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아름다워라

-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호밀밭의 파수꾼>은 명문 사립학교에 다니는 16세 소년 홀든 콜필드가 영어를 제외한 네 과목에서 모두 낙제를 하여 퇴학을 당한 후(벌써 네 번째다!) 겪는 23일 동안의 일을 1인칭 시점으로 써내려간 소설이다. 길다고 하면 한없이 길 수 있는 성장이라는 사슬의 한 고리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 변호사 아버지에 헐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시나리오 작가를 형으로 둔 이 부유층 자제의 불만은 대체 무엇인가. 왜 그는 스스로 문제아, 시쳇말로 루저를 자처하는가. 친구 샐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 [학교가] 싫어.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싫어해. 그뿐만이 아니야. 모든 것이 다 그래. 뉴욕에서 사는 것도 싫고, 택시니, 메디슨 가의 버스들, 뒷문으로 내리라고 고함이나 질러대는 운전기사들, 런트 부부를 천사라고 그러는 멍청이에게 소개되는 일이나, 밖에 잠깐 나가려고 해도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일이나, 브룩스에 가서만 바지를 맞추는 놈들, 언제나 사람들은…」 (중략)

자동차는 어떤지 생각해 봐난 목소리를 낮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동차에 미쳐 있다구. 조금이라도 긁힐까 봐 걱정하지를 않나, 모이기만 하면 1갤런으로 몇 마일이나 달릴 수 있나 하는 얘기들을 하지. 새 차를 사놓고도 금세 새로 나온 차를 갖고 싶어 하고 말이야. 난 자동차를 좋아하지 않아. 관심조차 없지. 자동차보다는 차라리 말을 갖고 싶어. 말은 적어도 인간적이잖아. 게다가 말은…」.(175-176)

 

그 나름으로 지적인 대화”(183)를 꿈꾼 콜필드는 상식적인대구만 해주는 샐리에게 괜히 역정을 낸다. 속물적인 가치 추구에 혈안이 돼 있고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중상층의 삶에 대한 혐오가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해서 콜필드에게 마땅히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막연한 이상을 찾자면, 태어나서 줄곧 뉴욕과 그 근처에 산 소년답게 센트럴파크 공원 연못의 오리를 사랑하고 동경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것을 좀 더 낭만적으로 표현하면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229-230)

 

콜필드가 지키고 싶은, 또한 붙잡아주고싶은 것은 이 귀여운 소녀 피비가 보여주는 때 묻지 않은, 해맑은 순수의 세계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문명에 물들지 않은 자연의 세계이기도 할 것이다. 때문에 그는 저 멀리 서부로 가서 귀머거리에 벙어리 행세를 하며 돈을 모아 숲 가까이에 작은 오두막집을 짓고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오빠를 만나러 나온 피비가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결국 서부행의 꿈은 좌절된다. 물론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콜필드는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와 같은 장황한 소설에는 관심이 없다는 식의 생각을 밝힌다. 실제로 <호밀밭의 파수꾼>19세기 유럽문학이 사랑한 엄숙하고 진지한 산문 서사시와는 거리가 멀다. 발표 당시에는 금서의 반열에 오르기도 한 이 불량한, 아니 껄렁껄렁한책이 오늘날에는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을 능가하는 명성을 누리고 있다. 청춘의 특권이기도 한 방황과 일탈, 영원히 호밀밭에 머물고 싶은 꿈을 절묘하게 포착한 덕분이리라.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소설에 암시된 건강한 실용주의이다. 이제 한 살 더 먹은 콜필드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으며 퇴원 후 9월 학기에는 또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도록 되어 있다. 결국 서부에서의 은둔 생활은커녕 동부의 중심을 벗어나기도 힘들지 않을까.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248)

 

앤톨리니 선생이 인용하는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스테겔(슈테겔)의 말을 빌자면 홀든 콜필드는 이제 막 성숙한 인간의 문턱으로 들어섰다. 성장의 한 고리가 완성된 만큼 미성숙한 인간의 기록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마땅하리라.

 

-- 네이버캐스트

 

 

-- 어릴 때 참 감흥없이 읽은 책인데, 머릿속에 남아있는 인상과 저 작품의 인기 사이의 괴리를 메워보려고 다시 읽어봤더랬지요. (파인딩 포레스트> 같은 영화에서도 샐린저가 거의 신화적 인물처럼 나오는데요.) 그 결론이란... -_-;; 아무래도 성장소설의 지존(!)은 헤세의 소설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언제 다시 읽을, 그래서 그의 소설에 대해 쓸 기회가 생기면 좋겠는데, 유감스럽게, 교묘하게 비켜가기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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