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 혹은 꿈꿀 권리

- 스탕달, <적과 흑>

 

 

   

1. 스탕달, 혁명, <적과 흑>

 

 

1789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18482월 혁명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프랑스는 실제로 혼돈과 격변의 공간이었다. 제정(帝政), 왕정, 공화정, 등 정체(政體)의 변화는 곧 세계의 변화였다. 문학은 당연히 그것을 반영한다. 스탕달의 생몰년도(1783-1842)는 이 혁명의 시대와 거의 일치한다. 그의 소설이 두 후배 작가(1799년생인 발자크, 1821년생인 플로베르)와 달리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소설이 어떤 특정한 분파나 정체,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지를 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의 삶의 궤적이 혁명 및 정치의 그것과 맞물려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 혁명은 역사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정작 그의 전기는 놀라울 정도로 따분한 편이다.

 

(흠, 좀 박색이죠?^^; 그렇다고 해서 플로베르나 발자크처럼 극적인(?)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마음에 안 드는 얼굴입니다.. ㅋ)

 

젊은 날 스탕달은 나폴레옹 체제 하에서 군인과 관리 생활을 했으며(1812년 전쟁 때는 러시아까지 갔다가 나폴레옹 군대와 함께 퇴각했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에는 주로 이탈리아에 머물며 딜레탕트적인 삶을 살았다. 그가 다시 관직을 얻은 것은 18307월 왕조가 성립됐을 때이다. 대체로 일신의 행복과 안락을 추구했던 그의 삶은 별다른 얘깃거리를 주지 않는다. 문학적 측면만 봐도 그러하다. 그에게서는 보통 19세기 작가들이 보여주는 순교자적 측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가령 그는 펜의 도형수를 자처하며 괴물처럼, 짐승처럼 써나갔던 열혈남발자크와도, ‘일물일어설의 원칙에 따라 피를 말리는 고통을 맛보며 소설 쓰기에 임했던 냉혈한플로베르와도 다르다. 등단 시기도 상당히 늦었다. 첫 소설 <아르망스>가 발표된 것은 1826, 그가 불혹의 나이를 넘겼을 때였으니 말이다. 이후 그가 쓴 작품은 회상록이나 에세이를 빼고 소설에만 국한한다면 그다지 많은 양이 아니다. 그런 그가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매혹적인 소설 중 하나인 <적과 흑>을 썼다. 바로 이 대목이 극적이다.

 

군인 혹은 관리로서의 출세를 꿈꾸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못 생긴 외모에 대한 보상 작용인 양 수차례 연애를 거듭했으나 대개의 경우 실연을 당했던(대신 <연애론>을 남겼다) 한량이 1830년에 <적과 흑>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완성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이미 47세였다. 이 소설은 182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실제로 있었던 한 형사 사건(‘베르테사건)을 소재로 취했는데, 그 시의성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다(스탕달은 발자크보다 지명도가 낮은 작가였다). 그러나 스탕달은 자신의 소설이 훗날에는 유명해질 것이라고 믿었고(그러고 싶었고) 결국 그 예언이 실현되었다. 실제로 <적과 흑>은 문학성은 물론 읽는 재미마저 갖춘, 고전 치고는 제법 드물게 가독성이 높은 소설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 보자.

 

<적과 흑>은 주인공의 야망과 좌절에 주목한다면 비극적인 성장소설이자 모험소설이고, 그의 사랑과 연애에 집중한다면 대단히 감성적인 연애소설이며, 자유간접화법의 사용이 돋보이는 섬세한 심리 묘사에 매료된다면 훌륭한 심리소설이다. 어떤 경우든 이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매혹적인 청년 쥘리엥 소렐이다. 나폴레옹이 힘으로써 세상을 뒤흔들었다면 스탕달은 문학으로써, 쥘리엥은 연애로써 비슷한 위업을 달성한다. 작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나폴레옹에 대한 자신의 양가적인 입장을 주인공에게는 순수한 열광과 숭배의 형태로 반영한다.

 

한편 스탕달은 부유한 부르주아 출신으로서 귀족과 민중 모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특히 민중에 관한 한 혐오와 경멸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더러운 것을 혐오하는데, 민중이란 내 눈에 항상 더러워 보인다.”라거나 민중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내게는 순간순간마다 고통이 될 것이다.”라거나 가게 방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보다는 매달 보름씩을 감옥에서 보내는 편이 좋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지 않은가(<앙리 브륄라르의 삶>). 그럼에도 정작 자기 소설의 주인공은 목수의 아들, 즉 민중에서 택했다. 무엇이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것일까.

 

 

 

 

 

 

 

 

 

 

 

 

 

 

 

 

 

2. 야망, 혹은 꿈꿀 권리 - 나폴레옹처럼!

 

쥘리엥 소렐은 무식하고 거친 목수의 아들이다. 그럼에도 아비나 형들과는 달리 도무지 육체노동에는 적합하지 않을 법한 야리야리한 몸에 뽀얗고 곱상한 얼굴, 나긋나긋하고 조용한 행동거지, 뛰어난 지력과 예민한 감수성 등 모든 점에서 너무나 민중답지 않다. 환경결정론과 유물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주인공의 성격에 동기화가 다소 부족한 편이다. 달리 말해 작가의 입장에서는 주인공의 현재 위치와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과 차이가 중요했던 것 같다. , “드높은 마음, 비천한 신세”(110장의 제목)!

 

쥘리엥에게 있어 출세는 군인성직자라는 구체적인 명사로 나타난다. 물론, 그의 진짜 꿈은 늙은 군의관이 불어넣어준 대로 나폴레옹이 되는 것이었다. 인생을 나폴레옹처럼!

 

그는 혼자 부르짖었다. “아아! 나폴레옹은 프랑스 청년들을 위해 하느님이 보내주신 사람이었다! 누가 그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인가? 나보다는 부자라고 해도 그저 좋은 교육을 받을 정도의 여유가 있을 뿐, 자기 대신 입대할 청년을 사거나 출셋길을 개척할 만한 돈이 없는 가련한 사람들은 나폴레옹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 숙명적인 그의 기억이 있는 한,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으리라!”(1, 154-155.)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는 비단 쥘리엥뿐만 아니라 하층 계급 전반에 걸쳐 만연해 있다. 소위 나폴레옹 신화의 핵심은 무엇인가. ‘신분은 숙명처럼 주어지는, 고로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급은 본인의 능력과 노력, 어쩌면 운을 통해 어떻든 조금이나 변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혁명, 특히 코르시카 섬 출신의 자그마한 군인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황제가 된다. 개천에서 용이 태어난 셈인데, 나폴레옹이 증명한 것은 바로 그 가능성이다.

 

나폴레옹을 향한 쥘리엥의 모방욕망에 늙은 군의가 심심파적으로 베푼 교육의 영향까지 가세한다. 그는 틈나는 대로 <세인트헬레나의 기록>을 읽고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성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아비의 집을 떠난 이래 그는 예비 사제로서 주로 검정색 옷을 입지만(‘’), 그 내면은 나폴레옹적 야망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쥐라 산맥의 가련한 농사꾼이나, 평생 동안 이 음울한 검은 곳을 걸치고 있어야 할 내가 아닌가! 아아! 이십 년 전만 해도 나는 그들처럼 군복을 입었을 것이 아닌가! 그때라면 나 같은 남자는 전쟁터에서 죽거나 아니면 서른여섯 살에 장군이 되었을 텐데.’”(2, 106)

 

그렇다면 은 단순히 군직과 성직이 아니라 순수한 열정과 현실적 타협, 혁명의 시대와 왕정복고(반동)의 시대 등을 상징하기도 한다. ‘은 차선책이었던 셈이다. 셸랑 신부는 이 점을 일찌감치 간파한다. “자네 성격의 밑바탕에는 어두운 격정이 엿보이는 것 같아 걱정이네. 그것은 성직자에게는 꼭 필요한 절제라든가 세속적 이득의 완전한 포기 같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단 말이야. 자네의 재주는 전도유망하다고 생각하는 바이지만 그러나 () 성직자가 될 경우 나는 자네의 구원이 염려되는 바일세.”(1, 78)

 

그러나 목표가 설정됐다면 움직여야 한다. “쥘리엥에게 출세한다는 것은 우선 베리에르를 떠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자기 고향이 질색이었다.”(1, 43) 더욱이 그에게는 야망을 뒷받침해줄 충분한 능력(특히 신약 성경을 다 외우고 라틴 고전 문학까지 섭렵할 만큼 뛰어난 라틴어 실력)이 있다. 그리하여 이 19세 청년은 아비의 집을 떠나 베리에르 시() 시장 집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이어, 브장송의 신학교, 파리의 드 라 몰 후작의 저택 등 계속하여 대처(大處)로 나간다. 쥘리엥의 동선, 즉 시골 청년의 상경 스토리는 19세기 근대소설의 일반적인 구성을 반복한다. , 쥘리엥은 검은 옷의 나폴레옹이 될 수 있을 것인가.

 

-- <신동아>

 

-- 완연한 겨울입니다. 무척이나 추웠던 겨울날, 소위 '입신양명'을 위해(과연 그랬던가, 이 역시 조작된 기억이 아닐까, 싶지만요) 등가방 하나만 달랑 메고서 부산역에서 통일호 타고 서울에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이 됐네요.

이런 개인사도 있고 하여, 세계문학의 여러 걸작 소설을 통틀어 '마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가 <적과 흑>입니다. 서른을 넘긴 뒤에도 김붕구 선생이 번역한 범우사판으로 읽었는데, 이제는 정말 선택의 폭이 무척 넓어졌죠? 어쨌거나 소설은 뭐라뭐라해도 주인공이 멋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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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패배와 전락을 향하여:

모래 속으로 사라진 한 남자를 통해 조명한 자유의 문제

-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어디론가 떠났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자의 이야기는 항상 흥미를 자극한다. “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 31세에 자그마한 체형의 교사 니키 준페이는 사흘간의 휴가를 얻어 모래사막에 서식하는 곤충을 찾아 떠난다. 신종 곤충을 발견하여 기나긴 라틴어 학명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곤충 도감에 올리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정작은 사구에 파묻힘으로써 원래의 이름을 상실하는 동시에 그 자신이 모래 속의 희귀 생명체, 즉 벌레-곤충으로 변신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모래의 여자>는 니키 준페이가 남자’, 심지어 인간의 대명사가 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남자는 모래 구멍 속 여자의 집에 감금된 순간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그런 남자의 눈에는 여자가 안쓰러울뿐더러 한심하기까지 하다. 밤마다 모래를 퍼내야 하고 모래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삶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잡혀 온 이방인도 아니면서 왜 자유를 반납하고 사냐고, 혹시 마을 사람들에게 뭔가 수치스러운 짓이라도 한 것이냐고 남자는 여자를 추궁한다. 여자의 반응은 차분하다 못해 심드렁하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 봐야, 딱히 할 일도 없고…….

걸어 다니면 되잖아!

걸어 다녀요……?

그래, 걷는 거야……. 그냥 걸어 다니기만 해도 충분하잖아…….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는 당신도 마음대로 나다녔을 것 아니야?

하지만 볼일도 없는데 나다녀 봐야, 피로하기만 할뿐이니까요…….

무슨 그런 웃기는 소리를 하는 거야! 자기 마음을 열어 보라고, 모를 리가 없으니까! ……개도 우리 속에만 갇혀 있으면 미쳐 버려!

걸어 봤어요…….

여자는 불쑥, 껍질을 닫은 조개처럼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끔찍하도록 걸었어요……. 이곳에 올 때까지…… 애를 안고, 오래오래……. 이제, 걷는 데는 지쳤어요…….

 

이 단순하고도 묘한 논리에 당황한 남자는 말문이 막힌다.

 

그렇다……. 십몇 년 전, 저 폐허의 시절에는 모두 한결같이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찾아 광분하였다. 그렇다고 지금,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에 식상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실제로 너 역시 그런 환상을 상대로 한 귀신 놀이에 지친 나머지 이런 사구를 찾아오지 않았던가…….

 

무엇이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이며 무엇이 걸을 수 있는 자유인가. 이러나저러나 중요하지 않다. 모래 바깥에서처럼 모래 속에서도 남자는 여전히 자유를 찾아 헤맨다. 첫 번째 탈출 시도가 실패하자 더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급기야 여자를 반쯤 혼수상태에 빠뜨려 놓고 손수 만든 밧줄을 이용해 사구 밖으로 빠져나가기에 이른다. 46일만의 자유!

 

하지만 이 자유가 모래밭을 계속 걸어 다녀야하는 상황, 즉 도망자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추격을 피해 열심히 도주한 결과 그가 다다른 곳은 개도 얼씬거리지 않는 소금밭’. 늪과 같은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남자는 판으로 찍어 낸 싸구려 과자 신세라도 좋으니, 아무튼 살고 싶다!”라고 생각한다. 결국 적들의 손에 구출된 그는 다시 무덤과 같은 모래 구멍 속에 안치된다. 이 모든 과정이 실은 저들의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라니, 얼마나 허무한가.

 

그럼에도 자유를 향한 남자의 몸부림은 계속된다. 바깥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만 있다면 노인의 외설스러운제안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나 정작 그 자유를 손에 넣었을 때는 그것을 향유하기는커녕 사구 밖으로 한 번 나가 볼 뿐, 자신이 발명한 유수 장치를 살피기 위해 이내 되돌아온다.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중략) 도주 수단은, 그다음 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모래의 여자>는 이렇게 끝난다. 도주를 유예하는 것이 비단 병원에 실려 간 여자를 기다리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과연 남자는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인가.

 

저 독특한 모래 왕국을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체제의 은유라고 생각해 보자. 실제로 모래의 속성을 이용한 부조리한 노동 착취와 인권 유린, ‘감시와 처벌의 메커니즘(망루를 지키는 시선!), 자유의 박탈과 개성의 말살 등은 여러 반()유토피아 소설 속의 국가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아베 코보는 <모래의 여자>의 세계를 이데올로기적 은유로 축소하기보다는 실존적인 정황으로, 보편적인 인간 조건으로 확장한다. ‘모래의 여자가 보여 주듯 자유의 개념은 유동적이며 상대적이다. 남자 역시 이 점을 슬슬 깨달아간다.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의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변화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 배급이 중단될까 봐 두려워서인가, 아니면 여자에 대한 자책감 때문인가, 아니면 또 노동 자체의 성격 때문일까?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 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의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노동은 삶의 동의어에 가깝다. ‘모래의 여자를 그냥 비참한 수인(囚人)으로만 볼 수 있을까. 오히려 그녀야말로 모래와 더불어 살면서 매순간 모래, 즉 세계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한 것은 아닐까. 비슷한 맥락에서 남자는 사구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보유한 채로 사구 속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오히려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거듭되는 패배와 전락, 이것이야말로 니키 준페이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핵심적인 요소인 셈이다.

 

-- 네이버캐스트

 

갑자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완전 칩거하겠으나, 무조건 밖으로 나와야 하는 상황이라, 눈 속에서 절절 매게 됐지요. 덕분에 떠오른 저 책입니다. 눈의 싸늘함과 축축함, 모래의 뜨거움과 건조함... <모래의 여자> 속의 모래 더미는, 개인적으론 러시아 유학 시절 경험한 눈 더미를 상기시키더군요. 

 

 

 

 

이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 속 주인공 '모래의 여자'입니다. 얼마 전에 사망했다는데, 영화도, 영화 속 그녀의 느낌도 강렬했어요. 별로 야한(?) 영화가 아닌데, 이미지는 대부분 다 에로틱 쪽이네요 ^^; 

아베 코보, 라는 이름은 좀 생소했는데요, 다른 소설도 좀 뒤져보니 카프카와 비교되는 이유는 알 것 같더라고요. 그럼에도, 저 사진은 한 시절 탐독했던 국내 비평가를 닮았어요 ^^; 바로 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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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2014-02-10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베 코보의 소설 <모래의 여자>를 원작으로 한 연극이 공연되어 정보 공유합니다. 소설을 읽으신 분들께는 더욱 흥미로운 연극이 될 것 같아 댓글 남겨요. 공연정보는 한국공연예술센터 홈페이지 (www.hanpac.or.kr)에서 "모래의 여자"를 검색하시면 확인가능합니다.

연극 <모래의 여자>
2014.02.18-2014.02.23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전석 2만원
예매 바로가기 http://www.hanpac.or.kr/hanpac/program.do?tran=play_info_view&playNo=140129154121243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올바르게 사유하는 존재의 위대함

- 파스칼, <팡세>

 

 

 

 

 

파스칼의 명상록에 관한 한 우리는 오랫동안 팡세라는 제목을 고집해 왔다. 그가 남긴 저 팡세-생각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갈대일 터이다.

 

391-(347) H. 3.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박살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뿜은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思惟)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서가 아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곧 도덕의 원리이다.(213)

 

인간이 유의미하고 존엄한 존재인 것은 사유라는 행위 때문이다. 위대함의 단초도 여기에 있다. “218-(397) 인간의 위대는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점에서 위대하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의 비참을 아는 것은 비참하다. 그러나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위대함이다.”(115-116) 하지만 파스칼은 단순히 사유와 인식만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라는 것. , 도덕과 윤리가 중요하다. 그 궁극의 지점에 신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팡세>는 인간과 신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으되 신 없는 인간의 비참’(1)신 있는 인간의 행복’(2)으로 이끌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의 호교론은 가히 확률론의 창시자답게 내기(도박)의 논리를 따른다.

 

325-(230) 신이 있다는 것도 불가해하고, 신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다는 것도, 우리에게 영혼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세계가 창조된 것도, 창조되지 않은 것 등등도. 원죄가 있다는 것도, 없다는 것도. (174)

 

그렇기에 일단 믿고 보는 편이 유리하다. 다소 거칠게 말해, 믿으면 밑져야 본전이지만 믿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무()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당장 현실에서도 세 부류의 사람들, 신을 발견한 다음 신을 섬기는 사람들, 신을 발견하지 못하였기에 온 힘을 다하여 신을 찾는 사람들, 신을 찾지도 발견하지도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178) 중 첫 번째 부류만이 합리성(이성)과 행복을 동시에 획득한다 

 

 

 

 

파스칼은 철학자이기에 앞서 수학자이자 과학자였으며 발명가이기도 했다. 이성과 논리의 대변자인 그가 본질상 초이성적 존재이거나 반대로 아예 존재도 뭣도 아닐 수 있는 신을 옹호하고 나아가 신앙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것은 제법 아이러니처럼 보인다. 해답은 파스칼이 지적하는 인간 본연의 모순에 있는 것 같다.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사유를 극단까지 몰아가도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다. 이성이 더 이상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순간, 때문에 인간의 비참과 그것에의 인식이 극에 달하는 순간, 비로소 신의 존재가 요청된다. “225-(278) 신을 느끼는 것은 심정이지 이성이 아니다. 이것이 곧 신앙이다. 이성이 아니라 심정에 느껴지는 하느님.”(117-118) 이렇듯, 신과 신앙에 대한 파스칼의 사유는 기본적으로 그의 인간학의 산물이다. 유한성과 우연성에 종속된, 그래서 항상 아슬아슬한 인간!

 

 

268-(469)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느낀다. 나의 자아는 나의 사유(思惟)로 성립되어 있으므로. 그래서 생각하는 이 자아는 만약 내가 생명을 얻기 전에 어머니가 죽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필연적인 존재는 아니다. 나는 영원하지도 또 무한하지도 않다. 그러나 자연에는 영원하고 무한한 필연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137)

 

파스칼은 인간의 실존을 쇠사슬에 묶인 한 무리의 사형수들에 비유한다. 그 중 몇몇이 매일 교살당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자들은 고뇌와 절망에 사로잡힌 채 그 동료들의 운명에서 자기의 운명을 읽으며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314-(199)). 이 비참한 인간 조건을 어떻게 할 것인가. 숨은 신’, 무한성과 필연성의 존재를 믿음으로써 과연 비참에서 행복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떻든 비단 신앙의 문제를 떠나서라도 온유한 어조로 올바른사유를 촉구한 파스칼의 통찰에는 귀를 기울여볼 만하다.

 

749-[505] 모든 것이 우리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 유익하게 만들어진 사물까지도. 가령, 자연 속에서 담도 우리를 죽일 수 있고 계단도 정확히 발을 딛지 않으면 우리를 죽일 수 있다.

아무리 작은 운동도 전 자연에 영향을 준다. 돌 하나로 온 바다가 변한다. 이렇듯 은총에 있어서도 극히 작은 행동이 그 결과로써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모든 것이 중요하다.

하나하나의 행동에 있어서도 그 행동 외에 우리의 현재, 과거, 미래의 상태와, 그 행동의 영향을 받는 다른 행동들의 상태들을 관찰하고 또 이 모든 것의 관련성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때 사람은 매우 신중해질 것이다.(388)

 

 

 --네이버캐스트

 

 

-- 순전히 '팡세'라는 말과 '파스칼'이라는 말에 이끌려 손에 들었던 책. 정말로 '구덩이 오막살이'와 같은  반지하방에 살던 중학교 시절의 일이다.  그나마 접수됐던 것은, 그 전부터도 알고 있던(-_-;;)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문장 뿐이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허걱, 이런 책이더군요! (('팡세'라는 제목을 워낙 좋아해서, 저 글도 제목에서 시작합니다 ㅎ ㅎ) <네이버> 누군가의 댓글 대로, 이렇게 지겨운 책, 요즘도 누가 봅니까?  하지만 은근히 볼 만합니다. 특히, 무던해지고 심드렁해지고 싶을 때...^^; 뭐, 그럴 때는 확률 문제를 풀면 좋겠지만 수학 쪽은 워낙 젬병이라, 수학자가 쓴 명상록을 보는 거죠...^^:  

- 블레즈 파스칼과 함께 떠오르는 인물들은~~~

 

관성의법칙, 작용반작용의법칙, 가속도의법칙, 만유인력의법칙, 중력의법칙 등 바로 뉴턴입니다^^; 덧붙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그, 바로 데카르트입니다 ^^' 뉴턴이 좀 많이 잘 생기긴 했지만 어째 다들 좀 닮았어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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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극단을 원합니다.” - 청춘에 바치는 송가:

- 루이제 린저(1911-2002), <삶의 한가운데>(1950)

 

 

아홉 살도 안 된 소녀가 추운 겨울날 밤에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소녀보다 열두 살이 많은 언니의 질문에 소녀가 내놓는 대답이 참 잔망스럽다. “나는 이걸 할 수 있어야만 해. (중략) 언제든 따뜻한 침대에서 나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 가시나무를 손으로 잡는 것, 사나운 개한테 가는 것, 매질을 견디고 소금을 먹는 일 등 뭐든지 할 수 있어야 해.”(156.)

 

소녀의 성장의 순간들이 스냅사진처럼 스쳐간다. 십대 초반의 니나는 학업을 중단한 채 외진 도시에 틀어박혀 병든 고모할머니와 그녀의 가게를 돌본다. 그녀가 죽으면 가게를 물려받게 돼 있지만, 누군가가 죽어가는 모습을 관찰하며 기록하는 일 자체가 흥미를 자극한다. 오직 글을 쓰겠다는 욕망뿐이다. 이십대 중후반, 니나는 한 남자와 약혼한 상태에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된다. 약혼자는 이 사실을 알고서도 결혼을 강행하고, 첫 아이를 출산한 거의 직후에 거의 강제적으로 니나를 임신시킨다. 그녀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가스는 끔찍해. 다시는 가스를 선택하지 않을 거야.”(304) 결혼 생활은 종지부를 찍지만 삶은 계속된다. 삼십대의 니나는 작가이자 두 아이의 엄마이자 생활인으로 살면서 반()나치 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기도 한다. 어느덧 마흔을 목전에 둔 니나, 그녀의 삶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삶의 한가운데>’, 즉 마르그레트가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 니나의 얘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진행되지만, 대부분이 슈타인 박사의 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니나를 처음 만난 1930년부터 1947년까지 정확히 18년 동안 때론 가까이서 때론 멀리서 꾸준히 그녀를 지켜봐왔다. 스무 살 연하의 여자를 사랑하되 영원히 그녀를 소유하지 못한 중년 남자의 고백은 꼭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 낭만적인 연애시의 한 구절을 연상시킨다. “나는 니나의 가벼운 걸음걸이를 사랑했으며, 나에게 버섯을 보여주려고, 그리고 잽싸게 도망가는 들쥐를 손으로 가리키려고 재빨리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사랑했으며, 니나의 검은 머리에 얹힌 바늘 같은 전나무 잎들과 니나의 치마에 감긴 거미줄을 사랑했다.”(195) 언니의 시선도 니나에 대한 질투 섞인 동경과 애정을 머금고 있다. 이들이 함께 그려 보이는 니나는 물론 신비스럽고 영웅적인 존재이다. 바로 이것, 즉 니나라는 신화를 만들기 위해 이 소설은 쓰였다.

 

소설은 냉담과 무심을 가장한 아포리즘으로 넘쳐나고 그 저변에는 치기어린 나르시시즘이 깔려 있다. 니나, 마르그레트, 슈타인 박사, 심지어 한나 B에 이르기까지 인물들의 목소리와 문체도 좀처럼 구분되지 않는다. 이 소설을 쓸 무렵 작가가 거의 불혹의 나이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청춘의 열기가 넘쳐난다. 니나는 곧 린저이며, 슈타인 역시 린저이다. ‘슈타인-린저가 사랑한 니나-린저는 단순히 한 여자가 아니라 영원히 잃어버린, 그렇기에 더 소중한 청춘의 상징이자 극단삶의 한가운데의 상징이다. “가령 너무 많은 책들 때문에 질식해 죽을 것 같은 느낌, 혹은 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너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질식당할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모든 아름다운 것이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이런 것에 대한 슬픔. 완전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망. 철저하게 순수한 절망도 없으며 값싼 혼합물, 값싼 혼합물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 인간은 행복할 수 없으며, 행복을 단념해도 평안에 이르지 못한다는 생각.”(206-207) 니나에게서 이런 말들을 배우며 아이는 어른이 된다. 이른바 니나 신드롬 없이 우리가 유년의 뜰을 오롯이 떠날 수 있었을까.

 

 

 

 

 

 

 

 

 

 

 

 

 

 

이 소설을 우리말로 처음 번역, 소개한 이는 전혜린이었고 당시 제목은 ()의 한가운데였다. 그녀가 니나를 묘사할 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는 정신, 자유, 두뇌, 지성, 극단, 긍정 등이다. “남성적인 강함과 결단성을 지닌 여자”, “따라서 모험을 - 그게 어떤 성질의 것이든 간에 자기가 선택하기만 하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여자, 무엇보다도 지적 여자”.(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적 인간에 여성은 좀처럼 포함되지 않던 시절이니 니나가 얼마나 도발적인 매력을 발산했을지 짐작이 된다.

 

 

 

니나의 형상에 전혜린이 겹쳐진다. 실상 그녀가 쓴 책은 일기까지 포함해 수필집 두 권이 전부이지만 어떻든 그녀는 요절한 천재’, 적어도 비운의 여성 지식인의 상징으로 남았다. “어느 마녀의 저주처럼 그녀를 따라다닌 절대로 평범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 심지어 강박관념과, 우리의 실제 삶-생활의 본질적인 속성인 평범사이의 간극, 그리고 충돌! “어렸을 때 내 소원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 역시 그것은 변함없는 것 같다. 무명으로 남을 용기가 나에게는 없다.”(전혜린,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그녀가 이미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이후, 서른을 코앞에 두고 쓴 문장인데, 묘하게도, 열아홉 살의 니나가 던지는 말과 유사한 울림을 자아낸다. “나는 극단을 원합니다. 극단에 대한 특별한 결심이 서 있음을 봅니다.(21)”

 

-- 책&

 

-- 어릴 때는 무척 좋아했던 걸로 기억되는<생의 한가운데>, 다시 보니 몰입(?)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보시다시피, 전혜린 얘기를 덧붙였는데,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있습니다. 그녀의 수필집을 오랜만에 들춰보니, 지금 내 상황 탓이겠으나, 딸 얘기가 의외로 많더군요. 아이 식단도 꼬박꼬박 적어놓고... 60년대에 이른바 워킹맘 노릇 하기가 힘들었을 법하네요...쩝.

 

 

 

오직 전혜린이 번역했다는 이유로 찾아 읽곤 했던 책들입니다.

그녀가 번역한(아마 독일어에서 중역해놓은) 파스테르나크 시의 일절이나 니체의 아포리즘을 적어 다니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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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젠장, 인생은 짧고 그저 한두 마디의 농담거리일 뿐이지.”

너무나 평범하기에 너무나 시적인 삶:

-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더 이상 뉴욕 본사에서는 자리를 얻을 수 없게 된 63세의 세일즈맨 윌리 로먼은 오늘도 장거리 출장을 나갔다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밤늦게 귀가한다. 오랜만에 두 아들, 특히 외지를 떠돌던 큰아들 비프가 집에 와 있지만, 사소한 언쟁을 벌인다. 다음 날, 힘겨운 하루를 마감한 그는 최근 들어 곧잘 꿈꾸었던 대로 자동차를 과속으로 몰아 반쯤 자살하다시피 사망한다. 불과 스물네 시간에 걸쳐 어느 외판원의 죽음을 포착함으로써 한 인간의 일생, 나아가 한 가정과 한 나라의 역사를 조망해 주는 작품, 세일즈맨의 죽음이다.

 

 

 

 

 

 

 

 

 

 

 

 

 

 

 

윌리의 인생에서 가장 부각되는 것은 비프와의 해묵은 갈등이다. 이들 부자 관계를 오랫동안 지켜본 린다는 말한다. “네가 집에 올 거라는 편지를 받으면 아버지는 온통 싱글벙글이 되어서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셔. 아주 기분이 좋으시지. 그러다 네가 올 날이 가까워지면 아버지는 점점 더 불안해하시고, 정작 네가 도착하면 화가 난 것처럼 너와 말다툼을 하시지.” 윌리에게 있어 비프는 가장 아름다운 꿈이자 가장 잔혹한 현실이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처럼 장남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너무 컸던 나머지 그는 아들의 도벽과 시험 중 부정행위를 은근히 장려하고 면허증 없이 차를 몰아도 기백개성의 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교육 철학은 그의 직업이나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다.

 

윌리는 평생 세일즈맨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살인적인 경쟁의 늪을 헤쳐 왔다. 이런 그가 보기에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적 네트워크”, 즉 인맥이다. 지금도 회사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바로 잡기 위해 전() 회장과의 친분 관계에 기댄다. 그러나 현() 사장 하워드에게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온정주의의 잔재일 뿐이다. 이 점은 친구인 찰리도 통렬하게 지적하는 바이다. “자네가 하워드라는 이름을 지어 줬지만 그런 건 어디 팔아먹지도 못하는 거야. 이 세상에서 중요한 건 팔아먹을 수 있는 것들이야. 명색이 세일즈맨이면서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하다니, 우스운 일이로군.” 찰리에게 돈을 꿀 수밖에 없는 정황 역시 세일즈의 원칙과는 맞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는 걸핏하면 찰리와 자신을, 또한 찰리의 아들과 자신의 아들을 비교하지 않았던가. , 보다 핵심적인 문제는 온화한 자존감의 부재인데, 가정에서는 권위에 의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수학과목 낙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온 아들에게 외도 현장을 들켰을 때 어쩔 수 없이 큰소리를 치는 그를 보라.

 

 

( '세일즈맨' 더스틴 호프만 - 그의 왜소한 체구가 이 역에는 딱 제격.)

 

 

딱히 아버지의 외도를 목격한 탓은 아니겠지만, 어떻든 현재 비프는 아버지의 을 철저히 배반한, 잔혹한 현실이 되어 있다. 성공한 거물사업가는 고사하고 성실한 세일즈맨조차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형을 동생 해피는 시인이자 이상주의자라고 부르지만, 서른넷이 되도록 방황만 하다가 느닷없이 농장 구입 자금을 마련하겠다며 옛날에 근무했던 회사의 사장을 만나러 가는 비프는 그냥 황당한 바보일 뿐이다. 하지만 올리버 사장을 만난 이후의 그는 현실을 직시한다는 점에서 아버지보다는 훨씬 용감하다.

 

비프 이제 진실을 아셔야 할 때예요. 전 금방이라도 사장이 되어야만 했지요. 이젠 그런 것들을 끝내려는 거예요!

윌리 그러면 나가 죽어라! 아비에게 반항하는 자식아, 나가 죽으라고!

비프 아뇨! 아무도 나가 죽지 않아요. 아버지! 전 오늘 손에 만년필을 쥐고 11층을 달려 내려왔어요. 그러다 갑자기 멈춰 섰어요. 그 사무실 건물 한가운데에서 말예요. 그 건물 한복판에 멈춰 서서 저는, 하늘을 봤어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봤어요. 일하고 먹고 앉아서 담배 한 대 피우는 그런 시간들을요. 그러고 나서 만년필을 내려다보며 스스로에게 말했죠. 뭐 하려고 이 빌어먹을 놈의 물건을 쥐고 있는 거야? 왜 원하지도 않는 존재가 되려고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거야? 왜 여기 사무실에서 무시당하고 애걸해 가며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거야? 내가 원하는 건 저 밖으로 나가 내가 누군지 알게 되는 그때를 기다리는 건데! 전 왜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거죠, 아버지? (윌리의 눈을 자신에게 돌리려 하지만 그는 멀리 떨어져 왼쪽으로 간다.)

윌리 (증오심에 가득 차 협박하듯이) 네 인생의 문은 활짝 열려 있어!

비프 아버지! 1달러짜리 싸구려 인생이고 아버지도 그래요!

윌리 (통제할 수 없이 격앙하여 비프에게 돌아서서) 난 싸구려 인생이 아냐! 나는 윌리 로만이야! 너는 비프 로먼이고!

 

제발 절 좀 놓아주세요, ? 더 큰일이 나기 전에 그 거짓된 꿈을 태워 없앨 수 없나요?” 아들의 눈물 섞인 애원에도 불구하고 윌리는 그 거짓된 꿈을 태워 없애지 못한다. 그의 자살은 보험금을 타내 아들의 사업 밑천을 대 주려는 자기희생적인 부성애의 발현이지만, ‘원한’, 즉 보상 심리와 상승 욕망에 사로잡힌 성실한 범인(凡人)이 흔히 그렇듯, 자신과 자신의 꿈에 대한 집착의 산물이기도 하다. 정녕 그의 몽상과 환멸, 나아가 파멸은 참을 수 없을 만큼 평범하지만 그렇기에 또한 참을 수 없을 만큼 시적이고 극적이지 않은가. 그가 현대 비극의 주인공이라면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린다 (중략)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윌리 로먼은 엄청나게 돈을 번 적도 없어. 신문에 이름이 실린 적도 없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그이는 한 인간이야. 그리고 무언가 무서운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해. 늙은 개처럼 무덤 속으로 굴러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이런 사람에게도 관심이, 관심이 필요하다고. 너는 아버지를 미쳤다고 하지만…….

 

윌리의 흥망성쇠는 미국의 경제, 특히 1930년대 대공황과 맞물려 있다. 해피의 말을 빌리자면 최고가 되는 것이 목표이던 시절, 과연 누가 우아할 수 있었겠는가. 한데 이미 그 시절이 지났음에도 우리는 왜 윌리처럼 애면글면, 아등바등하며 곁눈질을 멈추지 못하는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촌스러움, 던적스러움이여!

 

-- 네이버캐스트

 

 

-- 연말, 일이 안 되려니 모든 사소한 것들이 단계별로 다 꼬이는군요. 줸장~-_-;;

어쩌면 연관이 없을 수 있지만, 문득, 이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미국 문학은, 개인적으론, 소설보다는 희곡이 좀 더 재미있고 또 심오(^^;)한 것 같습니다. 저 글을 준비하며 <세일즈맨의 죽음>도 다시 읽고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영화도 보고 그랬는데, 무척 감동했더랬습니다.

겸사겸사 미국 지성의 상징이었던 아서 밀러는 '그녀'와 결혼한 걸로도 유명하지요? ^^;  조이스 캐롤 오츠는 '그녀'의 생애를 갖고 엄청 두꺼운 소설도 썼고요. 뭐, 어떤 각도로 어떻게 찍어놔도 예쁘긴 참 예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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