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당혹, 혹은 일상으로부터의 도피

- 카프카(1883-1924), 변신(1915)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9) 당장 출근을 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문밖에서는 가족들이 난리법석이다. 결국 잠자의 염려대로 지배인이 찾아온다. ‘변신이라는 환상적인 사건이 소설의 첫 문장에서 완료되자, 보다시피, 이후의 시간은 잠자-벌레의 일상으로 채워진다. 수시로 끼니를 거르고 진득이 사람을 사귈 겨를도 없이 연일 기차를 타고 출장을 다니는 영업사원의 삶 대신 방바닥과 천장과 벽과 가구 사이를 기어 다니는 갑충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껏 잠자에게 의지해 살아왔던 가족도 이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한다. 텅 빈 줄 알았던 금고가 열리고 늙은 퇴물로 전락했던 아버지가 푸른 제복 차림의 늠름한 일꾼으로 변해 있다. 어머니와 여동생도 일자리를 구한다. 빈 방은 하숙인들이 차지하고 반쯤 자발적으로 해고된 젊은 하녀 대신 뼈대가 굵고 몸집이 큰 늙은 할멈이 가사 일을 돕는다.

 

 

 

 

 

 

 

 

 

 

 

 

 

 

 

 

 

 

이토록 촘촘하게 짜인 일상의 시간표 속에서 잠자-벌레는 보살핌은커녕 뒤치다꺼리를 요하는 존재일 뿐이다. 등짝의 살 속에 깊숙이 박혀 썩어가는 한 알의 사과는 그 상징처럼 읽힌다. 그렇기에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에 이끌려 거실로 기어 나온 그의 절규가 더 절박하게 들린다. “음악이 그를 이토록 사로잡는데 그가 한 마리 동물이란 말인가?”(66) 하지만 동물의 몸을 하고 동물의 소리를 내는 것이 동물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이 말똥구리가 아직도 인간일 수 있다면 그건 그가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일 테지만 그래본들 파출부 할멈의 눈에는 옆방의 저 물건”(77)일 뿐이다.

 

사건이 종료됐을 때 잠자 가족은 간만에 교외로 나가는 전차를 탄다. 따뜻한 3월이다. 앞으로의 생활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중 잠자 부부는 어린 딸이 어느덧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했음을 인지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목적지에 이르러 딸이 제일 먼저 일어서며 그녀의 젊은 몸을 쭉 뻗었을 때 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새로운 꿈과 좋은 계획의 확증처럼 비쳤다.”(78) 이렇게 변신은 끝난다. 과연 이 소설은 인간을 거대한 전체의 한 부분, 심지어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산업사회와 관료사회에 대한 풍자일 뿐인가.

 

 

 

 

 

 

 

 

 

 

루이스 스카파티가 그린 변신의 삽화에서 잠자-벌레는 카프카의 얼굴을 하고 있다. 실제로 이 소설에는 작가의 전기가 많이 투영돼 있다. 카프카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났으되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었다. 이방인의 운명을 타고 난 셈이다. 그러나 세 개의 문화가 서로 만날듯하다가 결렬되는 지점에서 곧 그의 문학이 생성된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와의 관계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벌레로 변신한 아들을 향해 분노에 차 사과 폭탄 세례를 퍼붓는 잠자의 아버지를 보라. 실제 카프카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장남의 의무를 강요했으나(적어도 카프카 스스로 그런 강압을 느꼈으나) 정작 카프카는 모계의 혈통을 이어받아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에 키는 컸으되 허약한 체질이었다. 이런 자신을 그는 아버지의 건장한 몸 앞에서 곧잘 주눅이 드는 상속권을 박탈당한 자식”(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으로 정의했다.

 

한편 법학 박사 학위가 있었던 카프카는 근무 시간이 비교적 적다는(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이유로 <노동자 산재 보험국>에 들어갔다. 그러고도 수시로 업무 때문에 글을 쓸 시간이 없다고 투덜댔으며 동시에 글을 쓰다가 다음 날 지각이나 결근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법과 문학, 법률가와 문학가 등 두 영역은 꽤나 생산적인 공생관계를 유지했다. 적어도 법률과 업무의 굴레, 그것으로부터의 도피 욕망이 카프카의 문학에 독특한 색깔을 부여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영원한 이방인을 자처하며 문학의 언저리를 맴돌며 끊임없이 문학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것!

 

다시 변신으로 돌아가자. 무엇이 평범한 영업사원을 벌레로 바꿔놓았을까? 더 정확히, 그가 벌레가 되면서까지 벗어던지고 싶었던 굴레는 무엇일까? 아마 잠자가 자신의 변신을 깨닫기 전에 꾸었던 불안한 꿈”, 즉 소설의 바깥에 버티고 있는 현실과 일상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사람이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해도, 그것은 그저 일상의 당혹일 뿐,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잠자 스스로 짊어진 장남과 가장의 의무가 우스꽝스러운 자기 환상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이렇듯 변신은 장밋빛 진보를 약속한 근대의 몽상에, 안일한 인간관과 세계관에 물음표를 찍고 진화 대신 퇴화(인간에서 동물, 심지어 벌레로!), 상승 대신 전락, 성공 대신 실패, 축조 대신 해체에 대해 얘기한다. 죽음의 순간에 삶이 조망되듯 인간이 인간이길 멈출 때 비로소 그 본질이 밝혀진다. 변신을 덮는 순간 우리가 저 치명적인 변신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 간행물윤리위원회 <&>(20122월호)

 

 

** 너무 잘 쓴 소설이라서 어떤 말을 덧붙여도 다 초라하게, 부실하게 들리지만 그럼에도 계속 쓰도록 만드는 소설, [변신]!   

 

** <안개 속의 고슴도치> 연재와 나란히, 책으로 출간하기에 앞서, 현재 연재 중이거나 연재가 끝난 세계 문학 관련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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