보다 훨씬 더 난해하고 모던한 것, 나아가 가장 문제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게다가 이 는 주인공-영웅이 되기는커녕 ()주인공’, 심지어 ()주인공, 그야말로 무위도식하는 백수에 불과하지만 오직 쓰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내 안에 담은 주인공으로 등극한다. 바로 이것이 발자크적 리얼리즘에 지배되던 19세기 소설 문법을 비켜나가 <지하로부터의 수기>만이 보여준, 심지어 발견한 우리 의식과 실존의 새로운 지평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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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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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손에 들었다. 시집처럼 얄따란 두께가 만만해 보였을 것이고 특이한 문체에 끌렸을 것이다. 어쨌거나, ‘실험이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그것에 목매던 시절, 나의 첫 소설 습작은 이 작품의 패러디였다. 나는 대학 노트에 연필로 나만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써나갔다.

나는 아픈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는 위장이 아픈 것 같다. 연일 속이 더부룩하고 신물이 올라오고 트림이 난다. 하지만 절대 병원에는 가지 않겠다! 과외비를 받아도 병원만은 가지 않겠다! 의사 따위는, 내시경 따위는 엿 먹으라지! 삼십만 원으로 매일 밤 라면을 끓여먹고 위장을 더 망칠 테다!”

말들은 끝 간 데 없이 계속 이어졌다. 탈고를 한 뒤에는 어느덧 유명인사가 된 모 선배에게 일독을 부탁하는 호기까지 부려보았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렀다. 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렇기에 더 소중한 첫 소설을 되살려내듯,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한 자 한 자 우리말로 옮겼다. 번역의 시간은 곧, 이 소설을 향한 나의 살가운 감정을 어루만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하 인간 못지않게 지하에 탐닉했던, 문자 그대로 대학가의 반지하방에 틀어박혀 오직 문학을 향한 꿈만을 먹고 살았던, 정녕 그것이 가능했던 내 청춘의 진눈깨비를 기록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청춘의 찬치는 진즉에 끝났고 살아 있는 삶이념의 변증법도 이미 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수기-기록은 이렇게 남아 있다. 지하 인간은 그것을 발표하지도 않을 것이고 독자 따위는 필요도 없다며 악다구니를 썼지만, 책의 모양새를 갖춘 이상 그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이 책의 역자이자 이 번역본의 첫 번째 독자인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권한다.

, 페테르부르크의 음습한 지하, 그 지하의 몽상에, 그 달콤한 악몽에 한 번 빠져보시길!

 

 

-- <지하로부터의 수기>(민음사: 역자 해설) 

 

-- 최근 세계문학전집(물론 이 말 자체가 역설이지만!)이 많이 나오고 덩달이 이 작품도 많이 번역됐는데요, 여전히 마뜩치 않은 것은 제목입니다...ㅠ.ㅠ 숙고 끝에 저렇게 뽑았지만 <지하의 수기>, 뭐 이래도 좋았을 것 같고, 여전히 아쉬움은 남습니다. 무엇보다도, '지하생활자'라는 말이 너무 익숙하여(또 문예출판사판을 무척 좋아했던 까닭에) 저부터 잘 고쳐지지 않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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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6 2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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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과 초월의 철학

-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서 출발하여, 채찍질당하는 말을 껴안고 우는 니체를 애도하며 끝나는 철학 소설. 성과 사랑, 정치와 역사에 관한 소설이자 그런 모든 소설에 관한 소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바치는 체코 작가의 오마주.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우스꽝스러운 시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9)

 

쿤데라의 해석은 이렇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einmal ist keinmal) 영원성이 무거움이라면 이 일회성은 가벼움이다. 그러나 이 대립이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가치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 한다!”(Es muss sein!), 즉 필연과 우연도 마찬가지이다. 특정한 시점에서 특정한 사건과 직면하여 과연 그래야 하는가, 하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사건은 전부 단 한 번뿐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한 개인의 삶과 한 국가, 나아가 세계의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아들까지 내팽개친 이혼남 토마시는 꾸준히 여자 사냥에 몰입한다. 그것은 관능의 욕망이 아니라 세계 정복의 욕망’, 지상에 머무는 육체를 메스로 개봉하고자 하는욕망의 산물이다. 이런 토마시 앞에 강에 버려진 아이처럼 테레자가 나타난다. 그의 침대는 졸지에 아이가 정착한 강변으로 바뀐다. 그리고 섹스는 하되 동침은 하지 않는다는 그의 원칙, “에로틱한 우정의 불문율이 와해된다. 이제 술을 마시지 않으면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갖기도 힘들다. 테레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깃털처럼 가볍고 자유롭던 돈 후안 속에 숨어 있던, ‘동정연민으로 고통 받는 트리스탄이 나타난다. 가벼움이 무거워지는 순간이다.

 

 

그녀는 늙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그녀만이 중요했다. 여섯 우연의 소산인 그녀, 외과 과장의 좌골신경통에서 태어난 꽃 한 송이, “es muss sein!”의 피안(彼岸)에 있던 그녀, 유일하게 그가 진정으로 애착을 갖는 그녀.(338)

 

토마시의 삶(개인사)은 그의 조국의 삶(역사)과 평행선을 이룬다. 체코 공산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통감하고 말하자면 오이디푸스 왕처럼 제 눈을 찌를 것을 촉구한 기사가 직접적인 문제가 된다. ‘철회의 요구와 타인들의 웃음앞에서 그는 추락의 길을 선택한다. 프라하의 유능한 외과의사에서 도시 외곽 병원의 허름한 의사로, 유리창을 닦는 노동자로, 급기야 시골의 트럭운전수로. 한데 문제의 기사의 화두를 제공한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테레자가 환기시킨 버려진 아기의 신화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역사는 다시 개인사로 회귀한다. 쿤데라가 선보인 독특한 시간 사용법과 시점을 빌려 테레자의 경우를 보자.

 

그녀에게 토마시의 존재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다름 아닌 그가 내가 일하는 곳에 왔고 다름 아닌 내가 담당하는 테이블에 앉고 다른 것도 아닌 책을 갖고 있고(상승 욕구를 가진 그녀는 책을 숭배한다). 테레자는 그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다. 프라하에 나타난 그녀의 손에 들린 책 <안나 카레니나>는 이 점에서 대단히 상징적이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 만난 날, 그 기차역에서 한 남자가 기차에 치여 죽는다. 소설의 마지막, 안나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지나치게 소설적인이 구성이 실은 우리의 삶의 실제 모습이라고 테레자는 생각한다. 삶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필연의 법칙을 따른다(Es muss sein!). , 무겁다. 이런 그녀에겐 가벼움이 오히려 고통이다. 그녀가 육체(섹스)와 영혼(사랑)을 별개로 생각하는, 그러고자 하는 토마시를 참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토마시와 테레자는 15여년의 세월을 함께 한다. 보헤미아에서 처음 만난 그들은 함께 프라하의 봄을 맞았으며 소련의 체코 침공 때 함께 스위스로 떠났고 다시 체코로 돌아온 뒤에는 역시나 함께 매장의 시기를 보냈다. 단 한 번뿐인 삶이 종결되는 순간도 공유한다. 그 직전, 그들의 사랑과 삶은 무거움을 한아름 껴안은 가벼움에 다다른다.

 

토마시, 당신 인생에서 내가 모든 악의 원인이야.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나 때문이야.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당신을 끌어내린 것이 바로 나야.”(중략)

테레자,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은 모르겠어?”

당신의 임무는 수술하는 거야!”

임무라니, 테레자,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483)

 

이어 테레자의 감정에 대해 작가는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라고 쓴다. 실은 카레닌의 미소라는 제목이 붙은 마지막 장 자체가 그러하다. 주인공들의 죽음에 대해 미리 알고 난 다음 그들의 슬픈 행복을 읽는 기분이 묘하다. 단 하나뿐인 삶, 단 하나 뿐인 나, 단 하나뿐인 너, 단 하나뿐인 카레닌. 어찌해도 이것은 가벼움이 아니라 무거움이다. 이 비극과 마주한 우리에겐 유아적인 자기 연민을 넘어선 뭔가가 필요하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모순이 얘기하는 것은 결국, 긍정과 초월의 철학이다.

 

-- 네이버 캐스트

 

-- 무척 좋아하는 소설가 중  한 명입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으며 희한하게(?) 바뀐 이름들(토마스 - 토마시, 테레사 - 테레자 등)에 좀 놀랐으나, 대단한 수작이었다는 옛 기억이 새롭게 환기되더라고요. 소설 속에 숨어 있는 <안나 카레니나>, 니체의 영원회귀 등도 예전보다 더 잘 보이고, <프라하의 봄>에서 열연한 (이제는 늙어버린 ㅠ.ㅠ)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줄리에트 비노쉬도 떠오르고... 어떻든 쿤데라의 다른 소설들도 다시 읽을 기회가 생기면 좋겠습니다 ^^;  마침 전집도 나오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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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셰익스피어, <맥베스>

 

 

 

 

 

 

고운 것은 더럽고 더러운 것은 고웁다. / 탁한 대기, 안개 뚫고 날아가자.(1, 14)

 

<맥베스>11, 세 마녀들이 퇴장하며 내뱉는 말이다. 첫 문장은 일차적으론 날씨의 맑음과 흐림을 가리킨다. 하지만 보다 넓은 맥락에서는 이 작품 속의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담고 있다. , 아름다움과 추악함, 깨끗함과 더러움, 선함과 악함, 강함과 약함 등 우리가 모순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온갖 가치의 충돌의 장이 곧 세계이며 인간의 내면이다.

실제로 <맥베스>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절대 악이나 절대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덩컨은 자타가 공인하는 선왕이지만 그 자신의 고백대로 사람의 얼굴에서 마음씨를 알아내는 기술은 없, 어리석은 인물이다. 맥더프는 훌륭한 장군이지만 무책임하게 가족을 버림으로써 죽음으로 내몬다. 뱅코 역시 의로운 인물이지만 은연중에 맥베스의 행운을 질투하며 어두운 욕망을 키운다. 말하자면 다들 적절히 이중적이다. <맥베스>의 상황 역시 인간의 이런 본성이 극도로 발현될 수 있도록 설정돼 있다. 중세 스코틀랜드의 왕권다툼, 간단히, 정치 말이다. 물론, 이것이 맥베스의 거듭된 악행을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이 인물이 극악한 죄인이면서 동시에 고귀한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맥베스는 그 자체가 모순의 극단이다. 덩컨 왕의 충신이자 명장으로서 반역자를 성공리에 진압했던 그가 도리어 갑자기 반역자로 바뀐다. 여기에 구태여 무슨 이유가 있을까. 마녀들의 선동도 직접적인 자극에 가깝지, 근본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코더의 영주가 된 그가 국왕의 자리를 노리는 것도 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욕망이란, 특히 검고 깊은 욕망이란 그 속성상 모순덩어리에 염치없는 대식가이기 때문이다.

 

“(방백) 컴벌랜드 왕자라! - 내 길을 막았으니 / 이건 내가 걸려 넘어지든지 아니면 / 넘어야 할 계단이다. 별들이여 숨어라! / 빛이여, 검고 깊은 내 욕망을 보지 마라. / 눈은 손을 못 본 척하지만 끝났을 때 / 눈이 보기 두려워할 그 일은 일어나라.”(1, 29-30)

 

하지만 욕망이 넘어야 할 현실의 벽은 두껍다. 맥베스에게 그 벽이란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별들”, 즉 도덕률이다. 맥베스 부인이 그에게 살인을 부추길 때 사용하는 무기도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우유부단함을 질책하며 남성의 최고 가치인 용기를 들먹인다. “욕망은 있으되 행동력과 용맹심이 없는 자는 비겁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윽박지른다. 결국 맥베스로 하여금 처음 칼을 들게 만드는 것은 왕위 찬탈의 야망이라기보다는 비겁자가 되고 싶지 않은 자존감이다. 이로써 아비와 다름없는 왕을 죽이는, 이 크나큰 죄악이 용기라는 최고의 덕목에 의해 장려되는, 적어도 양해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3막에 이르면 맥베스는 이른바 피의 권좌에 앉아, 피는 피를 부른다는 공식을 그대로 실천한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맥베스가 악행을 저지르는 장면을 무대 위에서 직접 보여주지는 않는다. 관객이 보는 맥베스는 잔혹한 살인마가 아니라 타인의 피로 인해, 동시에 제멋대로 뻗어가는 욕망으로 인해 고통 받는 숭고한 인물이다. 그의 고뇌는 실상, 단순한 도덕과 윤리 이상의 것을 말해준다. , 죄의식은 절대 죄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느낄 수 있는 마음의 크기에, 윤리 의식의 크기에 비례한다. “아멘을 외치고 싶은 마음과 피 묻은 손을 씻고 싶은 마음이 역설적으로 죄를 만드는 셈이다. 여기서 이미 실현된 욕망()과 새로 생성된 욕망(속죄) 간의 긴장이 발생한다. 최후의 심판은 맥베스의 내부에 자리 잡은 법정, 말하자면 내 안의 법정에서 행해진다. 죄의 주체가 벌의 주체이자 객체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하다. 맥베스가 정녕 비극의 주인공이자 명실상부한 영웅일 수 있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스스로 운명에 도전장을 던진 만큼, 몰락을 코앞에 두고 자살을 하는 것도 비겁한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왜 얼간이 로마인 행세를 하면서 / 내 칼로 죽어야 해? 산 놈들이 보이는 한 / 멋지게 베어주자.”(5, 129)

 

이렇게 맥베스는 불면과 환영의 고통을 고스란히 껴안은 채 끝까지 자기 자신과 맞선다.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맥더프의 칼이었으나, 이러한 최후야말로 맥베스 스스로 선택한 자기 응징의 방식이었으리라.

 

그렇다면 그의 죄는 대체 무엇인가? 어두운 욕망에 생명을 불어넣으려 한 무모함? 마녀들의 예언을, 즉 자기 안의 속삭임을 맹목적으로 믿은 어리석음? 실현된 욕망을 견뎌내지 못한 나약함? 혹은 세속 권력의 쟁취에 덧붙여 도덕적인 완성까지 거머쥐려 했던 탐욕스러움? 아마 전부 다일 것이다. 다만, 그것은 각각 정반대되는 긍정적인 가치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실로 아름다운 것은 추악하고 깨끗한 것은 더럽다. 물론, 그 역도 참이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모순이 곧 인간의 본질이며 그 흐름이 곧 인생이다. 말하자면, 드넓은 연극 무대에서 한껏 설치다가 덧없이 꺼져가는 촛불!

 

꺼져라, 짧은 촛불! / 인생이란 그림자가 걷는 것. 배우처럼 /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 사라져버리는 것, 백치가 지껄이는 / 이야기와 같은 건데 소음, 광기 가득하나 / 의미는 전혀 없다.”(5, 124)

 

 

--  네이버 캐스트

 

 

-- 인용되는 문장의 원문은"Fair is foul, and foul is fair."입니다. 일차적으론 날씨를 설명하는 어구일 수도 있겠습니다. (cf. 김정환 번역) 흠, 원서를 찾아보고서 beautiful, dirty 뭐, 이런 단어가 아니라서 좀 놀랐더랬지요 -_-;;

--  구로사와 아키라가 만든, 토시로 미후네 주연의 <거미집의 성>(1957: 蜘蛛巣城 The Throne of Blood)은 <맥베스>를 번안한 것인데, 과장 좀 보태면(^^;) 원작 보다 더 뛰어납니다. (BBC에서 만든 <셰익스피어 리톨드> 시리즈 중 <맥베스>도 볼 만하고요.) 대체로 구로사와 아키라는 세계문학의 걸작을 영화하는 데 천부적 재능을 지녔는데, 언제 또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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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관념론자의 고백:

말과 사물 사이의 심연을 뛰어넘다

- 사르트르, <말>

 

 

 

 

 

사르트르는 <구토>의 작가로 유명하지만, 실상 세기의 지성이라는 수식어가 조금도 아깝지 않은, 철학과 문학의 육화 그 자체였다. 그런 그가 고맙게도 자서전을 한 권 써주었다. 경쾌하고 까불까불하는 문체 덕분에 사르트르라는 이름이 주는 위화감도 잠시나마 불식되는 것 같다.

 

 

 

 

 

 

 

 

 

 

 

 

 

 

 

여느 자서전처럼 <말>은 유년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외조부 집에서 기식한 만큼 할아버지 놀이를 즐겼던 외조부, 누이와 같았던 젊은 엄마에 관한 얘기가 많다. “나와 인사를 나누는 기쁨마저 베풀지 않고 살그머니 달아나 버린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제법 양가적이고 때론 무척 냉소적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삶을 두어 줄로 요약하는 그의 문장은 담백하면서도 눅눅하다. “그 역시 사랑했고 살려고 애썼고 그러다가 죽음을 체험한 사람이다. 그만하면 한 인간의 역사는 충분히 이루어진 셈이다.” 어떻든 이 책 속의 모든 얘기가 결국 하나의 주제로 귀결된다. 바로,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이다. 이 점이 기존의 자서전과 <말>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말>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고 각각 읽기쓰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다소 도식화하면 전자는 공부의 과정을, 후자는 습작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외할아버지의 총아, 착한 아이신동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던 어린 사르트르는 엉터리 꼬마 작가로 거듭난다. 이 과정의 핵심은 무엇인가. 달리 말해, ‘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축자적으로 접근해보자.

보통의 경우 아이는 현실 속의 사물을 먼저 인지하고 그 다음에 말을 배운다. , 내 눈앞의 구체적인 꽃 한 송이, 꽃이라는 말, 책 속의 그림-글자 꽃, 하나의 원형으로서의 꽃, 이런 식의 이월 내지는 확장을 경험한다. 명징한 구체의 세계(사물)와 모호한 추상의 세계() 사이에 놓인 간극을 좁혀가며 후자에 가까이 가는 과정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말을 배운 방식은 정반대이다.

 

나는 그 속에서(<라루스 대백과사전>) 진짜 새집을 털고 진짜 꽃 위에 앉은 진짜 나비를 잡았다. 사람과 짐이 모두 진짜로거기 있었다. 삽화는 그들의 몸이고 글은 그들의 영혼이며 독특한 본질이었다. 밖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짐승은 그 원형(原型)과 다소간 닮은 점은 있지만 원형의 완전성에는 못 미치는 흐리멍덩한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 동물원의 원숭이는 진짜 원숭이답지 않고 뤽상부르 공원의 사람들은 진짜 사람답지 않았다. 정신 상태로 보아 플라톤주의자가 된 나는 지식에서 출발해서 사물로 향했다. 나로서는 사물보다도 관념이 한결 현실적이었다. 왜냐면 내게는 관념이 먼저 주어졌고, 더구나 사물로서 주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세계를 만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56)

 

그에게는 실제의 꽃 이전에 원형-관념으로서의 꽃이 먼저 있었다. 마찬가지로 책 속의 원숭이와 사람이 진짜였고, 현실 속의 그것은 플라톤의 동굴 속 수인의 눈에 비친 그림자처럼 가짜에, 어설픈 모조품에 불과했다. 말의 현실과 실제 현실 사이의 결렬, 이것이 곧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세상을 배운 사르트르의 관념론의 기원이다. “그것을 청산하는 데 30년이 걸렸다라고 그는 고백한다. 이 관념론에 침윤된 채, 어쩌면 그것과 사투를 벌이며 쓴 작품이 <구토>일 터이다.

 

나는 서른 살 때 멋진 솜씨를 발휘했다. <구토>를 쓴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확언하지만 아주 진지하게, 내 동족들의 정당화될 수 없는 씁쓸한 존재를 묘사하고, 나 자신의 존재는 시비의 대상에서 제외해 버렸다. 나는 로캉탱이었다. 나는 로캉탱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내 삶의 곡절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이었다.(267-268)

 

우리는 로캉탱이 아무 이유 없이 수시로 경험하던 구토를 기억한다. 가령 바닷가에서 아이들을 따라 물수제비를 뜨기 위해 조약돌을 집어 들 때 그는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참을 수 없어한다. 그의 구토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은 것은 우리 대부분이 사물의 세계에서 말의 세계로 옮겨가며 성장한 탓이다. 반면, 일찌감치 플라톤주의자였다면 상황이 전혀 다르다. 말이 구축한 이상(理想), 그 합리와 논리에 맞서 사물은 무질서와 부조리를 부르짖는다. 사물과 말은 두 평행선처럼 아슬아슬한 접근만을 반복할 뿐, 절대 완벽하게 만나지 못한다. 그 결렬을 목도하는 순간, 구토는 불가피하다. , 그럼 어찌할 것인가.

<말>을 쓸 무렵 사르트르는 환갑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안짱다리에 짜리몽땅하고 사팔눈에 퍽이나 못 생겼던 남자. 이 희대의 추남은 말과 사물 사이의 심연을, 그리고 그로 인한 구토를 처음 발견했을 뿐더러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까지 가르쳐주었다.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이보다 더 숭고한 실존이 있을 수 있을까.

 

한 줄이라도 쓰지 않은 날은 없도다.”

이것이 내 습성이요 또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 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쓸 필요가 있다. 그래도 무슨 소용이 될 터이니까 말이다. 교양은 아무것도, 또 그 누구도 구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다.(270)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사르트르 사진입니다. 유명한 사진이지요? 사르트르는 얼굴 자체가 철학인 것 같습니다(나는 -- 철학이다!) ^^; 

 

 

- 네이버 캐스트  

 

 

* 개인적으로 <구토>에 원한(!)이 있습니다. 너무 어려웠던 기억 때문이지요. <말>의 유려한 번역에 탄복했는데, <구토>도 좋은 번역으로 새로 출간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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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당혹, 혹은 일상으로부터의 도피

- 카프카(1883-1924), 변신(1915)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9) 당장 출근을 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문밖에서는 가족들이 난리법석이다. 결국 잠자의 염려대로 지배인이 찾아온다. ‘변신이라는 환상적인 사건이 소설의 첫 문장에서 완료되자, 보다시피, 이후의 시간은 잠자-벌레의 일상으로 채워진다. 수시로 끼니를 거르고 진득이 사람을 사귈 겨를도 없이 연일 기차를 타고 출장을 다니는 영업사원의 삶 대신 방바닥과 천장과 벽과 가구 사이를 기어 다니는 갑충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껏 잠자에게 의지해 살아왔던 가족도 이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한다. 텅 빈 줄 알았던 금고가 열리고 늙은 퇴물로 전락했던 아버지가 푸른 제복 차림의 늠름한 일꾼으로 변해 있다. 어머니와 여동생도 일자리를 구한다. 빈 방은 하숙인들이 차지하고 반쯤 자발적으로 해고된 젊은 하녀 대신 뼈대가 굵고 몸집이 큰 늙은 할멈이 가사 일을 돕는다.

 

 

 

 

 

 

 

 

 

 

 

 

 

 

 

 

 

 

이토록 촘촘하게 짜인 일상의 시간표 속에서 잠자-벌레는 보살핌은커녕 뒤치다꺼리를 요하는 존재일 뿐이다. 등짝의 살 속에 깊숙이 박혀 썩어가는 한 알의 사과는 그 상징처럼 읽힌다. 그렇기에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에 이끌려 거실로 기어 나온 그의 절규가 더 절박하게 들린다. “음악이 그를 이토록 사로잡는데 그가 한 마리 동물이란 말인가?”(66) 하지만 동물의 몸을 하고 동물의 소리를 내는 것이 동물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이 말똥구리가 아직도 인간일 수 있다면 그건 그가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일 테지만 그래본들 파출부 할멈의 눈에는 옆방의 저 물건”(77)일 뿐이다.

 

사건이 종료됐을 때 잠자 가족은 간만에 교외로 나가는 전차를 탄다. 따뜻한 3월이다. 앞으로의 생활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중 잠자 부부는 어린 딸이 어느덧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했음을 인지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목적지에 이르러 딸이 제일 먼저 일어서며 그녀의 젊은 몸을 쭉 뻗었을 때 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새로운 꿈과 좋은 계획의 확증처럼 비쳤다.”(78) 이렇게 변신은 끝난다. 과연 이 소설은 인간을 거대한 전체의 한 부분, 심지어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산업사회와 관료사회에 대한 풍자일 뿐인가.

 

 

 

 

 

 

 

 

 

 

루이스 스카파티가 그린 변신의 삽화에서 잠자-벌레는 카프카의 얼굴을 하고 있다. 실제로 이 소설에는 작가의 전기가 많이 투영돼 있다. 카프카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났으되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었다. 이방인의 운명을 타고 난 셈이다. 그러나 세 개의 문화가 서로 만날듯하다가 결렬되는 지점에서 곧 그의 문학이 생성된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와의 관계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벌레로 변신한 아들을 향해 분노에 차 사과 폭탄 세례를 퍼붓는 잠자의 아버지를 보라. 실제 카프카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장남의 의무를 강요했으나(적어도 카프카 스스로 그런 강압을 느꼈으나) 정작 카프카는 모계의 혈통을 이어받아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에 키는 컸으되 허약한 체질이었다. 이런 자신을 그는 아버지의 건장한 몸 앞에서 곧잘 주눅이 드는 상속권을 박탈당한 자식”(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으로 정의했다.

 

한편 법학 박사 학위가 있었던 카프카는 근무 시간이 비교적 적다는(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이유로 <노동자 산재 보험국>에 들어갔다. 그러고도 수시로 업무 때문에 글을 쓸 시간이 없다고 투덜댔으며 동시에 글을 쓰다가 다음 날 지각이나 결근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법과 문학, 법률가와 문학가 등 두 영역은 꽤나 생산적인 공생관계를 유지했다. 적어도 법률과 업무의 굴레, 그것으로부터의 도피 욕망이 카프카의 문학에 독특한 색깔을 부여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영원한 이방인을 자처하며 문학의 언저리를 맴돌며 끊임없이 문학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것!

 

다시 변신으로 돌아가자. 무엇이 평범한 영업사원을 벌레로 바꿔놓았을까? 더 정확히, 그가 벌레가 되면서까지 벗어던지고 싶었던 굴레는 무엇일까? 아마 잠자가 자신의 변신을 깨닫기 전에 꾸었던 불안한 꿈”, 즉 소설의 바깥에 버티고 있는 현실과 일상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사람이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해도, 그것은 그저 일상의 당혹일 뿐,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잠자 스스로 짊어진 장남과 가장의 의무가 우스꽝스러운 자기 환상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이렇듯 변신은 장밋빛 진보를 약속한 근대의 몽상에, 안일한 인간관과 세계관에 물음표를 찍고 진화 대신 퇴화(인간에서 동물, 심지어 벌레로!), 상승 대신 전락, 성공 대신 실패, 축조 대신 해체에 대해 얘기한다. 죽음의 순간에 삶이 조망되듯 인간이 인간이길 멈출 때 비로소 그 본질이 밝혀진다. 변신을 덮는 순간 우리가 저 치명적인 변신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 간행물윤리위원회 <&>(20122월호)

 

 

** 너무 잘 쓴 소설이라서 어떤 말을 덧붙여도 다 초라하게, 부실하게 들리지만 그럼에도 계속 쓰도록 만드는 소설, [변신]!   

 

** <안개 속의 고슴도치> 연재와 나란히, 책으로 출간하기에 앞서, 현재 연재 중이거나 연재가 끝난 세계 문학 관련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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