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긴 일이지만, 내가 번역한 책을 이렇게 정독하는 건 처음이다. 필요에 의해 더러 발췌독을 해온 정도.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건 2007년, 정확히10년 전인데(으악!) 초판에 오탈자가 너무 많아 정말 송구스러울 정도다. 그 사이 증쇄할 때마다 고쳤지만, 그렇게 고칠 것이 많았다는 점에, 또 한 번 송구스럽다.
책을 빨리 내기 위해, 10년 전, 편집자와 주말에도 집 근처에서(그 편집자도 이 근처 살았던 시절이구나) 만나 같이 죽 먹고 커피숍에서 담배 피우면서 교정지를 놓고 편집하던 기억이 난다. 교정 과정에서 원고는 전부 퀵서비스로 날랐던 것 같다. 앗, 커피숍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니, 정녕 10년 전이구나.ㅠ.ㅠ
그저께 2권을 다 읽었다. 드미트리(미챠) 얘기가 제일 많다. 특히 초반부, 미챠가 3천루블을 구하기 위해 '대장정'을 떠나는 장면, 그에 앞서 화자가 지적하는 부분이 무척 인상적이다. 수업할 때마다 강조했던 대목인데, 실제 소설을 보니 역시나 도스토-키답게 엄청 길고 장황하게 썼구나...-_-;; 옛날 같으면 다 손으로 썼겠지만 한 번 찍어(!) 와 본다. (앗, 내 손톱이 예쁘구나!^^;;)
평생 동안 제 손으로 돈을 벌어 본 적이 없는 사람, 오직 남(아비)한테 공으로 받아 물처럼 펑펑 쓰는 법만 아는 사람에겐 정녕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다! 더러 우리 주변에도 있지 않나. 카드깡하고 그러다 망하고 그러면서 남 탓, 사회 탓 하고 등등 하는 사람. 좀 비약이지만, 지난 몇 년간 나의 소비 패턴도 미챠와 비슷했지 싶다. 거의 거지로 살다가 번역 인세가 많아져 거의 미챠처럼 돈을 뿌리며 살았던 듯하다. 뿌리는 게 귀찮아 통장에 박아둔 돈도 적은 돈이 아니었으니, 내 주제에는 엄청 많이 벌었던 것이리라. 그 영화가 영원하리라 믿었던 그 순진함과 어리석음 역시 미챠를 방불케 한다.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도 생각했지만, 미챠는 아무래도, 음, 지능검사 하면, 경계선급(70점대^^;;)이나 심지어 지적 장애로 나오지 않을까 싶다...^^;;
워낙 방대한 소설이라 내용 요약이 쉽지 않으나(그래도 그것을 하는 것이 나의 일이지만) 이건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실패한 재판'(오판)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죄와 벌', 특히 '죄'를 단죄하는 사회적 시스템인 재판과 형벌에 대한 도-키의 관심은 <죄와 벌>에서 이미 본격화되었다. <카라마조프>는 예심, 공판 장면도 엄청나게 길고 상세한, 명실상부한 법정 소설로 읽어도 좋을 법하다. 이 경우 드미트리의 비중은 더 커질 밖에. 예심이 종료될 부분, 이런 식의 심리묘사도 많은 논의거리를 준다. (저 부분, 미챠의 발 모양 묘사에서 '병신 같은~' 이런 표현 참 마음에 든다.)
유치원에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데 시간이 애매해서 집 앞, 구청 도서관에서 이 책을 꺼내 읽었다. 무슨 살인 사건 있고, 그 다음, '피스'라는 이름의 남자(살인자)가 나와서 비행청소년(?) 여자애를 죽이는(햄버거도 주고 샤워까지 시킨다!) 장면 부분.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거의 100쪽 읽은 듯. 내가 읽은 건 2권이었던 듯하다.
미야베 미유키는 사회소설-추리소설 쪽으로 명성이 자자한데, 조금만 읽어도 명불허전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그녀의 소설로 완독한 걸로는 <이유>가 있는데, 부동산 사기(?) 이야기였나, 아무튼 재미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한데, 이런 유의 소설과 '범죄소설'(추리소설, 법정소설) <카라마조프>가 명백히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모방범> 역시 만만한 소설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설경구 주연의 영화로 더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된 <살인자의 기억법> 역시, 정말 내 취향이다. 나는 김병수의 위트 넘치는 아포리즘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김영하는 아무래도 짧은 소설에 강하고, 이게 <검은 꽃> 등등의 장편보다 훨씬 나은 듯하다.
이런 유의 소설을 쓰려면 필력이나 문재, 이런 것 외에, 진짜 머리가 좋아야 할 것 같다! 김영하는 딱 봐도 멘사 아이큐는 될 것 같지만(ㅋㅋㅋ), 도-키는 (톨스토이보다야 낫지만) 머리가 별로 좋았던 것 같지 않은데, 어찌 저런 소설을 썼을꼬. 그러게, 소설 자체가 기적이다! 작품 자체가 기적인 그런 작품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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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과 머리를 아이에 관한 근심으로 채우는 건 그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아, 바람이라도 피우고 싶지만 이거야말로 정말 불가능한 일이고, 몸을 써야 하는 일, 즉 강의가 좀 많으면 좋겠지만, 어디나 남아도는 강의 자리 없어 이 역시 여의치 않다. 다들 옷 입고 있는데 나 혼자 병신 같은 몸뚱어리를 드러내놓고 있는 그런 기분. 더 안타까운 건, 모든 것이 점점 악화될 뿐, 하나도 좋아질 건 없으리라는 암울한 전망. 사실이 그런 것이, 정말 더 좋아질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나. 그나마 희망이라면 '뇌병변'의 정의처럼 '기왕지사 더 나빠질 것도 없다'라는 것.
작년 가을부터 '지진'을, 심지어 낮에도, 경험하는 일이 잦고("서준아, 방금 땅 흔들렸니?" "아니, 서준이는 괜찮은데?") 최근에 불안 강도가 너무 높아져 거의 대학 3-4학년 시절 같다. 그 무렵에 심리 상담을 받고 밤에는 무슨 전화 서비스를 이용했는데, 지금도 뭔가 그런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지 않나, 진단해본다.
오랜만에 절친한 선배한테 전화를 걸어 이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20여년(!)을 그래왔듯 무던히 들어주던 그의 답인즉, "에, 나는 (그런 쪽이 아니라) 몸이 피곤하다." ㅋㅋㅋ 비교적 안정된 중소기업에 다니는, 지방출장이 잦은 남편 역시 그런 듯하다. 몸을 써라, 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