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책이 새로 나온 김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관한 논문을 쓰려 했다. 책도 다 구입했다. 이 참에 연구비 받던 '벨 에포크'에 주문해둔 톨-이 연구서도 처리할 겸.  그런데 <닥터 지바고> 일정에 맞추다 보니 그 논문을 먼저 쓰고 <전.평.>은 내년으로 미룬다. 여사여사 자료를 뒤지던 중 이광수가 이른바 '조선의 톨-이'를 자처했음을, 그 정도로까지 그를 좋아했음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이 부분을 좀 더 다루어 봐도 좋겠다. 비단 이광수뿐만 아니라 이 무렵 우리 지식인들이 사랑한 톨-이는 무엇보다도 <부활>의 작가였다. 정확히 <부활>도 아닌, <해당화: 가주사 애화>(중국어에서 번역했다고 한다)의 작가. 당시 각종 '애화'(대략 창부화된 여자들의 슬픈 이야기, 신파)가 무척 유행했는데 그 원조라고.  그리고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부활>의 한국어 완역(일본어에서) 역시 이광수(혹은 허영숙)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추정도 있을 정도라고.  아, 이광수는 러시아어도 구사했다고 한다.

 

 

 

 

 

 

 

 

 

 

 

 

 

 

 

겸사겸사 사족.  박형규 선생님 덕분에 <부활>을, 또 그밖의 많은 러시아 작품들을 훌륭한 우리말 버전으로 읽어왔지만(특히, 볼쇼이판 <전.평.>) 아, 이제는 세대교체가 절실하다고 여겨진다. 이게 번역 및 번역가의 숙명임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한다. 번역가는 결코 작가가 아니다. 언제가 모 번역가 선생님의 말을 빌어 썼지만 번역가는 '그림자', 작가와 작품 뒤에 붙은 쓸쓸한 그림자이다. 모든 일, 모든 직업에는 '연령 제한' 있다. 학문이나 번역, 창작이라고 예외일 리 없다. 당장 눈이 어두워 내가 번역하는(혹은 쓰는) 텍스트도 제대로 못 보는 마당에..ㅠ.ㅠ 물론 그걸 뛰어 넘는 드문 천재들이 있긴 하지만, 역시나 '그럼에도'이다. 내 번역의 유효기간도 길지 않음을 또한 명심해야 한다.(그럼 뭐 먹고 살지?) 아무튼.

 

톨-이를 무척 사랑한 이광수의 소설 중 그의 흔적, 특히 <부활>의 영향이 아주 큰 작품이 <유정>이라고 한다. 헐, 기억 창고를 아무리 뒤져봐도 안 읽은 것이다, 님아 ㅠ.ㅠ 안빈, 석순옥(맞나?) 어쩌고 하는 무슨 사랑 얘기는 <유정>이 아니고 <사랑>이었나 보다. 그리하여, 이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고 밑바닥으로 다 파야하게 생겼다.

 

 

 

 

 

 

 

 

 

 

 

 

 

 

 

 

<유정>이야 노골적이고, 이 주제와 비교적 무관하다는 <무정> 역시 이형식의 박영채를 계몽하려는(나아가, 네흘류도프가 카츄사에게 그랬듯, '구원'하려는) 그 심리적, 정신적, 도덕적 흐름에 있어 기본적으로 <부활>을 밑에 깔고 있다. - 고 하는데, 아주 공감된다. 덧붙여, 이 경우에도 우리가 꼭 넘고 가야 할 산은 이 분의 이 책.

 

 

 

 

 

 

 

 

 

 

 

 

 

 

 

이광수를 좋아한 적은 없다. 그러나 웃긴 신파나 그 못지 않게 웃긴 도덕소설(계몽~)이나 썼다고 여겨진 그가 왠지, 소설을 참 잘 쓴 염상섭보다 더 인간적으로(?!) 여겨지는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보다 더 정감이 간다고 할지. 언젠가 강의실에서 김윤식 선생님이 열심히 이광수를 '씹던' 기억이 난다. 그의 고아콤플렉스, 또한 '조선/인'에 대한 총체적 열등감, '잘난 것', '높은 것'을 향한 열망, 그가 결국 친일로 간 것은 내적 필연이었던 것, 그의 지적 흐름상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평론가 최재서던가, 그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던 듯하다.) 허영숙과의 로맨스, 결혼 생활 역시 그러하다. 아이들을 많이 낳았던데, 참, 천생 연분이었던 듯하다. 그러게 '사랑의 문법'이 곧 '소설의 문법'으로 이어진다.(이상, 염상섭, 이광수).  

 

 

 

 

 

 

 

 

 

 

 

 

 

 

*

 

우리가 학창시절부터 보아온 이광수는 머리가 훌러덩 벗겨지고 지나치게 둥근(동그란) 알의 안경을 끼고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기껏해야 늙은 아저씨) 이광수이다. 나이가 들어보니 우리의 얼굴과 몸이 양질전화한다는 것을 알겠다. 정확히 그 결절점을 찾기는 힘들겠으나, 아무튼 우리는 나비나 다른 곤충의 변태 못지않은 과격한 변화를 겪는다. 어쩌다 젊은 날의 이광수 사진을 봤는데, 헐, 윤동주 뺨치는 얼굴이었구나. 과연 청년 이광수는 지식인에 작가에 혁명가에(그리고 열정적인 연인에), 그 무렵에는 뭐든지, 누구든지 될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말년(중년)에 이런 얼굴이 된 것이다. 음, 호위호식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 역시, 출세지향적이던, 야망 많던 그가 원하던 대로.

 

 

겸사겸사, 톨-이의 역설은 늙어서 더 볼 만하다는 것. 그는 외모 콤플렉스가 무척 강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톨-이 원하는 톨-이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못 생겼다기보다는 못 됐게(!) 생긴 얼굴인데, 바로 이 대목 '악'을 누르고 '선'을 극대화하는 것이 톨-이의 일생일대의 과제였다. 그리고 말년엔 보다시피, 우리가 익히는, 또 많은 화가들이 사랑한 얼굴.(그리고 그런, 정정한 할아버지의 몸.) 저 수북한 털. 사실 머리카락도 꽤 오랫동안 무성했다. 그러니 그 '육'(=악)을 감당하기가 그렇게 힘들었겠지만, 실은 그것이야말로 창작(=삶)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니, 부러울 수밖에. 그게 없었다면 톨-이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터이다. 마음 착한 지주 귀족 할아버지가 돼서 여러 사회 사업, 자선 사업 하시고 아이들한테 민화 읽어주시고 그러셨을 터. 가끔씩 동네 처녀 총각 주례 서주시고 (믿거나 말거나 많은 사생아를 만드는 대신) 늙은 마누라랑 알콩달콩, 티격태격  잘 살고.   

 

결국 사람은 자신이 원하던, 그래서 걸어가던 그 길의 끝에 이르게 된다. 약간의 차이야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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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소리 2020-04-15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타겠지만, 전문가 분의 글에 호위호식...이란 단어가 찜찜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