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리얼리티와 소설의 리얼리티.
소설 쓰기 힘들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너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라고 지적할 때 흔히 나오는 답. "이거 진짜 제 얘기인데요" "이거 실제 사건에서 가져온 건데요" "이거 자료 보고 쓴 건데요" 그러게 말이다. 내가 모를 리가 있나. 덧붙여, "이게 실제 사실인데, 막상 쓰고 보니 제가 생각해도 너무 작위적인 거예요." 즉, 현실-사실인데 어딘가 심하게 조건화된 것, '소설' 같은 것이다. 무척 당혹스러운 모순이다.
소설 속 리얼리티가 있다. 이창동의 <버닝>을 보고 싶어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읽었다. 이창동의 영화는 최서해의 <홍염>의 현대판 영화버전처럼 읽혔고(보였고^^;; - 카프, 신경향파!^^;;), 하루키의 소설은, 정녕 그의 도저한 부르주아 감성이란, 과연 저패니메이션의 서정성과 낭만성의 언어적-소설적 버전이랄까. 그런데 이게 묘하게 읽힌다, 라는 것. 즉, 소설이라는 세계 속에서는 세 인물의 관계며 그들의 행각이며 대화 등등이 우리의 실제 현실과 유리되면 될수록 더 큰 미학성을, 미학적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놀라울 따름이다. 하루키의 인기는, 우리가 소설이든 영화든 조건화된 장르에서 요구하는, 희망하는 리얼리티는, 어쨌거나 좀 다른 리얼리티임을 보여준다.
"이거 실화냐?" 하는 유행어가 있지 않나. 내 인생을 얼핏, 잠깐 훑어봐도 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거 진짜 실화냐. 2004년 3월부터 시간강사, 2018년 현재도 시간강사, 이거 실화냐. 그 사이 자리 못 잡은 것도 '실화냐' 싶지만 안 짤린 것도 '실화냐' 싶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 아마 복지관과 센터에 다니는 분들, 이미 적응됐을 법도 하지만 그럼에도 한 번씩 이 질문을 던질 거다. 이거 실화냐. 내 아이가 장애라니. 내 아이가 뇌성마비라니. 내가 장애인이라니. 등등. 이런 현실 속에서 문학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 어때야 하는지 다시금 묻게 된다.
여름에 최대한 부지런히 소설을 읽었다. 아무리 비평적 수사를 갖다 붙여도 역시 우리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은 따뜻한 소설, '착한' 소설이 아닐지. 그렇다고 차가운 소설, '못된' 소설은 다 불필요한 것인가. 답을 내기가 쉽지 않다. 문제 설정 자체가 잘못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소설은 어떤 부류에 들어갈지. 고등학교 때 학교 앞 서점에서 빨간(와인) 색(아닐 수도 있다!) 표지의 <광장>을 사들고 나오며 설레었던 기억이 있다. 90년대 초반,<광장>이 아직 문학사-교과서는 아니었던 시절이다. 대학 때는 문지판 전집을 사 놓고 한 권, 한 권 읽어나갔던 것 같다. 작가가 죽는 순간, 비로소 문학사가 시작된다. 영면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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