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에 다시 읽기 시작한 책. 재미있는 해적 이야기에서, 원래 알지만 푸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도 읽히는구나 싶은 표트르 대제, 그 다음 마리 앙투와네트를 거쳐 현재 로베스피에르까지 왔다.
주경철이 써온 많은 역사서 중 이번 시리즈가 유달리 더 마음에 든, 더 재미있게 읽히는 이유는 바로 (유럽)인'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그런 것 같다. 겸사겸사 '유럽인'이라고 되어 있지만 아주 넓게 러시아, 라틴 아메리카까지 다 망라되어 있어 실은 '세계인'이라고 해도 되겠다.
역사에 워낙 과문하여(넘 슬프다 ㅠ.ㅠ) 해적의 원조가 영국이었음을 새로 알게(혹은 상기하게) 되었다. 저 유명한 해적 마크(해골 밑에 있는 것이 단순한 엑스표시가 아니라 대퇴골이었다니, 헐) '졸리 로저' 역시 영국의 원조 해적에서 온 것. 나아가 여성 해적 둘까지. 무척 재미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세계사, 더 세부적으로 서양사를 배울 때 가장 집중하는 대목인 프랑스 혁명. 1학년때 1학기 서평 숙제로 무슨 책을 읽으라고 했는데 제목 조차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학업을 등한시했다. 그때 <서양문화사> C나왔는데, 학업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침체기였다. 나중에 학점은 소위 세탁했으나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왜 그리 음울하게 보냈는지 거참.
잘 정리된 글로 봐도, 모든 혁명이 다 그렇지만, 너무 복잡하다. 그 와중에 그때도 그랬겠지만, 왕자로 태어나서 더 불쌍한 루이 16세와 역시나 하필 그때 왕비 자리에 앉아 있어서 피를 본 마리 앙투와네트를 보면서 참, 팔자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특히 훗날 역사가 여자에게 갖다 붙일 수 있는 온갖 추악한 죄목을 다 붙인 그녀. 낭비와 사치, 저 책에서도 쓰고 있지만, 그녀가 그게 유달리 심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가령 지금도 영국 왕실의 왕세손비는 1년에 1억인가 하는 돈을 품위유지비, 즉 패션에 쓴다고 한다.) 경박과 음탕(특히 동성연애, 아들까지 등등), 이거야말로 날조이기 쉬울 거다. 경박했고 멍청했다는 것은, 그저 평범한 여자-사람의 머리와 감성(변덕)을 가졌다는 것이지, 역사-운명이 그녀에게 안긴 저런 대접을 받을 만큼 숭악한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이런 생각은 츠바이크의 전기를 보며서 했던(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그저 철없고 공부하기 싫어하고 하지만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오스트리아 여제의 막내딸로 자라, 역시 그런 왕비로 살다가 조용히 묻혀/묻어 갈 수 있는 여자였다. 아, 그럼, 그녀는 정녕 죄가 없는가? 이 부분이 참 슬프다. "몰라서". 몰라서 그런 것도 죄라는 것을 프랑스 혁명은 가르쳐준다. 밖에서 민중들이 저렇게 고통받는데 궁전 안에서 그렇게 호위호식하는 것, 그러고서 바깥의 사정을 몰랐다는 것, 이게 바로 죄라는 거다. 살펴보면 이쪽 저쪽 모두 공감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한편, 주경철은 '외국(적국)에 시집온 공주는 인질이나 다름 없다'라고 하던데, 흑, 정말 그랬을 법하다. 이 문장이 한 두 번 나온 것 같은데, 아마 딸을 키우는 아버지의 시선이 살짝 들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아, 물론 그가 아들'도'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겸사겸사,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제국을 쥐고 흔든 예카테리나 여제(2세) 역시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이다. 러시아어를 하나도 모른 채 몸종 하나만 데리고(더 왔을지도 모르겠다) 저 무서운 야만의 대륙에 온 것이다. 이런 인물, 이런 운명도 있는 것이다.
로베스피에르. 이 인물 역시 항상 (생쥐스트와 함께, 하지만 그보다 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참 사람 좋고 세상 유해보이는, 뭐랄까, 고등 한량이랄까 그런 느낌의 법률가. 누가 그를 공포정치의 화신으로 만들었는지. 그 많은 사람을 단두대에 올리고 그 자신 역시 그렇게 사라진 것은 역사의 보편성을 너무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마지막 이미지는 삼십대 초중반에 열심히 본 애니메이션 <le chevalier d'eon>. 심지어 생제르맹 백작도 나왔던 것 같다. 여기에도 로베스피에르가 참 멋있게 나왔던 것 같다.)
<... 유럽인 이야기> 읽으면서 앗, 하는 대목. 마이크가 없던 그 시절, 그 많은 사람들 틈에서 어떻게 연설을 했을까, 하는^^;; 정녕 목소리 큰 사람(가령 당통)이 이겼겠구나 싶은 시절이었다. 비슷하게, 레닌의 연설 동영상을 봐도 마이크가 없던데, 아마 혁명을 하려면 예나(18세기말) 지금이나(20세기초) 목소리가 필수조건이었던 듯하다. 문제는 로베스-프는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는 것. 그렇기에 더더욱 혁명가로서의 그의 존재가 의미심장하다.
끝으로, 읽지는 않았는데, 이런 만화가 있다고 한다. 그 모델이 바로 샤를 앙리 상송, 즉 4대째 형리(망나니)로 일해온 인물이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는 것이다. 태어나보니 사형집행인의 아들. 아무리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고 결국 가업을 이었다고. 그리고 시절이 이렇다 보니 그는 루이 16세부터 쟁쟁한 인물을 모두 자기 손으로 처리했다. 놀라운 건 그는 왕당파에 사형제 폐지론자였다고, 에효. 게다 상당히 지적인 인물이었다고. 일이 없을 때는 외과의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 목을 치는 데는 엄청난 기술(외과적 술기!)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동양사 전반)에도 이런 예들, 일화가 많지 않은가. 사형수 찾아가서 뇌물도 많이 먹였다고 한다, 빨리 제대로 잘 쳐달라고.
charles henri sanson 치면 검색되는 이미지.
이것이 그의 실제 얼굴에 가까울 테고, 참, 대단한 일본 만화, 이런 캐릭터를 만들었다. 일본 만화가들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새삼 실감하는 대목이다! 만화 읽을 시간이 없어서 유감이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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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소설 읽는 것을 좋아하고 또 쓰고 싶어 한 것은 다름 아니라 '사람' 이야기여서였다. 역사 역시 그렇다. 사건이나 사물에 집중해도 되지만 사람에 집중하니 무척 재미있다. 유감스럽게도 학교에서는 시간(시대)에 집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역시 피해갈 수 없는 대목. 학문(공부)에 왕도가 있나. '재미'를 보는 건 잠시, 결국은 꾸준히 학습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