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만끽하며 '놀탱이' 모드로 사는 중이다. 좋다!

 

종강할 때만 해도, 번역 인세도 줄었는데 앞으로는 뭘 하고 먹고 사나, 강의라도 하나 더 해야 돈을 벌 텐데, 하는 걱정에 여기저기 강의를 구걸(!)했으나, 아이쿠, 이게 웬떡이냐, 방학은 이토록 좋은 것이다. 때문에 지난 학기가 아주 까마득한 옛날로 여겨진다. 그때 한 강의도 그런데, 그 중 하나가 <러시아 예술과 문화>이다. 적성에 맞는 강의는 아니지만(나는 문학주의자다!!!) 몸에 밴 고루한 성실성, 뭐, 이런 걸로 공부는 쭉 해왔다. 강의 주제 중 한 파트는 응당 회화이다.

 

 

 

 

 

 

 

 

 

 

 

 

 

 

러시아미술사는 중세 아이콘(성화)부터 보는데, 아무래도 19세기 이동파, 그리고 레핀 정도가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은 모더니즘, 추상화 계열, 그 다음 소비에트 시대 소츠아트 등. 냉혹하게, 내리막, 이라고 해도 좋을 법하다. 아무튼 누구나 알 법한 추상화 한 점을 보자. 칸딘스키보다 더 극단으로 나간,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선언문이라고 할 만한 <검은 사각형>(1915)이다.

 

 

1915년에 이 그림은 엄청 혁명이었을 터. 소비에트 시대, 이런 건 어떤가. 미래파 시인으로 유명한 블라지미르 마야콥스키가 참여한(?? 로드첸코와 같이 그린) 포스터이다. 젖꼭지 광고이다. "더 좋은 젖꼭지는 없었고 (지금도) 없다. / 늙을(-어 죽을) 때까지 빨 테다." 대략 이런 문구. 1923년 작이다. 

 

레핀 같은 거장(!)이 보면 이건 정말 똥이냐, 된장이냐 싶은 그림이다. 하지만 이것도 미술사의 한 획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문학에 살어리랏다, 를 외치는 문학주의자다. 그밖에 그림, 음악, 영화 등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아마추어라 생각한다. 그래서, 당연하지만, 요즘 미술이 어디까지 왔는지 거의 무지하고 관심도 없었다. 한데 최근 논란이 된 (천경자, 이우환과 맞물려) 소위 '조영남 화투 대작' 사건 때문에 갑자기 귀가 쫑긋 섰다. 그 덕분에 알게 된 이런 작품들. 회화는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충격이었다, 여러 모로!

 

데미안 허스트, <살아 있는 자의 마음 속에 있는 물리적 죽음의 불가능성>

(제목, 너무 문학적이다!!)

 

데미안 허스트, <천년>.

(이것은 작품의 설명이 정말 후덜덜. 저 시뻘건 것이 소의 머리, 그 옆에 있는 검은 점들(?)은 그를 먹으러 왔다가 감전 돼서 죽은 파리 시체, 옆칸(방)에 있는 건 알까는 구더기들.)  

 

이런 걸 알게 된 건 물론 조영남한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나는 그보다는 차라리 그의 전처인 배우 윤여정에게 관심이 있다. 어릴 때는 "저 아줌마는 못 생겼는데 왜 텔레비전에 나오지?"하고 생각했다. 요즘 그녀는 '한국의 이자벨 위페르'(혹은 한국의 카트린느 드뇌브) 정도 되는 듯하다. 젊은 윤여정은 김기영 감독의 <충녀>에서 독보적인 매력을 뽐낸 바 있다.) 그 때문에 몇(세??) 차례에 걸쳐 연재된 진중권의 글을 열심히 읽으면서이다. 나는 구구절절이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는다. 그는 나에게 무엇보다도 <미학 오딧세이>의 저자인데, 이후에도 간헐적이지만 그의 미학서를 사본다.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25714#dvOpinion

(이렇게 하면 링크되나??)

 

크람스코이, 레핀, 그리고 아주 모던한 그림으로 피카소, 마티스 이런 거 보다가 잠시 졸고 나니, 현대 미술은 여기까지 와 있다. 앤디 워홀도 이젠 할아버지(=클래식)인 거다. '개념'과 '실행'의 분리. 저 작품들을 보면 실감이 된다. 회화라고 다를 것 같지는 않다. 과거 도제 시스템으로의 회귀든, 후기산업사회에 걸맞는 공장형 시스템의 확립이든 아무튼 뭔가가 엄청 달라졌음은 분명하다. 정녕 미학적 충격. 그 사이 문학은 어디까지 왔는지.

 

곁들어, 저 '관행'. 돌이켜 보니 나도 대학원 시절 번역 제법 했다, 내 번역 말고 선생님들 번역. (뭐, 강의도 더러 대신 했다, 그것도 신 나서 했다.) 아예 초고를 잡았든 종이로 뽑아 교정을 봤든 컴퓨터 파일 형태로 교정 봤든. 후자는 어디까지나 교정이니까 번역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기엔 단순히 윤리니 악덕이니 하는 손쉬운 말로는 설명 안 되는 것들이 많이 들어 있다. 그 점도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에서 진중권이 잘 풀어 놓았다. 학계도 사정은 비슷하니까. 우리는 모두 '그' 밑에 줄서서 서로 '그 일'을 하고자 했고, 어쩌면 '박사급 인력 - 시간강사'인 지금은 더 그런가...? 

 

진중권 트위터에 들어가 보려다가 '계폭'이라는 말도 알게 되었다.  빨리 돌아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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