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엔 SF소설인 줄 알았다.
트랄파마도어라는 괴상한 이름의 행성에서 4차원을 볼 줄 아는 외계인에게 납치된 퇴역군인의 이야기.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나를 지배한 건 드레스덴 폭격 사건의 진실이었다.
<폭격의 역사>를 다시 읽고, 드레스덴 폭격 사건에 대한 각종 자료를 웹서핑하고 자료를 정리한 뒤,
<제5도살장>을 다시 읽어보니 이 책이 왜 위대한 반전소설의 하나인지 알겠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어도 빌리는 군목을 돕는 군종병일뿐 전투에 참여해 본 적이 없다.
적군을 죽여본 적 없는 전쟁의 풋내기는 그저 얼치기 대학생일뿐 군인이라 할 수 없으니
동료는 물론 독일군에게도 무시당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시간여행을 하는 빌리는 드레스덴이 역사상 최악의 폭격 작전의 대상이 될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 외의 누구도 아름다운 바로크풍의 도시가 화염에 휩싸일 거라 알지 못 했다.
성 발렌타인 데이를 앞두고 시민축제를 연 독일 당국도 이를 몰랐을 거고,
아마도 그 축제에 초빙된 강사였을, 나치당원이 된 미국인 하워드 W.캠벨도 몰랐을 것이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피난민으로 100만 혹은 120만이 된 드레스덴 인구 중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3만 5천명인지, 13만 명인지, 25만 명인지 모를 사망자야말로 비극의 주인공인가.
참혹한 살육의 현장으로 끊임없이 시간여행을 떠나야 하는 빌리가 더 비극의 주인공인가.
혹은 역사의 교훈을 얻지 못하고 트랄파마도어인처럼 그 끝을 알면서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지역 폭격 전술을 여전히 감행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야말로 비극의 주인공인가.
그 뒷맛이 한없이 씁쓸하여 최소한 빌리만큼이나 괴로운 심정이 된다.
나로선 도저히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한 마디로 정리 못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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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6-04-23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책 읽으며 가슴이 미어지던 기억이
ㅜ.ㅡ

조선인 2006-04-23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하루님 아니면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을 거에요. 다 차력도장 덕분이죠. 호호호

사마천 2006-04-23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일쪽 입장에서 보면 게르니카라 할 수 있었죠. 민간인들에게 까지 무차별적으로 폭격이 가해졌던 사건입니다. 하워드 딘이라는 미국의 교수이며 반전운동가가 회고하듯이 당시 폭격은 인도적 측면의 고려는 없었습니다.

조선인 2006-04-24 0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마천님, 반가와요. 제 서재에 댓글 남겨주시는 거 처음인 듯. 저야 늘 님의 리뷰를 보지만요. *^^*