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과 초월의 철학

-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서 출발하여, 채찍질당하는 말을 껴안고 우는 니체를 애도하며 끝나는 철학 소설. 성과 사랑, 정치와 역사에 관한 소설이자 그런 모든 소설에 관한 소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바치는 체코 작가의 오마주.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우스꽝스러운 시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9)

 

쿤데라의 해석은 이렇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einmal ist keinmal) 영원성이 무거움이라면 이 일회성은 가벼움이다. 그러나 이 대립이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가치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 한다!”(Es muss sein!), 즉 필연과 우연도 마찬가지이다. 특정한 시점에서 특정한 사건과 직면하여 과연 그래야 하는가, 하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사건은 전부 단 한 번뿐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한 개인의 삶과 한 국가, 나아가 세계의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아들까지 내팽개친 이혼남 토마시는 꾸준히 여자 사냥에 몰입한다. 그것은 관능의 욕망이 아니라 세계 정복의 욕망’, 지상에 머무는 육체를 메스로 개봉하고자 하는욕망의 산물이다. 이런 토마시 앞에 강에 버려진 아이처럼 테레자가 나타난다. 그의 침대는 졸지에 아이가 정착한 강변으로 바뀐다. 그리고 섹스는 하되 동침은 하지 않는다는 그의 원칙, “에로틱한 우정의 불문율이 와해된다. 이제 술을 마시지 않으면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갖기도 힘들다. 테레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깃털처럼 가볍고 자유롭던 돈 후안 속에 숨어 있던, ‘동정연민으로 고통 받는 트리스탄이 나타난다. 가벼움이 무거워지는 순간이다.

 

 

그녀는 늙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그녀만이 중요했다. 여섯 우연의 소산인 그녀, 외과 과장의 좌골신경통에서 태어난 꽃 한 송이, “es muss sein!”의 피안(彼岸)에 있던 그녀, 유일하게 그가 진정으로 애착을 갖는 그녀.(338)

 

토마시의 삶(개인사)은 그의 조국의 삶(역사)과 평행선을 이룬다. 체코 공산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통감하고 말하자면 오이디푸스 왕처럼 제 눈을 찌를 것을 촉구한 기사가 직접적인 문제가 된다. ‘철회의 요구와 타인들의 웃음앞에서 그는 추락의 길을 선택한다. 프라하의 유능한 외과의사에서 도시 외곽 병원의 허름한 의사로, 유리창을 닦는 노동자로, 급기야 시골의 트럭운전수로. 한데 문제의 기사의 화두를 제공한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테레자가 환기시킨 버려진 아기의 신화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역사는 다시 개인사로 회귀한다. 쿤데라가 선보인 독특한 시간 사용법과 시점을 빌려 테레자의 경우를 보자.

 

그녀에게 토마시의 존재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다름 아닌 그가 내가 일하는 곳에 왔고 다름 아닌 내가 담당하는 테이블에 앉고 다른 것도 아닌 책을 갖고 있고(상승 욕구를 가진 그녀는 책을 숭배한다). 테레자는 그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다. 프라하에 나타난 그녀의 손에 들린 책 <안나 카레니나>는 이 점에서 대단히 상징적이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 만난 날, 그 기차역에서 한 남자가 기차에 치여 죽는다. 소설의 마지막, 안나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지나치게 소설적인이 구성이 실은 우리의 삶의 실제 모습이라고 테레자는 생각한다. 삶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필연의 법칙을 따른다(Es muss sein!). , 무겁다. 이런 그녀에겐 가벼움이 오히려 고통이다. 그녀가 육체(섹스)와 영혼(사랑)을 별개로 생각하는, 그러고자 하는 토마시를 참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토마시와 테레자는 15여년의 세월을 함께 한다. 보헤미아에서 처음 만난 그들은 함께 프라하의 봄을 맞았으며 소련의 체코 침공 때 함께 스위스로 떠났고 다시 체코로 돌아온 뒤에는 역시나 함께 매장의 시기를 보냈다. 단 한 번뿐인 삶이 종결되는 순간도 공유한다. 그 직전, 그들의 사랑과 삶은 무거움을 한아름 껴안은 가벼움에 다다른다.

 

토마시, 당신 인생에서 내가 모든 악의 원인이야.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나 때문이야.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당신을 끌어내린 것이 바로 나야.”(중략)

테레자,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은 모르겠어?”

당신의 임무는 수술하는 거야!”

임무라니, 테레자,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483)

 

이어 테레자의 감정에 대해 작가는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라고 쓴다. 실은 카레닌의 미소라는 제목이 붙은 마지막 장 자체가 그러하다. 주인공들의 죽음에 대해 미리 알고 난 다음 그들의 슬픈 행복을 읽는 기분이 묘하다. 단 하나뿐인 삶, 단 하나 뿐인 나, 단 하나뿐인 너, 단 하나뿐인 카레닌. 어찌해도 이것은 가벼움이 아니라 무거움이다. 이 비극과 마주한 우리에겐 유아적인 자기 연민을 넘어선 뭔가가 필요하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모순이 얘기하는 것은 결국, 긍정과 초월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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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척 좋아하는 소설가 중  한 명입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으며 희한하게(?) 바뀐 이름들(토마스 - 토마시, 테레사 - 테레자 등)에 좀 놀랐으나, 대단한 수작이었다는 옛 기억이 새롭게 환기되더라고요. 소설 속에 숨어 있는 <안나 카레니나>, 니체의 영원회귀 등도 예전보다 더 잘 보이고, <프라하의 봄>에서 열연한 (이제는 늙어버린 ㅠ.ㅠ)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줄리에트 비노쉬도 떠오르고... 어떻든 쿤데라의 다른 소설들도 다시 읽을 기회가 생기면 좋겠습니다 ^^;  마침 전집도 나오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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